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지크가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용사였을 때의 미래를 봤다고 했지?”
“응.”
“그럼 혹시 그렌 제너드의 다른 미래는 생각나지 않아?”
“음….”
라일라가 잠시 구멍이 뻥뻥 뚫려있는 자신의 지식을 뒤졌다.
“…아니, 없어. 내가 잃어버린 기억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기억엔 없어.”
“내가 용사였던 시절의 그렌 제너드는 어떤 놈이었지?”
“네가 용사였던 시절?”
그렇게 들으니 라일라도 궁금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관심이 가긴 하지만 역시 기억나지 않아.”
“그래, 알았어.”
미안한 표정의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준 뒤 지크는 그녀도 그녀 자신의 방으로 보냈다.
‘아무리 라일라가 기억을 잃었다지만 그렌 제너드의 다른 미래는 기억나지 않는다라.’
지크 자신은 용사라는, 마왕과는 극과 극인 미래도 본 라일라가 그렌 제너드의 다른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고 라일라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상한 것도 확실하지.’
그렌에 대한 지크의 의심이 한껏 깊어졌다.
* * *
‘호수의 일족’에게 정식으로 고용된 지크 일행은 바로 움직였다.
늑장을 부려 좋을 일이 아니다. 레오나가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드로니안도 반대했고 지크도 거절했다.
“제3의 세력인 인간들의 세력으로 보여야하니 엘프를 데리고 갈 순 없어.”
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기에 레오나는 떼조차 쓸 수 없었다. 아쉬운 얼굴로 지크 일행을 배웅했다.
‘멘티스’까지의 길은 드니엘이 안내해줬다. 그도 정확히 ‘멘티스’까지만 안내를 한 후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들은 우거진 수림을 넘어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저곳이 ‘멘티스’입니다.”
드니엘이 가리킨 곳을 본 이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아니, 호수라고 부르는 게 어색했다.
호숫가 저 너머로 보이는 건 반대쪽 호숫가가 아니라 긴 수평선이었다. 드니엘이 호수라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누구든 바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커다란 호수 한가운데에 거대한 섬 하나가 있었다. 옅게 낀 물안개 사이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섬은 무척이나 신비롭고 웅장해보였다.
“보시다시피 사방이 호수로 막혀 있어 방어에 강한 이점을 보이는 곳입니다. 통로도 저곳밖에 없고요.”
호숫가와 멘티스는 하나의 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호수의 일족’의 수도에서 본 것처럼 그것은 살아있는 나무들이 얼기설기 엮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리 치고는 무척이나 커다란 규모였지만 그래도 접근로가 한정되어 있다는 단점을 메울 만할 정도도 아니었다.
지크는 눈에 힘을 줘 멘티스를 살펴봤다.
“지금까지 본 엘프들의 도시와는 많이 다르군요.”
나무들로 만들어진 ‘호수의 일족’의 도시와는 달리 멘티스에 서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석조였다. 나무가 있긴 하지만 엘프의 다른 도시에 비하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인간들의 도시와 더 닮았어.’
“그 때문에 저 도시에서 사는 엘프는 없습니다. 관리하는 인원이 몇 상주할 뿐이죠. 저희에게는 불편하거든요.”
드니엘은 품속에 손을 넣어 두루마리 종이 하나를 꺼냈다.
“전하께서 전해드리라고 한 ‘멘티스’의 지도입니다.”
지크가 그것을 받아 폈다. 커다란 섬의 내부 구조물과 그 설명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붉은색으로 동그라미 쳐져 있는 곳이 몇 군데 보였다.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곳은 아마도 인질들이 잡혀 있을 걸로 예상되는 지점입니다.”
“기회가 있으면 살피죠.”
지크가 마법 상자 안에 지도를 넣었다.
드니엘이 계속 설명을 이었다.
“주변이 온통 숲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여기는 지금 온갖 시선들이 주시하는 곳입니다. 우리 일족도 그렇고, 다른 일족들도 일단의 병력을 숨겨놨을 겁니다. 정찰병은 기본이고요.”
