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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02화 (202/628)

제202화

철의 일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의식. 최소 58명의 철의 일족 엘프의 목숨이 필요하고 철의 일족 왕의 마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봉인을 한 호수의 무녀 자손의 피가 대량으로 필요한 의식.

그 의식은, 철의 일족의 왕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겨 온 지식이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가신에게도 절대 알려지지 않고 숨겨온 의식이기도 했다.

오로지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왕가의 저력을 이용해 만든 의식.

때문에 의식을 행할 때, 방해가 받지 않도록 펼쳐지는 결계도 상당한 강도를 자랑했다.

의식에 참가하는 사람의 힘만이 아닌, 깨뜨려야 할 봉인의 힘까지 역이용하도록 고안된 결계인 것이다.

물론 무적이란 건 아니다. 이 의식은 봉인을 깨뜨리기 위한 의식이지 뭔가를 수호하는 의식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쉽게 깨질 만한 결계도 절대 아니다. 그것도 결계가 단 한 방에 찢어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 터무니없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봉인이 부서지는 영광스러운 행적에 날카로운 흠집이 나는 순간이었다.

르누는 물론이고 의식 때문에 생명이 거의 빠져나간 병사들도 그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다.

지크는 순식간에 로만느 앞까지 달려 왔다.

바로 로만느를 데리고 빠져나가려던 지크였지만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혈색을 거의 잃어버린 로만느. 손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은 너무도 차다.

여기서 피가 더 빠져나간다면 아무리 생명력 강한 엘프라도 죽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지크는 그녀를 데리고 당장 제단을 빠져나가기 보다는 상처를 먼저 치료하기로 했다.

“…당신은….”

역시 천하의 로만느도 몸 상태가 이 지경까지 악화되자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겨운 것 같았다.

지크는 대답 대신 포션을 꺼내 그녀에게 뿌렸다.

그녀의 상처는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제단 자체에 가시 같은 것들이 돋아나 있었다.

그것들이 그녀의 몸에 구멍을 뚫어 피를 뽑아낸 것이다. 그리고 제단을 흠뻑 적신 피는 제단의 아래쪽에 마련된 홈을 따라 한곳에 모여 떨어졌다.

정말로 악취미인 제단이었다.

그녀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어갔다. 하지만 빠져나간 피까지는 바로 채워주지 못하는 듯 그녀의 혈색은 여전했다.

하지만 엘프의 강력한 생명력을 생각하면 그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극히 짧은 시간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제단에서 시간을 지체했다. 철의 일족의 인물들도 눈앞의 소동을 보고만 있을 멍청이들은 아니었다.

“잡아아아아!”

르누가 고함을 쳤다. 부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식에 참여한 병사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의식의 부작용 때문에 하나둘 죽음에 이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르누에게도 예비로 준비해둔 병력이 있었다. 마치 르누를 지키듯 서 있던 네 명의 엘프가 지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콰아아아!

네 가지 마법이 소용돌이치며 다가왔다. 두 개는 바람의 마법이었고 하나는 불, 하나는 대지의 마법이었다.

미친 듯 울부짖는 폭풍 속에 섞인 불과 돌덩이는 사람 몇 정도는 간단하게 저세상으로 보낼 위력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그것들을 보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영창으로 쏘아낸 마법 치고는 훌륭한 위력을 가지고 있고 마법 간의 상성도 괜찮았지만 지크의 뒤에는 그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마법사가 있었다.

콰아아앙!

뒤에서 뻗어 나온 번개가 달려오는 마법들을 너무 손쉽게 지워버렸다. 오히려 지크를 공격한 엘프들이 허둥지둥 그 마법을 피했다.

그 틈을 타 지크는 여유롭게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지크는 이번엔 로만느에게 포션을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나마 그녀의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체력이 없다기보다는 뭔가 약물 같은 걸로 몸을 마비시킨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면 저 누워있기에는 더럽게 아플 것 같은 제단 위에 얌전히 누워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성격을 봐도 그럴 것 같진 않았고.

“아쉽게도 네가 한 짓거리를 죽어가면서 보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지? 네가 한 짓들은 전부 쓸모 대가리가 없을 거라니까!”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자 대번에 이런 소리를 내뱉는 걸 보면 분명했다.

