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멘티스’의 혼란은 계속됐다. 지크가 앞장서 엘프들을 도륙했고 그 뒤를 갑옷들이 뒤따랐다.
갑옷들은 전투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근처 집들에 마구잡이로 쏟아져 들어갔다. 하지만 집들은 약간의 세간살이만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대장! 집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갑옷 한 명이 지크에게 말했다. 지크가 인상을 썼다.
“그럴 리가! 여기가 엘프들의 신성한 곳이라고 했단 말이다! 찾아보면 보물 같은 게 없을 리가 있겠냐!”
<<하지만 정말 없습니다!>>
서걱!
지크가 덤벼드는 엘프 한 명의 다리를 잘라냈다. 엘프가 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쳇! 역시 있어 보이는 곳을 털어야 하나.”
지크가 쳐다본 곳은 섬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건축물이었다. 새하얀 돌을 쌓아 만들어진 그것은 마치 어렸을 적 보았던 동화 속 왕들이 사는 성 같았다.
지크는 발치에서 비명을 꽥꽥 지르고 있는 엘프를 발로 차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날아온 화살을 대충 쳐내고 중앙의 성을 향해 윈두르를 겨눴다.
“저 성을 공략한다! 집 뒤지고 있는 놈들 전부 나와!”
그리고 앞장서서 엘프들을 베며 전진했다.
하지만 아무리 지크가 앞장서서 엘프들을 베고 부하들이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한 병력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숫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멘티스’의 엘프들이 본격적으로 합류를 시작하자 점점 전진 속도가 느려졌다.
<<대장! 적이 너무 많습니다!>>
“나도 알아!”
지크가 달려드는 엘프를 주먹으로 쳐 날리며 대답했다. 엘프의 몸이 종잇장처럼 날아가 옆 건물에 처박혔다.
“빌어먹을! 여기는 평소에 관리 엘프 몇 명만 있는 곳이라며! 어째서 이렇게 드글드글하게 많은 거야!”
<<아무래도 정보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군.”
지크가 목에 힘을 잔뜩 줬다. 그리고 마력까지 사용해 크게 외쳤다.
“후퇴!”
공격해 들어가던 갑옷들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리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어딜 후퇴하려고 하냐, 이 자식들!”
가까이 있던 엘프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쾅!
그의 검이 윈두르에 막혔다. 윈두르의 나뭇가지 같은 검신이 엘프의 검을 옭아맸다. 지크가 손목을 꺾어 윈두르를 비틀었다.
챙!
청명한 소리를 내며 엘프의 검이 두 동강 났다.
“내 맘이야.”
퍽!
지크의 윈두르에 검이 부러져 당황한 엘프의 면상을 후려쳤다. 피와 이빨을 뿌리며 엘프가 나뒹굴었다.
“후퇴! 후퇴해, 이 자식들아!”
지크는 뒷걸음질 치며 계속 후퇴를 외쳤다. 뒤에 있는 갑옷들이 일제히 빠져나가고 앞에 서 있는 갑옷들은 천천히 뒷걸음질 친다.
주변에 널려 있는 동족의 시체에 엘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기세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뒤에서 들린 소리에 기세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멈춰! 멈춰라! 녀석들을 성급하게 쫓지 마라!”
마력이 섞인 소리를 귀 밝은 엘프들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 목소리의 주인은 그들의 장군. 심정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녀석들을 추적해 목을 베고 싶지만 명령은 명령이다.
이를 갈면서도 엘프들은 차츰차츰 추격의 속도를 내렸다. 그 틈을 타 지크와 갑옷들은 엘프들과 거리를 벌렸다.
“전 병력이 속도를 줄였습니다!”
“좋아!”
부랴부랴 나온 ‘철의 일족’의 장군, ‘켄디스 라 우 엘리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조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라! 거리를 유지하되 계속해서 몰아붙여! 어차피 저놈들이 도망간 곳에 있는 건 호수뿐이다!”
