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그 공간은 넓고 길었다. 양옆으로 높이 올라선 벽은 둥근 아치 모양의 지붕을 떠받치며 길게 뻗어 있었다. 규모가 클 뿐, 마치 통로 같은 모양새다.
무녀는 지크가 나온 입구 반대편 끝에 있었다. 좋은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도 감금되어 있는 다른 인질들과 마찬가지로 무척 초췌하게 보였다.
그녀의 양옆에는 창을 들고 무장한 엘프 둘이 살벌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엘프 한 명이 더 보였다.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나, 호수의 일족의 무녀여.”
그가 입을 연다. 묵직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목소리다.
지크는 그가 적어도 누군가에게 부림을 받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더불어 성격이 더러울 거라는 것도.
그의 대답에 무녀가 입을 열었다.
역시나 엘프는 엘프. 레오나의 할머니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자 흘러나온 목소리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별 지랄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네 말을 따르느니 차라리 오크한테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애교를 부리는 게 나아, 이 대머리 자식아.”
‘풉!’
지크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절로 아름다운 노래가 생각날 만큼 유려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욕과 무시가 다채롭게 섞인 모욕이라니.
지크는 다시 한번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드로니안이 보여준 초상화와 그녀의 생김새는 똑같았다.
그녀가 바로 호수의 일족의 무녀인 ‘로만느 웬 싱 주 드라우드’였다.
‘음, 무녀가 곱고 좋은 말만 사용하란 법은 없지.’
어쩌면 그녀와 교감하는 정령들조차 욕을 밥 먹듯이 내뱉는 성격파탄자들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끝내주게 내 취향인 사람인 건 확실해.’
물론 이성적인 뜻은 전혀 없었다.
그녀를 감시하고 있던 엘프가 고함을 질렀다.
“전하께 무례하다!”
‘아, 저 자식이 ‘철의 일족’의 왕이었군.’
지크가 무녀의 앞에 있는 사내의 정체를 알았다.
“전하? 전하아아아? 아, 그래. 회의하자고 다른 일족들의 왕과 왕비들을 끌어들여 놓고 인질로 잡는다는 등신 같은 계획을 승인한 그 쪼다 말이지? 아니, 혹시 그 등신 같은 계획을 만든 게 그 전하신가? 어라? 그래도 쪼다 새끼네?”
“이 자가!”
엘프가 창을 거꾸로 들었다. 창대로 그녀를 후려치려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로만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왕에 그 부하라고, 사실을 말해줘도 지랄이야 지랄이.”
그저 한마디를 더해 성질을 더 돋울 뿐이었다.
“그만해라!”
르누가 병사를 멈췄다. 병사는 창대를 거뒀다. 그러나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벌게진 얼굴과 거친 호흡은 그대로였다.
“…반대하는 이유가 뭐냐.”
르누가 로만느에게 물었다.
“이 힘만 손에 넣으면 우리는 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저 인간들까지 지배할 수 있단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너희 철의 일족의 지배겠지.”
로만느는 콧방귀를 끼었다.
“엘프를 인간보다는 우위에 서게 해주겠다는 말은 하지 마. 인간이나 너희나, 우리 위에 있으면 끔찍하고 더러운 건 똑같으니까.”
“호수의 일족은 우리 철의 일족과 동등한 권한을 주겠다.”
“레오나를 왕비로 삼아서? 등신 같은 새끼. 네 나이를 좀 파악하고 말해. 네 나이가 레오나의 애비랑 비슷하단 건 기억이 안 나는 거냐? 제 나이도 까먹은 거야, 아니면 어린애만 좋아하는 변태인 거야. 아, 그러고 보니 너 결혼 안 했지? 어쩐지 왕씩이나 돼갖고 결혼을 못하더라니, 그저 변태 새끼였던 것뿐이냐?”
짜악!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참지 못하고 르누가 로만느의 뺨을 때린 것이다.
그녀의 볼이 부어오르고 입가에서 피가 흐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죽대는 걸 멈추지 않았다.
“할 말이 없으니까 폭력이라니. 어쩜 도량이 보이기도 하지.”
르누가 로만느의 멱살을 잡았다.
“협력해, 할멈.”
“싫다.”
“안 그러면 당신네 나라를 전부 불살라 버리겠어.”
“해보든가. 나한테 그딴 너절한 협박이 통할 것 같아?”
“너희 국가의 모든 엘프들을 토막 낼 수도 있어!”
“네들 철이 너무 물러서 못할걸?”
“으아아아아아!”
르누가 로만느를 밀쳤다. 그녀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태연했다.
“밖의 상황을 보니까 웬 인간들도 쳐들어왔나 보던데. 이쯤에서 포기해. 넌 뭘 하든 안 될 놈이니까.”
퍽!
“끄윽!”
르누가 로만느의 복부를 걷어차자 그녀가 몸을 웅크렸다. 상당히 강하게 맞았는지 기침과 헛구역질을 심하게 했다.
“네가 뭐라고 하든, 난 저 힘을 손에 넣을 거다!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겠어!”
“예전에 지배받던 너희처럼 말이야?”
“!!!!!”
르누가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로만느는 팔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왜, 다른 일족은 모두가 ‘그 일’을 잊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설마 ‘그 일’을 전하고 있는 게 너희뿐일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너….”
“호수의 일족의 무녀는 그저 호수의 눈물을 통해 정령과 교감하는 사람만이 아냐. 중요한 사건과 진실을 잇는 사람이기도 하지.”
르누는 잠시 그녀를 죽일 듯 노려봤다.
