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용병?”
“네, 용병.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으음.”
드로니안이 나직이 신음을 삼켰다. 지크의 말처럼 솔직히 지금은 전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크의 제안을 덥석 잡을 수도 없었다.
“고민하시는군요. 아마도 이유는 두 가지겠죠.”
지크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하나는 우리의 실력이 어떤지 모른다는 것.”
지크가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엘프끼리의 전쟁에 과연 인간을 끼어들게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
드로니안은 내심 놀랐다. 지크가 그의 생각을 정확하게 집은 것이다.
“…맞습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해봤자 얻을 것은 없다. 드로니안은 순순히 인정했다.
“용병이라면 그 나름의 실력이 있어야겠죠. 여러분의 실력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다툼에 인간이 끼어들게 만드는 것도 확실히 꺼려지고요.”
“…급하지 않으시군요.”
“네?”
지크의 엉뚱한 말에 드로니안은 당황했다.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해도 상대적인 전력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죠.”
물론 그 정보가 틀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면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 다른 일족이 전부 ‘철의 일족’에 붙었다면 왕자님은 결코 제 제안을, ‘이 전쟁에 인간이 끼는 게 저어된다’라는 이유로 거절할 수 없었을 겁니다. 바로 실력을 보자고 했겠죠.”
오히려 바닥에 기어다니는 개미라도 전력이 될 수 있다면 전장으로 내보내려 했을 것이다.
“그 말은 곧 적어도 다른 일족들이 전부 ‘철의 일족’에 붙었다는 뜻은 아니겠죠. 그렇다고 다른 일족들이 전부 ‘호수의 일족’의 편에 선다는 것도 아닐 겁니다. 그렇게 전력의 우위를 접하고 있다면 제 제안을 거절하셨겠죠. 이미 전력의 우위에 서 있는데 믿음직하지 못한 전력을 추가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
드로니안은 지크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추측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호수의 일족’에 붙은 일족과 ‘철의 일족’에 붙은 일족이 비슷하거나, 아니면 다른 일족들도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거나. 아마도 다른 일족의 우두머리들도 붙잡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만.”
“맞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고용하는 것을 꺼리는 게 다른 일족의 눈치 때문이기도 하겠군요.”
“그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장점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드로니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더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겁니까?”
“저희가 인간이라는 것.”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드로니안은 후계자 수업을 받은 호수의 일족의 왕자. 게다가 절대 능력이 낮다는 소리를 듣는 인물도 아니다.
곧 지크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눈을 크게 떴다.
‘나름 판단력은 괜찮군.’
지크는 드로니안의 평가를 한 단계 높였다.
“당신들은 인간. 엘프의 전쟁에 등장할 리 없는 인물들이죠. 당연히 ‘철의 일족’은 당신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거고요. 애초에 당신들은 우리의 전력이 아니었으니까요. 당신들이 그들을 공격한다고 해서 바로 어떤 일족과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는 없겠죠. 즉, 전혀 관계 없는 제3세력처럼 이용할 수 있다.”
드로니안이 지크를 쳐다봤다.
“내 말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그들도 혹시 다른 어떤 일족이 인간을 고용했을 수도 있다고 의심은 할 겁니다. 하지만 제3 세력이라는 생각 또한 버릴 수 없겠죠.”
“평소 인간과 깊게 교류를 하고 있는 일족이 있다면 가장 먼저 의심을 받겠지만 제가 알기로 그런 일족은 없죠.”
그냥 몇몇 인간들과 상행위를 하는 정도. 그리고 그건 ‘호수의 일족’도 마찬가지였고, ‘호수의 눈물’ 강탈 사건 이후로는 그 상행위도 굉장히 저조해진 상태였다.
“애초에 저희는 왕자님도 예상치 못한 전력이 아닙니까? 굳이 ‘호수의 일족’ 진영 안에서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목적을 추측하기 힘든 제3의 인간 세력으로서 상대를 뒤흔들 정도면 충분하죠.”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군요.”
써먹을 곳이 당장 몇 개나 생각났다.
“당신의 의견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실력이 말이죠.”
지크가 씨익 웃었다.
애초에 ‘호수의 일족’과 같이 전선에 서든 지크의 의견처럼 일행끼리 단독 행동을 하든 그건 모두 실력이 있다는 가정하에서의 이야기다. 실력이 없다면 그 어느 곳에도 그들의 자리는 없다.
“증명해줄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지크가 일행을 돌아봤다.
“그게 누구든, 충분히 왕자님의 마음에 들 겁니다.”
“그럼 당신들의 실력을 보기 위한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그때까지 잠시 쉬어주시기 바랍니다.”
드로니안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프 한 명에게 지크 일행의 안내를 맡겼다.
“어디 가냐. 넌 이 오빠랑 얘기를 해야지.”
“으윽!”
지크 일행의 뒤를 따라 빠져나가려던 레오나가 드로니안에게 잡혔다. 그녀가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지크 일행을 바라봤지만 남매 끼리의 대화, 그것도 가출한 동생에게 오빠가 하는 훈계를 가로막을 사람은 없었다.
결국 지크 일행은 레오나의 아련한 눈빛을 뒤로 한 채 방을 나섰다.
“…….”
“…….”
잠시 방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엄하게 레오나를 보는 드로니안과 고개를 숙이고 그의 눈치를 보는 레오나.
