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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01화 (201/628)

제201화

역시 전날의 침입 때문인지 성내의 감시는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이곳도 한스와 스녹이 일으킨 전투의 영향에서 벗어날 순 없는지 한 번 침입을 허용한 곳치고는 병사가 적었다.

둘은 성에 진입했다.

라일라가 긴장감에 지크의 손을 꽉 쥐었다.

‘정말로 비올루윈 유적과 같은 곳이라면 순간이동은 안 될 거야.’

그녀의 최후의 보루가 쓸모없어지는 곳. 비올루윈에서도 로브를 입은 놈들에게 잡히기 직전까지 몰린 이유가 그것이 아니던가.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후의 보루의 상실에는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을 안 것일까. 그녀의 손을 잡은 지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일라가 지크를, 정확히 말해서 지크가 있으리라 생각되는 정면을 쳐다봤다. 마법의 힘 때문에 보이진 않는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지크는 거기 있었다.

‘…정말로 골치 아픈 녀석.’

자신의 과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와중에 지크의 이상 증세까지 겹쳐 내색은 안 했지만 요새는 소화불량까지 와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만큼 그가 믿음직할 때도 없다.

라일라는 지크의 보이지 않는 리드를 받으며 성을 나아갔다.

라일라도 곧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돌바닥을 들어내 억지로 뚫은 듯한 생김새의 입구.

입구에는 저번보다 많은 병사가 서 있었다. 하지만 몸을 겹쳐 물샐틈없이 봉쇄하고 있지 않는 한 투명화 마법을 건 둘을 막기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외부에 이질적으로 비춰 보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병사들의 사각을 이용해 자신을 리드하는 지크의 움직임은 라일라가 내심 감탄을 할 정도로 뛰어났다.

긴장감을 가득 안은 채 지크가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서면 서는 대로 따라 움직이던 라일라는 지하 계단에 들어선 뒤에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대단해.’

자신 혼자 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잠입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계단에는 다행히도 병사가 없었다. 둘은 조금은 여유롭게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하에 도착하자마자 라일라는 다시 긴장감을 바짝 끌어 올려야 했다.

“내 말이 맞지?”

지하의 상황을 보고 지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가 예상한 것처럼, 오늘도 무녀는 지하에 끌려 내려와 있었다. 초상화를 본 적이 있는 라일라도 그녀가 무녀인 걸 금방 알아차렸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통로 같은 방에 좌우로 병력이 늘어서 있다. 창대를 꼿꼿이 세운 채 가지런히 도열한 병력들은 방 중앙을 향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중앙에, 마치 제물 의식에나 쓰일 것 같은 조그마한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무녀는 그 위에 누워 있었다.

척 봐도 그녀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아니, 무척이나 위중했다.

제단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엄청났다. 제단은 이미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불길한 붉은색 사이사이로 차가운 회색의 빛이 비친다. 아마도 그것이 본래의 제단의 색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제단에 본래의 색은 의미가 없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라일라가 최악의 상황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제단 위로 흐른 피는 인간이라면 이미 치사량이었으니까. 하지만 지크는 라일라의 말을 부정했다.

“저 정도는 괜찮아. 엘프는 인간보다 훨씬 더 생명력이 강해. 인간이라면 죽는 부상도 의외로 멀쩡하게 살아남는 경우도 많아.”

회귀 전에 질리도록 경험해본 터라 지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저렇게 계속 놔두면 확실히 죽겠지.”

라일라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구하러 가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거 쉽게 못 뚫겠지?”

“응.”

‘아마도’도 아니다. 확신을 담아 라일라는 긍정했다.

의식의 장소는 기괴하게 일그러져 보이고 있었다. 사물의 형태가 완전히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야를 방해하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라일라가 말했다.

“결계야.”

“의식을 행할 때 자동적으로 의식을 방어하는 류의 것인가.”

“아마도 그럴 거야. 느껴지는 마력으로 보면 부수려면 적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로만느는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거나.

“음, 내가 저 녀석들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지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녀석들이 힘이란 것에 집착을 하고 있었다지만 단 하루 만에 사태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흘러갈 줄은 지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포기할 거야?”

