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지크와 라일라는 옆 건물 벽에 몸을 숨기고 인질이 잡혀있는 건물을 살폈다.
살벌하게 감시 병력이 깔렸던 조금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은폐였지만, 한스와 스녹이 관심과 병력을 죄다 끌어모은 지금은 여유가 있었다. 오히려 널널하다고도 생각될 정도.
지크가 먼저 건물 옆으로 살금살금 접근했다. 병사 둘이 안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어제야 자기가 왔다 갔다는 흔적조차 남기면 안 되기에 해를 끼칠 수 없었지만 오늘은 다르다.
지크가 뒤쪽으로 신호를 줬다.
후웅!
무언가 지크의 얼굴 옆을 스치며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화살이 보초 한 명의 미간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지크도 다른 병사의 목에 윈두르를 꽂았다.
“커흑! 쿨럭!”
소리 대신 핏덩이만 꾸역꾸역 뱉어내던 병사가 몸을 떨며 쓰러졌다.
바람 화살에 직격당한 병사는 소리를 낼 시도조차 내지 못하고 즉사한 상태였다.
지크는 근처에 있는 수풀에 시체를 던져 넣었다. 그동안 라일라는 병사들이 죽은 자리에 지팡이를 대고 짧게 주문을 외웠다.
순간 병사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대단한데?”
“별거 아냐. 그냥 내 이미지를 잠시 투영하는 환상 마법일 뿐이니까. 자세히 보면 디테일도 떨어지고.”
그녀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방금 죽은 병사들과는 많이 달랐다. 아니, 생김새를 떠나 조금만 집중해서 봐도 어색한 티가 확 났다.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어차피 이 상황에 보초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주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그렇게 오래 속일 필요도 없었다.
지크는 문에 손을 댔다.
“준비됐지?”
“응.”
지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며 라일라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응?”
“뭐지?”
문을 열자마자 병사 두 명이 보인다.
두 병사가 지크와 라일라를 확인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침입자임을 확신하고 큰 소리를 내려 할 때, 바람 화살이 꽂혔다.
퓩! 퓩!
이번에도 정확히 미간에 꽂혔다. 지크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하지만 그 움직임에 비해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는 힘없이 나자빠지는 시체들을 잡아 조용히 눕혔다. 그리고 라일라를 향해 엄지를 치켜 올렸다.
어려운 건 침입했을 때뿐이었다. 경계병은 더 있었지만 입구에 있던 병사들과는 다르게 녀석들은 혼자서 움직였다.
게다가 바깥에서 들리는 전투 소리에 제대로 경계에 신경을 쓰지 못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놈들이 지크와 라일라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컥!”
또 한 엘프가 목에 피를 뿜고 쓰러진다. 이번에도 쓰러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바닥에 눕힌 지크가 라일라에게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위층으로 올라가자는 신호였다.
‘1층은 정리가 끝났나보네.’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계단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크가 조심스럽게 계단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파악했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복도 양 옆으로 문이 가지런히 나 있었다. 그중 여덟 개의 문 앞에 병사가 두 명씩, 총 열 여섯이 서 있었다.
그곳이 인질이 갇힌 방이었다.
‘한 놈씩 처리하기는 무리군.’
보초들이 서 있는 곳이 사각이 없는 직선으로 이루어진 복도였기 때문에 누군가 죽는다면 다른 놈들이 바로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웬만하면 한꺼번에 처리하고 싶은데.’
혹시나 보초 중 일부가 인질의 목숨을 노리거나 그들의 목숨을 잡고 지크를 협박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눈 하나 깜짝할 지크도 아니었고 그런 상황도 해결할 능력이 있지만, 그래도 인질 구출 작전인 만큼 안전하게 가는 게 좋았다.
지크가 라일라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한 후 목소리를 극히 줄이며 물었다.
“라일라. 네 마법으로 몇 명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지? 소란이 나지 않고 녀석들도 자기가 죽을 때까지 공격받았다는 걸 알아채지 못 할 조건에서 말이야. 웬만하면 가장 거리가 먼 놈들을 처리해주면 더 좋고.”