“…후우!”
드로니안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오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반성은 하고 있는 거냐?”
“…응.”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믿어도 되는 거냐?”
“응.”
다시 한숨을 한 번. 드로니안은 고개를 한 번 저은 후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한 백 년 동안 어디 한적한 곳에 처박고 반성을 시키고 싶지만, 그래도 ‘호수의 눈물’을 찾아왔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번만큼은 용서해주마.”
레오나가 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직 엄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있는 드로니안을 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만약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다면 그때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알겠냐?”
“응.”
“좋아. 그럼 이 일은 여기까지 하자.”
용서받았다. 레오나는 어깨를 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확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드로니안의 다음 말은 한결 가벼워졌던 그녀의 마음을 다시 콱 내리눌렀다.
“단, 프리드의 잔소리는 안 막아준다.”
“어?”
레오나가 큰 눈을 깜박거리며 당황해했다. 그 모습을 보고 드로니안이 피식 웃었다.
“하긴, 너한테는 백 년 동안 어딘가에 유폐시키는 것보다 프리드가 몇 시간 동안 잔소리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겠구나.”
“저, 저기 오빠. 용서해주는 김에 프리드에게도 한마디….”
그녀가 급히 드로니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연히 택도 없었다.
“프리드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니 이상한 기대는 하지 마라.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오신다면 그분들에게도 한마디 들을 각오를 하고.”
울상을 지으며 프리드의 잔소리를 어떻게 견딜지 우왕좌왕하던 레오나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정말로 감금당한 거야? 아버지랑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까지?”
“…그래.”
여지껏 왕자이자 레오나의 오빠로서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던 드로니안의 얼굴에도 씁쓸함이 스쳤다.
아버지이자 일족의 왕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가족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픈 마음이 새어 나와 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우리의 복종을 바라는 녀석들이니 그분들께 쉽사리 해를 끼치진 않을 거야. 만약 그분들께 해를 가한다면 우리는 복종은커녕 녀석들과 끝까지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할 테니까.”
그러나 위험한 건 사실이었다. 중요한 인질이 세 명이나 붙잡혀 있으니 본보기로 한 명쯤은 죽일 수도 있을 테고 정말로 최악의 상황에는 세 명 모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동생에게 그 걱정을 그대로 내비칠 수도 없었다.
“그분들은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실 거다. 그러니 그분들에게 할 변명이나 준비해두고 있어.”
“…응.”
우울한 분위기를 흐트러뜨리려는 듯 드로니안이 살짝 목소리를 높여 레오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네 동료들 말이다. 우리의 용병으로서 싸워준다고 하니 고맙긴 하다만, 실력은 어떤지 모르겠구나. 너는 알고 있겠지?”
그 말을 듣자 레오나는 씨익 웃었다. 무척이나 대담하고 자신 있게.
“내가 함께한 동료들이라서가 아니라, 쟤들 말이야.”
그녀가 힘 있게 대답했다.
“무지 강해!”
* * *
실력을 보기 위해 마련된 곳은 왕궁의 뒤편이었다. 왕실 호위대가 훈련을 한다는 그곳은 나무들이 주변을 빽빽이 메우고 있어 다른 엘프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실력 확인은 결투로 하겠습니다. 괜찮겠죠?”
“괜찮습니다.”
가장 먼저 나온 지크가 몸을 푸는 듯 윈두르를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그의 앞으로 한 엘프가 걸어 나왔다.
“당신이 상대입니까?”
“그렇습니다.”
상대는 아까 헤어졌던 드니엘이었다. 그는 가는 세검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어느 정도 크기와 덩치가 있는 윈두르에 비하면 가냘파 보이는 검이었지만 마력을 인간보다 훨씬 능숙하게 사용하는 엘프인 이상 검끼리의 강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윈두르의 강도는 다른 평범한 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지만.
“그는 전 왕실 호위대였던 만큼 우리 일족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우리에게 고용되게 된다면 당신들과 우리와의 관계를 최대한 숨겨야 할 테니, 당신들의 존재를 다른 자들이 더 알게 하는 것보다는 안면이 있는 드니엘을 상대시키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역시 잘 판단하는군.’
정말로 기특한 왕자였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희도 드니엘씨를 만난 후 수도까지 오는 동안 로브를 입어 정체를 숨겼으니 저희의 정체를 밝히는 건 더더욱 힘들 겁니다.”
“그랬습니까?”
드로니안이 드니엘을 쳐다봤다. 이곳까지 지크 일행을 안내한 드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판단을 하셨군요.”
드로니안은 지크의 얼굴을 새삼 바라봤다.
‘아까 우리의 상황을 파악한 것도 그렇고, 자신들이 인간이라는 입장을 이용하라는 제안을 내놓은 것도 그렇고, 자신들의 정체를 가린 것도 그렇고, 상당히 상황 판단이 빠른 인간이로군.’
저 지크라는 사내가 일행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그리고 상황 판단이 빠른 우두머리는 득이 되면 됐지 불이익이 되지 않는다.
‘저런 상황 판단을 가진 자가 이끄는 별동대라면 기대할 만하겠어.’
드로니안은 제발 지크와 그 일행이 만족스러운 실력을 가지고 있길, 그래서 이 난감한 상황의 든든한 패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런 드로니안의 생각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산산이 부서졌다.
물론 훨씬 더 좋은 쪽으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