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르누가 손가락을 움직인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한번 매만졌다.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질 좋고 귀한 옷. 감금되어 꾀죄죄한 다른 왕들과는 달리 깔끔하게 관리된 옷.
왕인 그리고 승자인 자신이기에 입을 수 있는 옷이다. 그리고 자신의, 철의 일족의 숙명을 떠올렸다.
드디어 르누의 입이 열렸다.
“우리가….”
그가 지크에게 손을 뻗었다.
“다시 한번 더 인간들에게 고개를 숙일 성 싶더냐!”
퍼엉!
르누의 손에서 불덩이가 쏟아졌다.
‘무영창 마법. 과연 엘프들의 왕이라는 건가.’
하지만 지크의 감상은 그뿐이었다. 그의 곁에는 무영창 마법을 이중으로 구사하는 괴물이 있다. 고작해야 무영창 마법 한 번 봤다고 놀라기엔 그 괴물이 너무도 대단했다.
‘게다가 위력도 별로야.’
지크는 모양이 변한 윈두르를 품에서 꺼내 휘둘렀다.
콰앙!
불덩이는 두 동강 나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래. 이게 무영창 마법이지.’
주문을 영창한 마법보다 위력도 범위도 훨씬 떨어진다.
‘라일라는 무영창 마법도 웬만한 영창 마법 못지않게 위력이 강하니 원.’
슬슬 자신의 상식이 흔들릴 때 맛본 진짜 무영창 마법이 지크는 반가웠다.
하지만 그 반가움은 어디까지나 마음속에서만 솟았을 뿐, 지크는 겉으로는 무거운 연기를 계속했다.
“이게 대답이로군.”
“흥! 철의 일족은 그 누구의 아래로도 들어갈 생각이 없다! 이제 우리는 위에 설 것이다! 너희조차도 지배해주마!”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물론!”
“그렇군. 그럼 행운을 빌지.”
지크는 검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등을 돌려 계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설마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르누가 외쳤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벌써부터 세계의 지배자라도 된 듯 기분을 내고 있다.
“이곳의 출구는 저 계단 하나뿐이다. 그리고 방금의 폭발 소리를 듣고 일족의 병력이 달려오겠지.”
지크의 걸음이 멈췄다. 그가 드디어 위기를 느꼈다고 생각한 것일까. 르누의 목소리는 좀 더 커지고 당당해졌다.
“나를 인질로 삼는 방법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거든.”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네 전임자도 우리에게 죽었다. 마지막에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예술이더군. 그걸 보고 깨달았다. 역시 네 놈들과는 손을 잡을 이유는 없다는 걸!”
“좋은 구경 했군. 축하하네.”
하지만 그의 어투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르누는 울컥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저 놈들은 인간 같지가 않다. 냉정하고 냉담하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깔보는 것같이 느껴져 르누는 그들이 정말로 싫었다.
지크는 아예 몸을 돌려 그를 정면으로 마주 봤다.
도망치는 걸 포기한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에게 궁지에 몰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다, 르누 언 트 드라스. 너는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그걸 알아야 하나?”
“그래. 거의 아무것도 모르겠지.”
“…….”
예전에 배신을 때리고 잡은 로브를 입은 자를 극렬하게 고문해봤지만 나온 건 없었다. 그의 말대로 르누는 조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우리의 계약은 너희 철의 일족이 다른 일족을 지배하게 해준다는 거였다. 그렇지 않나?”
“…그래.”
‘역시 그랬군.’
미래에 철의 일족이 아드로원 대수림의 엘프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던져 본 질문에 르누가 걸렸다.
“하는 꼴을 보면 다른 일족을 지배하는 걸 포기하겠다는 기특한 생각은 아닐 게 뻔하지. 그런데도 우리의 손을 내쳤다. 아니, 내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적대했지. 그렇다면 생각할 이유는 하나뿐이다. 우리의 손을 잡지 않고 오히려 적대해도 괜찮다 생각할 정도로 다른 어떤 힘을 얻었다는 것.”