“당연히 아니지.”

그의 예상보다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졌을 뿐이다.

그래, 딱 그 정도. 고작 이 정도 예상외의 사태를 넘지 못했다면 지크는 마왕으로서 군림하긴커녕 가문에서 나오자마자 길거리 어딘가에서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숨소리나 심장 소리를 들어보면 아직 여유는 있어.”

마력을 끌어 올려 엄청나게 예민해진 지크의 청각이 로만느의 몸 상태를 포착했다. 정말로 엄청난 엘프의 생명력이었다.

“저런 의식이라면 어딘가에서 분명 흔들림이 생기겠지.”

애초에 의식, 그것도 저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란 것은 목적이 뚜렷하다.

그저 자연의 감사함이나 신에 대한 찬양, 정령과의 교감 같은, 말 그대로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한 의식과는 다르다.

라일라도 동의했다.

“맞아. 특히 저런 되먹잖은 짓을 저지르는 놈들은 대부분 비슷한 놈들이지. 어떻게 보면 목적을 뻔히 예상할 수 있어서 오히려 예뻐 보이는 놈들이라니까.”

목적을 이룰 수 있는 힘. 그들이 바라는 것들은 대부분 그런 것들이었다.

“엘프, 그것도 나이를 먹어 상당히 강한, 더구나 무녀의 피가 필요한 의식이라니.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상당한 힘의 반향이 나올 게 틀림없어.”

그러면 아무리 의식을 보호하는 결계라도 일순간의 출렁임을 피할 수 없다.

“그 틈을 파고들 생각이지?”

“그래.”

지크는 윈두르를 조용히 들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고 있는 거지?”

빈틈이라고 해 봐야 결계가 약간 출렁이는 것뿐이다.

그 출렁임을 따라 결계의 밀도가 일순 요동친다. 하지만 그건 극히 짧은 순간이다.

무작위로, 무차별적으로 움직이는 결계의 요동을 짧은 시간에 파악해 공격해야 한다.

게다가 정확해서만도 안 된다. 아무리 밀도가 낮더라도 결계는 결계. 일정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결계의 틈을 포착할 안력, 결계의 출렁임을 쫓아갈 수 있는 속도, 그리고 낮은 밀도의 결계를 일순간 찢어버릴 수 있는 힘, 이 모든 것이 합쳐져야 가능한, 말 그대로 ‘이론상으로 가능한 기술’인 것이다.

솔직히 라일라조차도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존재는 상식을 깨부수는 걸 정말 좋아하는 존재다.

“이봐, 라일라. 넌 지금 너와 같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거냐?”

라일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법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골치 아프고 성질 더럽고 하지만 유쾌한 그녀의 동료가 무척이나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 넌 그런 사람이었지.”

반쯤은 감탄해서 그리고 반쯤은 포기해서 그녀가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나도 준비를 해둘 테니까.”

“오냐.”

라일라에게 대답하고 지크는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날카롭게 뜨며 오로지 신경을 결계에 집중했다.

“…됐다!”

목적을 달성해서 희열에 잠긴 목소리가 들린다. 당장이라도 얼굴을 짓밟아 저 희열을 절망으로 바꿔주고 싶은 목소리다.

‘철의 일족의 왕이군.’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의식을 집행하고 있는 자가 바로 그였다.

그가 황금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잔의 반짝이는 누런 표면 위로 새빨간 선이 몇 개 그어져 있다. 흘러내린 핏줄기의 자국이었다.

그것은 로만느의 피를 받은 잔이었다.

그것이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지 그는 히죽거리는 얼굴을 참지 못했다.

‘아, 빨리 출렁임이 안 오려나.’

로만느를 구하는 것보다 르누의 저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

“드디어 우리의 오랜 비원이 이뤄진다!”

르누가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바로 로만느의 말이 뒤따랐다.

“오랜 비원은 무슨. 등을 떠밀 존재가 아니었다면 생각도 안 했을 겁쟁이 새끼가. 아니면 고작 그 정도의 기간이 너한테는 오랜 세월이었냐? 너는 엘프보다 하루살이가 더 어울리는 것 아냐?”

