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우당탕!
테이블이 엎어지며 그 위에 있는 물건들이 엎어진다. 하지만 테이블을 뒤엎은 르누는 아직 성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쓰러진 테이블을 짓밟기 시작했다.
“빌어, 빌어, 빌어 처먹을!”
콰직! 콰직! 콰지직!
테이블이 그의 발길질에 못 이겨 처참히 짓이겨졌다. 이리 터지고 저리 부서져 땔깜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변했을 때에야 그는 발길질을 멈췄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그는 다른 부술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지는 눈은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부술 것은 없었다. 테이블이 마지막이었다. 침상이나 의자 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여러 장식품들 또한 처참한 파편이 되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젠장!”
그는 근처에 있는 나무 조각을 걷어찬 다음 큰 소리로 명령했다.
“밖에 누구 없어! 이것들 치우고 다른 것들 갖고 와!”
밖에서 부하 엘프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방 안의 참상을 보고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르누의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않을까 눈치를 보며 잔해를 치울 뿐이었다.
어지러운 방 안이 순식간에 깔끔해지고 다른 가구들이 방 안을 채웠다.
일을 하는 엘프들은 무척이나 능숙했다. 르누가 방 안 집기를 때려 부수는 건 그다지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부하들이 나간 후, 르누는 새로 놓인 의자를 빼 털썩 앉았다.
르누의 성질을 북돋고 있는 것은 많았다. 아무리 자신들이 먼저 시작한 일이라지만 전 일족과 전쟁을 하고 있다는 상황, 말을 듣지 않는 호수의 일족의 무녀.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인간들의 무리.
‘대체 그놈들은 뭐 하는 놈들이야!’
귀신처럼 나타났다가 귀신처럼 사라지는 인간들. 이 전쟁의 최고 변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놈들이었다.
‘보고로는 단순한 약탈 무리 같은 행동을 보였다는데.’
큰 소리로 보물을 찾으라 그러고 실제로 멘티스의 집들을 뒤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기엔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다른 엘프 일족과 연관되어 있을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 자신들은 인질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인간들을 고용해서 멘티스를 휘젓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일족이 저런 대규모 인간 병력을 이 짧은 시간에 고용할 수 있을까.
‘불가능해.’
그게 골치였다.
오늘도 놈들은 전 멘티스를 휘젓고 다시 귀신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포로 하나 시체 하나 남기지 않고. 그게 맞다면 정말로 소름 돋을 정도로 정예인 자들이다.
‘저 정도 규모의 인간 무리를 고용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그게 전부 다 극도로 훈련된 병력이라고?’
점점 그들과 다른 일족의 연관성이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그의 골치를 썩게 만드는 것이 하나가 더 튀어 나왔다.
‘게다가 이번엔 로브 놈들까지!’
아무리 놈들의 조직력이 훌륭하다고 해도 설마 이렇게 기민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협력하던 놈을 죽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경고를 하려 다른 놈을 보내다니.
‘게다가 그놈을 눈앞에서 놓쳤어.’
솔직히 지금 르누가 방 안을 폐허로 만든 이유에는 그의 비율이 80% 이상이었다.
‘눈치를 보면 그 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한 것도 같고.’
정말 그렇다면 무시무시한 정보력이다. 자신의 생각보다 조직의 힘이 훨씬 더 큰 것 같아 르누는 속이 바짝바짝 말랐다.
‘힘에 대해서도 별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였지.’
그렇다면 정말로 조직의 힘은 자신이 얻을 힘보다 큰 것일까. 걱정이 무럭무럭 자랐다.
‘아니야. 진정해라, 르누 언 트 드라스. 그 힘보다 더 큰 힘이 있을 리가 없어.’
전승에 따르면 그 힘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불태울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그래. 모조리 불 태워 버리는 거다. 호수의 일족도 다른 일족도 인간들도, 우리를 거스르는 모든 것들을 전부!’
콰앙!
그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새로 바뀐 테이블이 두 쪽으로 갈라져 바닥에 엎어졌다.
벌써 두 개째. 하지만 그는 박살난 테이블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빨리 힘을 손에 넣어야 해.’
다른 일족과 조직,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인간들. 혹 인간들을 조종하는 자가 조직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는 곧 생각을 접었다.
‘놈들이 조직의 일원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우리가 불리하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그의 눈이 독해졌다.
‘…어쩔 수 없지. 웬만하면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려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순 없어.’
어차피 그가 인내를 갖고 기다릴 시간도 딱 내일까지였다. 그때는 준비가 전부 끝나니까.
‘네가 자초한 일이다. 로만느 웬 싱 주 드라우드!’
독 오른 표정으로 자신에게 독설을 날리던 무녀를 생각하며 그는 이를 갈았다.
* * *
“어땠냐.”
지하의 아지트에 들어선 지크가 한스에게 물었다.
“들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약이 올랐는지 어제보다 더 바득바득 덤벼들더군요. 오래 숨기진 못할 것 같습니다.”
“뭐, 그렇겠지.”
슬슬 이상하게 생각하는 놈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우리가 제3자인 척을 해야 하는 건 인질들을 구하기 전까지니까. 이 이상 연극을 할 필요는 없어.”
“인질이 어디 있는지 찾았구나.”
눈치 빠른 라일라가 지크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지크는 대답 대신 라일라에게 지도를 요구했다.
라일라가 테이블에 지도를 펼치자 지크는 자기가 본 2층 건물이 있는 곳을 짚었다.