섬멸이야 번개든 불덩이든 폭풍이든 꽂아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지크가 내건 조건이 복잡했다.
“…확실하게는 여덟. 조금의 실패 확률을 감수한다면 전부.”
하지만 역시 라일라는 라일라였다.
인질들을 지키고 있으니만큼 척 봐도 상당히 정예로 보이는 병사들을 아무런 소란 없이 확실하게 여덟을 죽일 수 있다.
그리고 위험부담을 조금 진다면 전부를 보내버릴 수 있다는 소리를 그녀는 태연하게 했다.
“좋아. 그러면 네가 제일 멀리 있는 여덟을 처리해.”
라일라가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병사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상당히 많은 양의 마력이 소용돌이쳤지만 그 중 바깥으로 새는 마력은 거의 없었다. 환상적인 마력 컨트롤.
후웅!
바람의 화살이 날아갔다. 격하게 소용돌이치는 무형의 바람은 직선으로 쏘아진 지금까지와는 달리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목적지는 지금까지와 같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전면을 보고 있는 경비병의 미간.
퍽!
두개골이 꿰뚫리는 소리가 나며 네 개의 미간에 구멍이 났다. 그들의 신형이 일제히 허물어졌다.
살아남은 경비병들이 소리를 듣고 고개가 돌아간다. 그 순간, 지크가 움직였다.
눈 한 번 깜박일 동안 지크는 복도, 살아남은 경비병들의 중앙에 섰다. 그리고 윈두르를 움직였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라일라의 눈에는 소름 돋는 섬광이 몇 번 번뜩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투확!
남은 여덟의 머리가 일제히 솟아오르며 주변에 피보라를 뿌린다.
그야말로 일순간에 열여섯에 달하는 경비병이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았다.
계단에 몸을 숨긴 채 사태를 보고 있던 라일라가 물었다.
“끝이야?”
“그래.”
더 이상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는다. 라일라도 당당하게 계단에서 나왔다.
쓰러진 몸통과 굴러다니는 머리통 그리고 계속해서 번지는 피를 피해 지크에게 다가갔다.
지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그가가 손잡이를 가리켰다.
“뭔가 마법적 잠금 같은 건 있어?”
라일라가 손잡이에 손을 가까이 하고 잠시 마력을 살폈다.
“없어. 잠겨있다면 물리적인 걸 거야.”
콰직!
지크는 간단하게 손잡이를 잠금쇠 째 부수고는 문을 열었다.
아무리 조용히 처리했다고 해도 방문 너머로 흐르는 소리까지 막을 순 없었는지 방 안의 인물은 일어서서 문 쪽을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태연하게 라일라에게 말했다.
“맞지?”
“맞네.”
방 안에 있던 여자는 드로니안이 보여준 초상화에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당신들은 누구죠?”
뒤편에 자신들을 감금하고 있던 철의 일족 병사의 시체를 보고 희망을 담아, 하지만 아직 경계는 풀지 않은 채 그녀가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왕비님.”
지크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제 이름은 지크. 따님의 친구입니다.”
그녀, 호수의 일족의 왕비이자 레오나의 어머니인 ‘시디아 원 트 글로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 * *
지크는 인질들을 전부 복도에 모았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쓰게 웃었다.
“다행히 서로 크게 고초를 겪진 않은 모양이군.”
“음식을 뭣 같이 넣어준 것 말고는 괜찮았네. 아니, 오랜만에 잘 쉬었을 정도지. 신하들의 잔소리가 없는 나날은 오랜만이었어.”
과연 한 일족을 이끌어가는 우두머리일까. 상당한 시간을 갇혀 있었음에도 그들은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역시 자신들을 구해준 인물에 대한 호기심은 숨기지 못 했다.
“그래. 호수의 일족 왕의 딸내미 친구라고?”
“그렇습니다.”
“가출해서 골치 아프다더니, 훌륭한 원군을 데려 왔잖나.”