“…….”
“그리고 그 힘은 네가 서 있는 벽 너머에 있지.”
“……!”
르누가 놀랐다. 눈앞의 로브를 입은 자는, 자신이 예전 연락을 계속하던 로브를 입은 자를 죽인 후 처음으로 만난 그 조직의 사람이었다.
한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상대는 마치 그들의 모든 것을 파악한 듯 보였다.
“하나만 묻지, 르누 언 트 드라스.”
“뭐냐.”
“고작 그 정도 힘을 얻는다고 우리의 분노를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거칠지도 적대적이지도 위압적이지도 않다. 목소리의 변화조차 없어 마치 잔잔한 일상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까지 들린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르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윽박지르는 것보다, 마치 앞으로의 미래는 정해져있다는 듯한 그의 태도가 더욱 위협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르누는 확신을 담아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더 이상 내가 할 말은 없다. 앞으로도 그 희망, 계속 이어지길 바라지.”
지크는 다시 등을 돌려 계단을 향했다.
“내가 말했을 텐데! 도망치지 못한다고!”
“그럼 얼마 안 있어 내 시체를 볼 수 있겠군. 그때 한 번만 더 말해주게나.”
그 말을 끝으로 지크는 계단으로 사라졌다.
지크가 사라지자 르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조직이야.’
그 진정한 정체는 모르지만, 다른 일족을 상대로 조용히 전쟁을 준비할 때 저들이 해줬던 지원을 생각하면 적어도 규모 하나는 엄청날 게 뻔했다.
게다가 그들이 말단으로 부리는 로브를 입은 자들 또한 하나하나가 강했다.
원래라면 감히 적대하기조차 두려운 조직.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었다.
‘이 힘만 손에 넣는다면 괜찮아.’
그는 뒤편의 벽을 쓸어내렸다. 심장을 움켜쥔 공포가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빈자리에 채워진 감정은 분노였다.
‘감히 날 협박하다니!’
그는 부하들이 조직의 인간을 잡아오길 기다렸다.
어차피 길은 하나. 그리고 자신과 대화를 하느라 시간도 상당히 소모됐다. 그는 병사들이 그 자를 잡아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곧 들이닥친 병사들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상한 자를 잡긴커녕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무슨 소란이 있었는지 묻는 부하들에게, 그는 치솟아오르는 분노를 고함으로 분출할 수밖에 없었다.
* * *
르누가 병사들에게 무능한 놈들이라고 화풀이를 하고 있을 무렵, 지크는 조용히 성을 빠져 나왔다.
‘나를 잡겠다고? 웃기고 있네.’
지크는 그들을 비웃었다. 라일라가 준 아티팩트를 발동하고 계단 천장에 가만히 붙어 있는 그를, 엘프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이후는 편했다. 우왕좌왕하는 엘프들을 피해 조용히 성을 나오면 됐다.
지크는 성을 쳐다봤다. 고대 제국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나온 만큼,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리 보였다.
‘원하는 정보는 대충 다 손에 넣었어.’
이 성에 무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걸로 잡힌 인질들이 어디 있는지 전부 알게 됐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정보도 알 수 있었다.
‘이놈들도 로브 쓴 놈들과 연관이 있었어.’
그것까지는 예상한 바였다.
‘그런데 설마 배신을 했었을 줄이야.’
아마도 저 녀석이 찾고 있는, 성 아래에 있는 어떤 힘을 찾고 배신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 건 회귀 전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무녀의 말과 지크가 본 상대의 언행으로 볼 때, 르누는 겁쟁이가 분명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극히 신중한 자. 많은 이득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많은 이득을 취하지 못 하더라도 어떻게든 위험을 회피하려 하는 자. 안정지향적인 놈이다.
한데, 그런 자가 다른 일족을 모조리 적으로 돌리고 협력자였던 로브 집단까지 적으로 돌렸다. 안정지향적인 행위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관이 변한 것일까?