“여기에 있어. 수는 여덟. 각 일족의 왕과 왕비들을 확인했다.”
“한 명이 부족하잖아. 무녀는 없었어?
지크는 2층 건물을 짚었던 손가락을 들어 지도 위를 슥 훑었다. 그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성이었다.
“무녀는 여기 있더라.”
“무녀만 따로? 뭔가 따로 쓸 데가 있나?”
“힘이라는 걸 언급하더라고.”
“힘?”
지크는 라일라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걸 전부 설명하기 시작했다.
성이 고대 제국의 유적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것부터 철의 일족이 믿고 있는, 성 아래에 있는 힘까지 전부.
라일라는 진지하게 말을 들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고대 유적 관련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진지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럼 그 힘에 대한 정체는 모르는 거지?”
“몰라. 그리고 굳이 지금 기를 쓰고 알 필요도 없고. 어차피 인질들을 구하고 저 녀석들을 날려버리면 알게 될 일 아니겠어.”
“바로 인질을 구할 거야?”
“이런 일에 시간을 오래 들일 필요는 없지. 시간을 오래 끌면 변수가 발생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리고 지크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힘이라는 게 뭔지도 궁금하고.”
“……!”
라일라가 지크를 쳐다봤다. 지크의 시선은 지도에 그려져 있는 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인 터라 켜놓은 횃불에 지크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힘에 대한 집착. 그건 힘의 마왕 지크 모어의 존재 의의나 마찬가지였다.
‘우연일까?’
지금껏 지크는 별로 힘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착한 일, 착한 일 하며 별 괴상망측한 기행으로 사람들을 휘두른 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지크는 분명 힘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냥 호기심일 수도 있어.’
자그마치 고대 제국의 유적에 잠들어 있는 힘이지 않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길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조차 자신을 속박하지 못한다고 했지.’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안심했었다. 마왕이란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건 위험한 말이기도 했다.
‘지금의 착한 일을 하겠다는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고 다시 마왕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뜻도 돼.’
라일라는 마음을 굳혔다.
“내일 입구 쪽에 소란을 일으키고 내가 인질들을 구하러 간다. 소란을 일으키는 건 오늘처럼 한스와 스녹이 하고, 라일라는 예비 병력으로 남아….”
“나도 따라갈게.”
지크가 지도에서 눈을 뗐다. 옆에서 묵묵히 작전을 듣던 한스와 스녹도 그녀를 쳐다봤다.
“인질을 구하면 바로 공간 이동으로 호수 저편으로 보내는 게 낫잖아?”
지크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지크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다만 인질을 구출할 때는 혼자서 움직이는 게 편했고, 어차피 인질들은 건물 밖으로 빼낸 후 스녹을 통해 이 지하 공간으로 옮길 것이기에 굳이 불편을 감수하고 라일라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크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좋아. 라일라, 넌 나랑 움직이자.”
지크가 쉽게 허용하자 라일라는 안도했다.
‘아마 별다른 생각을 하고 허락한 건 아닐 거야.’
라일라의 실력은 굳이 지크가 커버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만약 위험한 일이 생긴다 해도 한 명 정도는 지크가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때문에 평소 그렇게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았던 라일라의 의견을 들어준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이 일행 자체가 지크를 제외하면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 없었지만.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동행을 허락 받았다.
‘절대로 다시 마왕이 되게 만들 순 없어.’
세상을 위해서도 그랬고 라일라도 지금의 지크가 마음에 들었다.
툭하면 사람을 휘두르고 성격은 개차반에 남의 불행을 즐기는 쓰레기지만,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은, 어색하기 그지없지만 분명 정의로운 일들이었다.
‘그리고 갈 곳 없는 나를 도와준 건 사실이니까.’
라일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 * *
다음 날 밤이 되었다.
오늘도 켄디스는 눈을 까뒤집은 채 멘티스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샅샅이 찾아라! 개미 새끼 한 마리라도 발견하면 바로 신호를 해!”
전날보다도 멘티스를 붉히는 불빛은 훨씬 더 많았고 돌아다니는 병력도 증가했다.
“어차피 그 놈들을 잡지 못한다면 너희도 쉬지 못한다! 그러니 집중해서 쥐구멍 하나라도 찾아내! 최소한 그놈들이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는지는 알아야 한다!”
마력을 넣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병사들을 독려한다.
병사들도 자신을 쉬지 못하게 하는 그 정체불명의 집단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쳐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까지 세세하게 살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보상받지 못 했다.
콰앙!
그나마 경계병이 적은 구역에 있던 커다란 집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병사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다.
퍼억!
“크악!”
문 밖으로 던져진 창에 가까이 있던 엘프가 정통으로 꿰여 나자빠졌다. 병사들이 당황하기도 전에 문에서 갑옷을 입은 자가 튀어나왔다.
“놈들이다!”
“적이다! 그 갑옷들이 나타났…, 컥!”
소리를 높여 아군을 부르는 병사들. 그러나 그들은 집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갑옷들의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다시 한번 멘티스에 전투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시각.
“시작했나 보네.”
“그래.”
지크와 라일라는 인질이 잡혀 있는 곳 옆 건물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주변을 순찰하던 병력들이 서둘러 전장으로 달려간다. 곧 바깥은 경비 몇을 빼면 텅 비었다.
“움직이자고.”
지크와 라일라가 건물을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