산의 일족의 왕이 호수의 일족의 왕, ‘레트리 펄 훔 드라우드’의 어깨를 툭쳤다. 하지만 레트리의 안색은 심각했다.
“혹시 다른 인질은 없었나?”
“그러고 보니 무녀님이 보이지 않는군.”
다른 이들도 무녀가 없다는 걸 알아채고는 얼굴을 굳혔다.
“무녀님이라면 성에 잡혀 계십니다. 여러분들을 안전하게 모신 다음에 바로 구하러 갈 생각입니다.”
“어머니만 성에 따로 가뒀다고? 어째서?”
“대답은 나중에 해드리죠.”
조금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지크는 레트리의 질문을 끊었다.
“저 친구 말이 맞네. 적진에서 사정 설명을 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지. 무녀님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야.”
바다의 일족의 왕이 말했다.
그도 지금의 돌아가는 전황 등 물어보고 싶은 것들은 많았지만 지금은 탈출을 우선할 때였다.
레트리와 시디아도 수긍했다.
지크가 라일라에게 말했다.
“라일라, 부탁한다.”
“응.”
“나는 혹시라도 건물에 들어오는 놈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으마.”
1층 문 앞에서 감시를 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지크.”
그를 라일라가 불렀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절대로 혼자 가지 말고.”
“오냐.”
담백하게 대답하고 그는 1층으로 향했다.
바깥에 라일라가 세워둔 환상이 통한 모양인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엘프는 없었다. 윈두르를 어깨에 툭툭 부딪치며 방문을 쳐다보길 얼마.
“다녀왔어.”
라일라가 2층에서 내려왔다.
“문제는?”
“없었어.”
“좋아. 그럼 이제 남은 한 명만 찾으면 되겠군.”
지크와 라일라의 시선이 성에 쏠렸다.
* * *
지크와 라일라가 성에 도착할 때까지 멘티스에선 계속 전장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섬의 시선 전부가 그쪽을 향하고 있으니 둘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편했다.
“쟤들 정말로 잘하네.”
라일라가 한스와 스녹에게 감탄했다.
“재능 있는 녀석들이야. 주변머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짧은 시간 안에 경험도 많이 쌓았어. 게다가 나라는 스승에 너라는 조언자까지. 저 녀석들은 굉장히 축복 받은 환경을 갖고 있는 거야. 당연히 실력이 좋을 수밖에.”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지크의 목소리엔 얼핏 자랑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둘은 순식간에 성으로 접근했다. 입구에 총 네 명의 병사가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는 조용히 들어간다.”
방금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성의 규모를 보면 엄청난 병력이 순찰을 돌고 있을 터. 실제로 전에 침입했을 때도 상당한 병력을 목격했었다.
적어도 방금 인질들을 구출했을 때처럼 들키지 않고 건물의 모든 병력을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무녀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다고 했지?”
“물론. 어제 빠져나오면서 위치도 다 파악했어.”
말이야 쉽게 하지만 그 때는 성에 말 그대로 비상이 걸린 상황이었다.
아무리 한스와 스녹이 난리를 친 여파가 남아있어 어수선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군주가 머무는 성에서 일어난 소란이 아닌가.
그러나 지크는 그 상황에서도 무녀의 위치까지 전부 파악을 끝냈다.
‘오히려 쉬웠다. 그 난리에서도 그녀가 갇혀있는 방만큼은 절대로 병력이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그 상황에서 수색하기 어렵지 않았냐며 질문을 한 라일라에게 지크는 태연하게 그렇게 대답했다.
만약 르누가 알았다면 분에 못 이겨 다시 방의 집기들을 때려 부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곳부터 찾아볼 거야.”
“혹시 지하 말이야?”
“그래. 아무래도 철의 일족의 왕이란 놈은 그 힘에 상당히 빠져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또 지하에서 무녀를 데리고 난리를 피우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지크는 아티팩트를 발동시켰고 라일라는 스스로 마법을 걸었다.
투명화되기 전, 지크는 라일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성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