지크의 감각에도 꽤 많은 수의 인적이 잡히고 있었다. 전부 엘프들일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드니엘은 순식간에 숲 안으로 사라졌다. 역시 숲의 주민이라 불리는 엘프다운 움직임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라일라가 묻는다. 지크는 저 멀리 보이는 멘티스를 쳐다봤다.
“일단은 이 전쟁에 인간들이 끼어들었다는 티를 내야지.”
그러며 지크는 씨익 웃었다.
“오늘 저녁엔 운동 좀 격하게 하자고.”
* * *
해가 지고 달이 떴다. 반짝이는 하늘의 별들을 호수가 반사하여 화려하게 빛난다.
그러나 그뿐이다. 어둠은 그 외의 곳들을 확실하게 뒤덮었다.
하지만 단 한 곳, 인공적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곳이 있었다.
바로 ‘멘티스’였다.
도시 전체에 낮을 재현하려는 듯 ‘멘티스’에는 굉장히 많은 수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도시 사이사이를 무장 병력이 오고 간다. 단 하나의 사각도 없이 만들겠다는 듯 순찰을 하는 병력은 굉장히 많았다.
그 사이를 하나의 검은 인영이 지나갔다.
경계병 엘프 둘이 ‘멘티스’에서도 살짝 외진 곳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많은 병력을 순찰로 돌린다 해도 섬의 면적이 상당해서 어쩔 수 없이 잠시 사각이 생길 수밖에 없는 곳이 있다.
엘프 둘에게 불행한 건 그들이 향한 곳이 그런 곳이라는 것이었다.
둘의 뒤로 그림자가 접근했다.
후웅!
“컥!”
“켁!”
단 한 번의 검으로 두 엘프의 목이 반 쯤 잘렸다. 엘프들의 몸이 쓰러졌다. 아직 죽지 않아 둘의 몸이 꿈틀댔지만 그것도 곧 이었다.
기도가 잘려 소리를 낼 수도 없다. 그들의 몸이 축 늘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두 엘프를 죽인 사내, 지크는 다시 살금살금 움직였다. 기척을 숨기며 계속해서 정찰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엘프들을 도륙했다.
그러길 얼마. 주변 일대의 엘프들이 사라졌다. 지크는 무인지대가 되어버린 곳 가운데 서서 윈두르를 어깨에 걸쳤다.
‘슬슬 눈치 챘겠지.’
아무리 은밀히 제거를 했다 해도 죽인 경비병이 너무 많다. 증거로 저 멀리서 소란이 이는 게 들렸다. 급박한 발소리도 들렸다.
‘그럼 시작할까.’
휘익!
지크가 휘파람을 불었다.
달려오던 엘프들이 휘파람 소리를 들었는지 지크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꺾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크는 도망가지 않았다.
일단의 무장한 엘프 무리가 달려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저기다!”
지휘관인 듯한 엘프가 지크를 가리켰다. 병사 엘프들이 바로 활로 지크를 겨냥했다. 지휘관은 지크의 정체를 보더니 놀랐다.
“…인간?”
그의 발언에 뒤에 있던 엘프들도 술렁였다.
“인간?”
“어째서 여기에 인간이…!”
“조용!”
지휘관이 당황하는 부하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지크와 주변을 둘러 봤다.
죽어 나자빠져 있는 동족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 핏발이 섰다.
“…그건 네 짓이냐?”
“아, 이거?”
지크가 발밑에 있던 엘프의 시체를 발로 툭 쳤다.
“들키면 시끄럽게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아, 죽이면 안 되는 녀석이었냐? 혹시 네 동생이나 뭐 그런 거냐? 그런 거라면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
그리고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지휘관 앞에 튕겼다. 인간 세상에서도 가장 가치 없는 동전이었다.
“이걸로 용서해주면 안 될까? 내가 돈이 없어서 말이야. 하지만 어차피 네 동생, 앞으로도 네 등골이나 쏙쏙 빼먹으며 살 쓰레기였잖아?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처리해준 내가 돈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지크는 정말로 진심으로, 완벽하게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지휘관의 얼굴이 벌게졌다. 뒤에 있는 엘프들의 표정도 굳어 갔다.