“…끌고 가.”
병사들이 그녀의 팔을 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놔!”
그녀가 팔을 뿌리쳤다.
“내 발로 간다.”
그리고 발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를 병사들이 급히 따랐다.
지크는 본인이 벽이라도 된 듯 벽에 찰싹 붙어 그녀가 가는 걸 지켜봤다.
“…잠깐.”
조용히 병사들의 안내에 따라 지상으로 올라갈 것 같던 로만느가 걸음을 멈추고 르누를 뒤돌아봤다.
“나도 하나만 묻자. 누구야?”
“뭐가 말이냐.”
“너 같은 작자는 잘 알아. 자신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남이 맺은 과실만 따 먹으려고 하지. 더러운 겁쟁이니까.”
“입 닥치지 못해!”
옆에 있던 병사가 그녀의 목에 창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면 네가 이런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도 이상해. 다른 일족들이 우리의 목숨을 전부 내버리고서 전쟁을 택할 가능성을, 너 같은 겁쟁이는 절대로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면 철의 일족은 철저하게 짓밟히겠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누구야?”
확신을 담아 그녀는 물었다.
“누가 너를 부추겼냐고. 너 같은 겁쟁이가 이런 대담한 짓을 할 리….”
“닥치지 못해!”
퍼억!
병사가 그녀를 창대로 내리쳤다. 그녀가 쓰려졌지만 르누는 이번엔 말리지 않았다.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끌고 가.”
“네!”
정신을 잃은 그녀를 병사들이 질질 끌고 갔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보는 것처럼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 르누는, 자신의 뒤에 있는 벽에 다가갔다.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벽. 하지만 그 안에는 막대한 힘이 잠들어 있다. 르누는 그 벽에 손을 댔다.
‘이 힘만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걸 바꿀 수 있어.’
호수의 일족에 대한 열등감도. 인간에 대한 열등감도. 그리고 그들의 과거조차도. 모든 걸 바꿀 수 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순 없다. 아무리 우리가 인질을 잡고 있다 해도 전력이 너무나 달려. 무녀의 말처럼 다른 일족들이 왕과 왕비의 목숨을 버리고 우리를 치러 나올 수도 있다.’
그의 눈이 독하게 빛났다.
‘만약 내일도 그 여자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그때는 최후의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그가 마음을 굳게 먹고 벽을 한 번 쳤을 때였다.
“르누 언 트 드라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감히 철의 일족의 왕인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놈이 있다니.
그는 당장에 불호령을 내리려 몸을 돌렸다. 하지만 상대를 본 그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로브를 걸친 자가 눈앞에 있었다.
* * *
‘자, 어떻게 나올 테냐.’
로브를 입고 르누 앞에 나온 지크는 기대에 가슴이 두근대는 걸 느꼈다.
이 전쟁은 그렌 제너드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렌 제너드는 암살자 놈들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고.
그 가설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이 전쟁에 암살자 놈들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지크는 알버스 윈플 때와 비슷한 전략을 사용했다.
바로 로브를 뒤집어쓰고 암살자 놈들 흉내를 내는 것.
‘무녀는 누군가 저놈들의 뒤에 있는 것 같다고 했지.’
만약 저놈들의 뒤에 있는 것이 암살자라면 지크의 가설이 들어맞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뒤에 있는 놈들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 뭔가 반응이 이상했단 말이야.’
그건 숨기고 있는 협력 세력을 들킨 반응과는 뭔가 달랐다. 마치 그 협력 세력을 언급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가장 높은 가능성을, 지크는 알고 있었다.
‘배신했군.’
아마도 철의 일족이 그 협력 세력을 배신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크가 느끼기엔, 철의 일족은 그 세력에 대한 공포감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로브를 뒤집어쓰고 나왔다. 이제 그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확인을 하면 됐다.
그 협력 세력이 로브를 뒤집어쓴 놈들인지 아닌지.
르누는 로브를 걸친 지크를 핏발 선 눈으로 쳐다봤다.
“르누 언 트 드라스.”
지크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른다. 르누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를 보고 빙긋 웃었다.
“아, 당신들이었군. 한동안 연락이 끊겼기에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다시 만나서 반갑….”
“네가 배신한 걸 알고 있다.”
반갑게 다가가던 르누의 걸음이 뚝 끊겼다. 그의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지크를 바라봤다.
“내가 온 건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마지막 기회라 함은?”
“다시 우리의 밑으로 들어와라.”
“…꽤나 불쾌한 소리를 하시는군. 우리는 어디까지나 동등한 동맹 관계로 알고 있소만.”
“배신의 대가다. 그리고 우리가 주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고.”
누가 봐도 르누를 무시하고 하대하는 발언이다.
일족의 왕으로서 언제나 명령을 내리는 그에게는 모욕적이기까지 한 말이었다. 당연히 그의 얼굴은 썩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계속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나를 모욕한다면 아무리 그대들이라도 용서할 수….”
“한 가지만 말하지, 르누 언 트 드라스.”
지금껏 억양의 구분 없이 무기질적으로 말하던 지크의 발음에 처음으로 감정다운 것이 실렸다.
“우리는 배신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건 선고였다. 강대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자가 말하는, 심판과도 같은 말.
“하지만 우리는 네가 하는 계획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때문에 단 한 번, 이번만큼은 너의 배신에 대해서도 아무 말 않고 넘어가 주마. 그러니까. 말하라 르누 언 트 드라스.”
지크의 목소리가 르누의 폐부를 묵직하게 때렸다.
“네 대답은 무엇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