중간중간 포진한 지휘관들이 그의 명령을 병사들에게 알렸다.
켄디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저놈들이 어떻게 숨어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렇게 난리를 쳐놓고 몸 성히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
“하지만 저들이 어떻게 숨어들어왔는지 모릅니다! 후퇴할 때도 그 방법을 사용해 도망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정 거리를 계속 유지하란 거다. 저놈들이 배를 타고 왔든 잠수를 해 왔든 그 순간에 공격을 쳐넣으면 되는 거야. 어차피 이곳은 우리 본거지니까.”
그 어떤 군대든 가장 취약해질 때는 바로 후퇴할 때다.
“계속 화살을 쏴라! 녀석들에게 피해를 입혀!”
어두운 ‘멘티스’의 하늘로 보이지 않는 화살의 구름이 일제히 샘솟았다 떨어졌다. 하지만 두터운 갑옷 탓일까. 화살 때문에 피해를 입은 적들은 적어 보였다.
‘무슨 놈의 미스릴 갑옷이라도 입은 거냐!’
엘프의 활과 화살은 인간의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게다가 마력까지 듬뿍 머금었으니, 강철판 같은 건 우습게 뚫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화살은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몇몇 쓰러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른 갑옷들이 잽싸게 그 갑옷을 부축해 후퇴했다.
켄디스는 눈을 찌푸렸다.
‘후퇴하면서 저런 여유가 있다고?’
누가 봐도 무겁디무거운 갑옷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갑옷들을 회수했다.
‘접근전을 할까.’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철의 일족’은 지금 자칫하다간 다른 온 엘프 일족과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멘티스의 다리 너머에는 다른 일족들이 숨겨 놓은 병력이 분명히 있을 터.
그 때문에 다리 근처에 있는 병력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혹시 이 소란을 듣고 그들이 쳐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본국에서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없다.’
본국의 국경에도 다른 일족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그들은 전력이 너무나도 달렸다.
인질로 잡은 각국의 왕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팽팽한 형국이 지금이다.
‘지금은 어떻게든 병력을 아껴야 해. 더 이상의 지원군은 없다!’
다행히 화살은 많이 준비해 왔다. 지금 조금 과하게 소모를 한다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쏴라!”
결국 켄디스는 지금까지대로 원거리에서 상대 병력을 소모시키려 했다. 상대의 갑옷이 단단하기는 해도 분명 쓰러지는 자도 있었기 때문이다.
곧 그들은 지크 일행을 호숫가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
적들에게 더 이상 갈 곳은 없다. 몰아붙였다. 켄디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응?”
하지만 그는 곧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들 숫자가….’
한눈에 봐도 무척 줄어 보였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지나쳐 온 길을 살핀다.
‘없어!’
적의 숫자가 줄었다면 전사자든 부상자든 보여야 한다. 하지만 보이는 거라곤 많은 병력에 난잡하게 짓밟힌 길뿐이었다.
‘그 사이에 도망쳤어? 설마 배나 수중 침투가 아냐?’
그의 감이 위기를 알렸다.
“전군 돌격! 녀석들을 짓밟아라!”
켄디스가 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은 병력 소모를 걱정할 때가 아냐! 녀석들의 침투 경로를 모른다면 경계에 구멍이 난다!’
적어도 포로라도 잡아서 심문을 해야 한다.
엘프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밤에 침입해 자신들의 동족을 학살한 그들에게 이를 박박 갈았던 참이다.
그러나 갑옷들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등을 돌려 가까이 있는 건물 뒤쪽으로 도망쳤다.
“포위해 들어가라!”
엘프들은 두 갈래로 갈라져 한 무리는 적을 뒤쫓아 가고 한 무리는 건물을 돌아갔다. 앞을 막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실패했다.
“어?”
“어라?”
적을 포위해 들어간 엘프들이 서로 마주쳤다.