지크는 정말로 로만느에게 감탄했다. 인간이라면 당장이라도 이승을 떠났을 정도의 피를 흘리고도 저 입담은 여전했다.

지크에게 이렇게 연달아 감탄을 받을 수 있는 존재는 무척이나 적다.

르누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다 죽어 가면서도 그 더러운 혓바닥은 여전하군.”

안 좋은 쪽이긴 하지만 그도 지크와 비슷한 감정을 안은 것 같았다. 그게 지크는 조금 기분이 나빴다.

“흥, 하지만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드러누워 혓바닥을 놀리는 것뿐이겠지. 너는 거기서 죽을 거고, 네 일족도 우리의 노예가 될 거다. 네가 순순히 우리에게 협조를 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을.”

르누가 혀를 차며 이죽였다.

“그러게 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아.”

죽음 앞에서 드디어 꼬리를 내린 것일까. 로만느가 지금과는 다른 약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로만느는 로만느였다.

“네가 조금만 덜 찌질하고 덜 겁쟁이고 덜 짜증 났다면 그랬을 텐데. 대체 넌 왜 그렇게 생겨 처먹은 거야? 원망스럽게. 네가 조금만 더 제대로 된 놈이었으면 우리 일족도 너희 일족도 서로 좋았잖아.”

르누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이고 싶은 듯 잔을 잡은 손가락이 꿈틀댄다.

“…네 일족은 내가 정말로 처절하게 노예로 부려 주마.”

“너로서는 무리라고 생각해. 뼛속까지 노예근성인 너와는 달리 우리 일족은 많이 반항적일 테니까.”

“그래봤자 변하는 건 없다. 내가 이 절대적인 힘을 얻는 걸 거기서 죽어가며 지켜보기나 해라.”

르누는 로만느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는 벽에 다가갔다. 그저 벽돌을 쌓아서 만든 것 같은 평범한 벽이다. 눈을 멀게 만들 것 같은 명화가 그려진 것도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크는 집중력을 더욱 높였다.

적어도 저 평범한 벽을 피로 그린 그림으로 꾸미기 위해 저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건 확실하니까.

“드디어 우리는 우리의 힘을 돌려받는다!”

르누가 크게 외쳤다.

“저 저주스러운 호수의 일족이 빼앗아간 우리의 힘을! 우리의 정당한 힘을! 지금 돌려받는 것이다.”

촤아악!

르누가 잔을 휘둘러 피를 벽에 뿌렸다.

그 순간.

우우우웅!

벽에서 강대한 울림이 번졌다. 지금껏 시치미를 뚝 떼고 평범한 벽으로 위장하고 있던 것이 푸른 문양을 가득 띄워 올렸다.

“오?”

“어?”

지크는 물론이고 라일라까지 그것을 보고 놀랐다. 지크는 물론이거니와 라일라도 저 벽에 대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엄청난 위장 능력이었다.

“저건 뭐냐?”

하지만 드러난 이상, 그건 라일라의 전문 분야였다.

“봉인이야. 그것도 아마 피와 능력, 두 가지를 이어받은 자만이 풀 수 있는 봉인. 굉장히 정교하고 강력해.”

“피와 능력으로 이어지는 봉인. 그것 때문에 무녀가 필요했군.”

아마도 저 봉인을 건 것은 무녀의 선조 무녀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까지 장식처럼 서 있던 병사들이 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력이 공명하며 벽이 흔들리고 문양이 더욱 선명해졌다. 벽에 뿌려진 로만느의 피도 덩달아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끝이다!”

르누가 크게 외쳤다.

쿠웅!

성이 크게 울렸다. 벽에 커다란 균열이 갔다. 의식의 결계가 출렁였다.

그것이야말로 지크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탓!

지크가 순식간에 결계에 접근해 윈두르를 휘둘렀다. 윈두르른 섬광같이 뻗어져 정확히 결계의 밀도가 낮아지는 곳을 강타했다.

찌이이익!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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