지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체를 다시 툭 쳤다.
“응? 이 녀석이 네 동생이 아니었어? 이럴 수가! 네 등골 빼먹는 그 멍청하고 능력 없고 재수도 없는 놈이 아직 살아 있단 말이야? 미안해. 확실히 이건 내 실수야. 그러니까 그렇게 노려보지만 말고 네 동생이 어디 있는지 나한테 말….”
“잡아아아아아!”
지휘관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병사들도 이를 갈며 지크에게 화살을 쏴댔다. 하지만 지크는 윈두르를 휘둘러 화살을 전부 쳐냈다.
챙! 챙! 챙!
일부 병사들이 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지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머지 병사들은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댔다.
과연 엘프는 엘프인 듯 앞에 있는 아군을 피해 화살을 쏘는 솜씨가 무척 좋았다.
하지만 지크는 이번에도 화살을 쉽게 쳐내며 다시 한번 휘파람을 불었다.
철컹! 철컹! 철컹!
갑자기 주변에서 쇳소리가 들려오더니 양 옆에서 육중한 갑옷을 입은 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어?”
지휘관이 당황했다. 병사들도 지크를 공격하려던 걸 멈추고 갑옷들을 쳐다봤다.
지크가 크게 외쳤다.
“하핫! 전쟁이다, 이 녀석들아! 고귀하신 엘프 나리들의 신성하고도 성스러운 땅이란다! 값진 물건들이 왕창 있을 테니 모조리 챙겨!”
“와아아아아아아!”
갑옷들이 함성을 지르며 엘프들에게 닥쳐들었다.
“이 자식들은 뭐야!”
“어디서 튀어나왔어!”
“당황하지 마라!”
지휘관이 크게 소리쳤다.
“대열을 이루고 버틴다! 곧 지원군이 온…!”
“안 돼.”
갑자기 옆에서 들린 소리에 지휘관은 온 몸에 소름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급히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 전에 그의 가슴에 검이 튀어나오는 것이 먼저였다.
“커억!”
지휘관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찌른 이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능멸한 인간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전쟁에선 지휘관부터 쳐 죽인다. 상식이지.”
촤악!
지크가 검을 뺐다. 지휘관은 힘없이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기 전 본 것은 자신의 앞쪽에 있던 부하들이 전부 피를 흘리며 드러누워 있는 것과, 다른 부하들이 갑옷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는 모습이었다.
* * *
‘멘티스’에 난리가 났다. 갑자기 나타난 일단의 부대가 섬을 휩쓸기 시작한 것이다.
‘철의 일족’의 대응은 늦었다. 혹시라도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주력은 대부분 다리가 있는 곳에 쏠려 있었다.
섬의 곳곳을 누비는 경계병들은 혹시라도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소수의 부대가 호수를 통해 들어왔을 시 대응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설마 후방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나타날 줄은 누구도 예상을 못 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철의 일족’의 왕, ‘르누 언 트 드라스’가 부하에게 물었다.
“섬 후방에 침입자가 나타났습니다!”
“고작 소수의 병력 때문에 이 난리가 났단 말이냐!”
아무리 침투한 자들이 정예 병력이라고 해도 이렇게 밀리는 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부하는 그의 말을 부정했다.
“소수가 아닙니다! 적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습니다!”
“많다니! 후방에 그런 병력이 어떻게 들어왔단 말이냐! 경계병은 뭘 하고 있었어! 내가 배로 하는 침투를 그렇게 경계하라고 했건만!”
“확인해봤는데 배는 절대 다가오지 않았답니다!”
“그럼 저놈들이 어떻게 침입을 했단 말이냐!”
부하가 고개를 숙인다. 르누는 한동안 씩씩대다가 다시 말했다.
“어떤 일족 같다고 하더냐!”
“일족이 아닙니다!”
부하의 다음 말에 르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인간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