“옳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꼭 모자란 것들이 자기가 계획을 세우면 모두 그대로 이루어지는 줄 안다니까요.”

“어머, 잘 알고 있군요. 그리고 자기 계획이 잘 안 풀리면 꼭 주변에 화풀이를 하죠.”

“그럼요, 잘 알죠. 높은 지위에 있다면 부하들에게, 가족이 있다면 가족에게 화풀이를 하는 쓰레기. 정말로 빨리 죽어주지 않으려나 몰라요.”

“하나는 괜찮아요. 저 작자, 가족은 없거든요. 왕씩이나 돼서 아직 부인조차 맞이하지 못하다니. 어쩜 인성이든 인망이든 보이지 않나요?”

“하하하, 자기의 열등한 피를 남기지 않으려는 기특한 모습이 아닙니까? 아, 그럴 생각조차 못하는 놈이니 열등한 놈이죠. 이거 참, 제가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어리석었어요.”

“초면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실례지만 생각을 잘못하긴 하셨어요. 똥 찌꺼기를 파먹는 구더기도 생각이 있다라는 말처럼 들려서 좀 그랬답니다.”

“역시 그랬죠?”

“역시 그랬죠.”

과연 오늘 처음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맞는 걸까.

너무나 태연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르누를 깔아뭉개는 모습에 엘프들을 견제하던 라일라가 지팡이를 잠시 미끄러뜨릴 뻔했다.

그러니 정작 당사자인 르누는 얼마나 분통이 터질까.

“뭐 하는 거야! 당장 저 녀석들을 죽여어어어!”

눈이 뒤집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르누의 등쌀에 엘프들이 부랴부랴 검을 뽑고 마법을 준비하며 달려들었다.

‘흠, 일단 물러날까.'

마지막 인질까지 구한 이상 굳이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 지금 눈앞으로 달려가 르누를 인질 삼아 빠져나가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앞으로는 다른 일족들이 연합해서 철의 일족을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고대하던 전쟁이었다.

쿠웅!

바로 그 때 다시 한번 성이 크게 울렸다. 서 있던 인물들이 휘청였다. 지크는 요령 좋게 균형을 잡으며 전면의 봉인을 쳐다봤다.

콰직! 콰지직! 콰지지지직!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만든 것 같은 벽이, 마치 쌓은 자의 공을 비웃기라도 하듯 위로부터 천천히 허물어져 갔다.

그리고 벽 뒤가 드러났다.

뭔가 거창한 봉인이 부서지고 드러난 뒷면이라 지크와 라일라는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상당히 궁금했다. 하지만 드러난 것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열심히 봉인을 푼 르누를 놀리기라도 하듯, 봉인 뒤에는 또 다른 벽이 서 있었다. 그것도 형태조차 봉인이 풀리기 전의 벽과 똑같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벽을 보고 허탈해하지 않았다. 르누와 로만느는 그 벽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 그리고 지크와 라일라도 그 벽을 어디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벽의 형태와 그 벽을 가로지르고 있는 틈을 본 적이 있었다.

“어이, 라일라. 저거….”

“나도 같은 생각이야.”

비올루윈의 유적. 고대 제국 황제들의 묘지로 통하던, 윈두르를 열쇠처럼 사용해 열었던 비밀통로. 새로 나타난 벽은 딱 그것처럼 생겼다.

“으, 으하하하하하!”

벽을 보고 르누가 광소를 터뜨렸다. 드디어 그가 원하던 것이 눈앞에 보였다.

이 순간, 그는 지금껏 당해온 온갖 모욕과 욕설, 비아냥들이 전부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지크와 로만느에 대한 악감정조차 사르르 녹아내렸다.

봉인이 풀린 이상 저들이 자신을 아무리 헐뜯어봐야 패배자의 한탄에 불과하다. 이 순간, 그는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때문에 본인은 부정하지만 로만느의 말대로 상당히 겁쟁이인 그가 이런 대범한 말도 내뱉을 수 있었다.

“큭큭큭! 운이 좋구나, 쓰레기들. 방금 전까지는 사로잡아서 온갖 고통을 주며 죽일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네놈들은 그냥 돌아가도 좋다.”

“어라? 상당히 친절해졌잖아?”

지크가 놀라워했다.

“나가서 전해라. 마지막 선택지를 주겠다고. 전쟁인지 아니면 복종인지. 아, 하지만 너희 일족의 선택권은 없다, 호수의 무녀여.”