‘그것보다는 저 힘이란 것이 그만큼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다른 모든 일족과 로브 쓴 놈들의 조직을 적으로 돌리는 것조차 그다지 큰 위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회귀 전에는 그만큼 대단한 힘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힘이란 것만 손에 넣으면 당장 인간마저 굴복시킬 것 같이 말하는 놈이다.
하나, 당시 철의 일족은 인간들을 굴복시키기는커녕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아드로원 대수림의 엘프 일족들을 억압하고 있었을 뿐.
‘그리고 그런 대단한 힘이 있다면 소문이 나지 않을 수도 없고 말이야.’
인간과 엘프는 교류를 적게 할 뿐,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둘 중 하나겠지. 하나는 그 힘이 녀석의 희망만큼 대단한 게 아니거나.’
하지만 그런 확률은 적었다. 저런,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겁 많은 녀석이 저렇게 확고하게 믿고 있는 힘이니만큼 분명 어느 정도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확률이 높은 건 다음 가능성.
‘미래가 변했거나.’
회귀 전에는 조직의 도움으로 엘프들을 지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조직의 힘이 필요 없어졌다.
‘회귀 전에는 저 힘을 발견하지 못 했었던 거야.’
하지만 그러면 당연한 의문이 따라온다.
‘어째서?’
지금껏 많은 미래를 바꿔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미래를 아는 지크가 힘을 쓴 것.
지크가 힘을 쓰기 전까지 사람들은 지크가 아는 미래로의 길을 충실히 밟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바꾼 미래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기엔 여긴 너무 동떨어진 곳이잖아.’
아드로원 대수림에서 인간들과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엘프들이 뜬금없이 지크가 인간들의 세상에서 바꾼 미래에 영향을 받았다?
‘가능성이 적어.’
그러다 문득 르누의 얘기가 생각났다.
‘저놈들, 인간들의 지배를 받았다고 했지.’
얘기를 들어 보면 엘프 전체가 그런 게 아니라 철의 일족만 인간의 지배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쩐지, 다른 엘프들과 조금 다른 것 같더라니.’
가벼운 경장에 활과 화살을 주무장으로 사용하는 호수의 일족과는 달리 철의 일족은 철로 된 갑옷을 입고 접근전도 곧잘 했다.
철의 일족이라는 이름답게 일족의 특성과 더불어 전장터가 멘티스라는, 숲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 전장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인간들에게 지배받았을 때 받은 영향일지도 몰랐다.
‘그럼 저놈들은 계속 인간과 교류를 해온 건가?’
하지만 그것도 이상했다. 르누는 자신들이 인간의 지배를 받던 걸 부끄러워하는 기미가 있었다.
그리고 말을 들어보면 다른 일족에서는 그들이 지배받았던 사실을 알지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녀만 알고 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들도 인간과 그렇게 많은 교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지금 철의 일족이 로브 쓴 놈들을 배신하고 다른 일족을 적으로 돌렸으면서도 자신감이 넘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회귀 전에는 없고, 지금 나타난 존재.
‘힘. 그게 변수가 됐던 건가.’
고대 제국의 흔적이라고 생각되는 성. 그리고 그 성 아래에 있는 것 같은 힘.
‘그렇다면 고대 제국에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지.’
그렇다면 그건 어떤 존재일까.
‘윈두르나 에스텔레이드, 토르니움 같은 검인가? 하지만 녀석들이 좋은 검이긴 해도 전쟁을 이기게 만들어 줄 정도는 아닌데.’
어디까지나 그 검들은 주인의 힘을 증폭시켜주는 데 있다. 윈두르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럼 무덤에서 본 움직이는 석상들이나 검은 그림자 같은 것들인가?’
그것들이라면 조금 가능성은 있다.
‘일단 돌아가자.’
지크는 성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나중에 확인하면 되지. 인질들을 모두 구해낸다면 이놈들을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때 느긋하게 조사를 하면 된다. 지크는 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