하지만 그들은 멍청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같은 동족뿐, 그들이 추적하던 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후좌우는 물론 위도 쳐다보고 발로 땅도 훑어봤지만 발견되는 건 없었다. 그들은 허탈하게 서로를 쳐다봤다.
켄디스도 보고를 들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시뻘건 얼굴로 부관을 다그친다. 하지만 부관을 다그친다고 사라진 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켄디스는 명령을 내렸다.
“당장 수색해! 녀석들이 사라진 곳부터 찾아라! 갑옷 쪼가리 하나라도 발견되면 나에게 보고해!”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횃불을 들고 길거리부터 음영이 드리운 골목, 파도치는 해안가, 심지어는 물속을 살피기도 하고 땅을 파보기도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적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완전한 잠적.
그 많은 병력이 철저하게 사라진 상황에 켄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대체 왕에게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할까. 켄디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 * *
지크는 눈을 떴다. 온몸을 툭툭 털었다. 흙이 조금 떨어졌다. 머리도 털어낸 그가 앞에 보이는 통로로 걸어갔다.
“어서 와.”
라일라가 그를 반겼다.
“스녹은?”
“저기.”
라일라가 한쪽을 가리켰다. 스녹이 조금 지친 모습으로 지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그래, 수고했다. 이번엔 정말 잘했어.”
피곤한 가운데서도 스녹이 웃었다.
이번 작전의 가장 큰 공로자를 따지자면 바로 스녹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대규모 병력을 ‘위장’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니까.
지크는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들겨주고 다시 라일라를 쳐다봤다.
“손상된 것들은 얼마나 되지?”
“꽤 많아.”
라일라가 이번엔 다른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방금까지 엘프들과 치열하게 전쟁을 했었던 갑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마치 죽은 기사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둔 것 같다.
하지만 지금껏 그 갑옷들과 드잡이질을 한 ‘철의 일족’에게는 분통이 터지게도, 그것들은 그저 텅 비어 있는 갑옷들이었다.
“과연 엘프의 화살이라고 할까요. 금속을 꽤나 강화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직격을 맞으면 슝슝 뚫리더군요.”
스녹이 고개를 저었다.
지크는 가장 가까운 갑옷을 살폈다. 엘프의 화살에 맞아 뻥 뚫린 구멍과 흐른 핏자국이 선명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고작 그 정도로 지크는 스녹의 공을 폄하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애초에 녀석들의 공격을 전부 막아내리라곤 생각도 안 했다.”
상대는 엘프의 정예병이다. 아무리 두터운 갑옷을 둘렀다고 해도 그게 미스릴 같은 굉장한 금속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막아내리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었다.
“부상을 당하는 연극도 완벽했다.”
지크를 따라 움직이던, 인간의 병력 같던 갑옷들.
그것들은 전부 스녹이 움직인 ‘빈 갑옷’들이었다.
아이디어의 출처는 당연히 미다스였다.
그가 지크 일행을 습격할 때 사용했던, 주요 관절에 도금을 해 움직인 갑옷.
지크는 그 활용법을 안 즉시 스녹에게 똑같은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조건은 스녹이 더 좋았다. 미다스는 고작해야 황금에 대해서만 지배권을 행사했지만, 스녹은 모든 광물들을 조종할 수 있었으니까.
미다스처럼 관절에 도금을 하는 게 아니라 갑옷 자체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지크의 훈련인 만큼 그 훈련은 어려웠다. 지크는 몇 기 정도를 움직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스녹이 주어진 갑옷 조정에 익숙해진다 싶으면 움직이는 갑옷의 수를 늘려나갔다.
다행히 미다스가 모아놓은 갑옷이 상당히 많아 갑옷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놈도 나중을 대비해서 계속 모아두고 있었을 테니.’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지크를 따르는 대규모 군세였다.
물론 아무리 스녹이라고 해도 그 많은 갑옷을 모두 조종하는 건 불가능했다. 때문에 라일라의 손을 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