턱을 들고 눈을 내리깔며 그가 말했다.

“나를 모욕한 죗값은 치러야지. 나가서 너희 일족 모두를 데리고 오도록. 그리고 저항해 봐라. 내 친히 그 하찮은 저항을 짓이겨주지.”

“…열쇠는 있냐?”

로만느가 낮게 물었다. 지금껏 계속해서 르누를 비하했지만 그녀도 문 너머에 봉인된 힘이라는 것에는 상당한 위협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르누는 그녀의 태도에 흡족함을 느끼며 말해줬다.

“없으리라 생각하나? 만약 그렇게 믿는 게 좋다면 그렇게 믿도록. 나중에 너희에게 닥칠 절망이 더욱 깊어질 뿐이니.”

그때 계단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지하에서의 소란에 급히 주변 병사들이 달려온 것이다. 그들은 순식간에 지크 일행을 향해 검을 겨눴다.

하지만 르누가 막았다.

“그만둬라.”

“네? 하지만 전하, 침입자가 아닙니까!”

“됐다. 내가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래, 너희가 다리까지 안내를 해주도록. 다른 놈들이 그놈들에게 덤벼들지 않도록.”

명령을 받은 엘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명령은 명령. 그가 다른 병사들에게 손짓을 하자 병사들이 전부 무기를 거뒀다. 그리고 지크 일행에게 거리를 뒀다.

“뭐 하나? 빨리 가지 않고. 아님 뭐냐. 이제 와서 우리에게 항복을 하고 싶은 건가?”

르누가 계속 이죽인다. 라일라가 지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지크, 지금은 나가는 게 좋겠어.”

“잠깐만.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지?”

웬만한 질문에는 모두 대답을 해주겠다는 듯이 르누는 팔짱을 끼고 지크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 안의 힘이 그렇게 대단한 거라면 문 열고 한번 보여주지 그래? 솔직히 처음부터 궁금했어.”

“그건 안 될 거예요.”

대답은 로만느에게서 나왔다.

“저 안의 힘이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몰라요. 아마 저 문은 다른 의식을 통해 차츰차츰 열겠죠. 안의 힘을 제어하면서 말이에요.”

“그 정도 머리는 있군요.”

“원래 벌레들이 자기 목숨 귀한 줄은 알죠. 위장 같은 걸 괜히 하겠어요?”

“…내 자비심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시험하지 말도록.”

“저 봐요. 대단한 힘을 얻었다며 관대한 군주 흉내를 내더니 욕 좀 먹었다고 다시 부들대는 꼴이라니.”

“추하군요. 정말 추해요. 아니, 진짜 추합니다. 저렇게 추할 수가 있나요? 제 인생동안 본 가장 추한 인간이군요.”

“이 자식들이…!”

다시 이마에 핏줄을 돋우며 르누가 핏발 선 눈으로 지크 일행을 쳐다봤다.

“좋다! 그렇게 여기서 죽고 싶다면 여기서…!”

“하아아앗!”

그건 갑작스러웠다. 지크가 갑자기 뒤에 있는 라일라를 잡아채더니 르누를 향해 날아올랐다.

양손에 라일라와 로만느를 안고 있었지만 그의 속도는 말 그대로 빛살이었다.

무기를 들 수 없어 지크는 르누에게 발을 쭉 뻗었다. 단순한 날아차기였지만 그 힘과 속도를 생각하면 사람 머리 정도는 우습게 으깨버릴 수 있는 위력이었다.

지크 일행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크와는 방의 끝과 끝에 서 있던 르누마저 제대로 인지를 하지 못할 정도의 기습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보니 르누는 간신히 지크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콰아앙!

지크의 발이 벽에 부딪쳤다. 커다란 소리가 났지만 벽은 멀쩡했다.

죽을 뻔한 르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원래 지크 일행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병사들이 그를 우르르 감쌌다.

지크 일행과 르누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 이 자식이…!”

상당히 놀랐는지 르누가 지크를 손가락질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지크는 아쉽다는 듯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이 자식이이이! 내가 기껏 자비를 내려 보내주려고 했더니 그걸 기습으로 갚아!”

“안 죽었잖아.”

그거면 됐지 않냐는 투로 지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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