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다음 날, 지크 일행은 드니엘의 안내를 받아 수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간간이 들르는 엘프의 마을은 처음 본 마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종종 규모가 큰 마을이 나오기도 했고 도시로 불러도 손색없을 거주지도 나왔다.
특히 커다랗고 굵은 나무들이 서로 얼기설기 엮여 거대한 성벽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누구 할 것 없이 감탄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 계속 대수림을 걸었을 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도시가 나타났다.
“우와~!”
스녹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들도 정도만 다를 뿐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산등성이 아래로 펼쳐진 도시가 보인다. 인간의 도시와는 다른, 이질적이고 낯설지만 아름다운 그런 도시였다.
도시는 커다랗고 아름다운 호수와 접해 있었다.
엘프 특유의 나무 성벽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지만 호수와 맞닿은 부분까지는 이어져 있지 않았다.
호수라는 천혜의 지형 덕에 도시와 호수가 접해 있는 부분은 굳이 성벽이 필요가 없던 것이다.
‘레오나의 일족 명칭이 ‘호수의 일족’이라고 했었지.’
왜 그렇게 불리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우리 ‘호수의 일족’의 수도, 드라우드 수림입니다.”
드니엘이 도시를 소개했다.
지크는 레오나의 풀 명칭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의 성은 출신 숲의 이름이다. 그리고 레오나의 정식 명칭은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 이름에서부터 이 도시 출신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시를 숲이라고 소개하는 게 인간으로서는 생소하지만 엘프로서는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게다가 숲이라고 하는 것도 아예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성벽부터 엘프들이 거주하는 집까지 전부 살아있는 나무로 되어있었으니까.
“그리고 저 곳이 우리 집이야!”
레오나가 도시 중앙, 커다란 건물을 가리켰다.
모두 크고 굵은 나무들 위에 위치한 엘프의 건물이지만, 그 중앙에 있는 건물은 한층 더 커다랗고 굵은 나무들 위에 만들어져 있었다.
건물을 떠받치는 나무만 총 일곱 개.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궁전을 연상케 했다.
공주인 레오나의 집이라면 왕궁일 터. 역시 범상치 않아 보이는 외양만큼이나 특별한 건물이었다.
하지만 드라우드 수림에는 한 가지 더 특별해 보이는 것이 있었다.
“저건 뭐지?”
지크는 드라우드 수림 바로 옆 호수 부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또 하나의 건물이 서 있었다.
호수의 수면 위로 몸을 내민 거대한 나무 위에 만들어진 건물. 그 규모는 도시 가운데에 있는 왕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살아있는 나무로 이루어진 것 같은 다리가 호수를 가로질러 도시와 건물을 연결하고 있었다.
“‘제단’입니다. 주변 정령과 교감을 하는 곳이죠. ‘호수의 눈물’이 놓여있던 곳이기도 하고요.”
드니엘이 레오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찔리는 게 있는 레오나가 스윽 시선을 피했다.
지크 일행은 드라우드 수림에 들어섰다. 엘프들의 도시에 제법 익숙해진 터라 그들은 더 이상 주변에 신기한 시선을 보내진 않았다.
이곳도 전쟁의 분위기가 스며들었는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드니엘은 일행을 왕궁 앞으로 안내했다. 나무 기둥을 축으로 회전하며 올라가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왕궁은 외부에서 보인 규모만큼 내부도 상당히 컸다.
왕궁 안을 다니는 엘프들이 그들에게 인사를 한다.
공주인 레오나가 있음에도 그들은 살짝 고개만 숙일 뿐, 필요 이상의 과장된 예는 표하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들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하얀 콧수염을 가진 중후한 인상의 엘프였다.
수명이 길고 노화가 느린 엘프인 만큼 그가 상당한 나이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프리드!”
레오나가 크게 노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 프리드라고 불린 노인이 레오나를 보고 반색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짧았다. 그는 곧 얼굴을 엄숙하게 만들고 조용히 레오나에게 말했다.
“돌아오셨습니까, 공주님.”
“응! 오빠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프리드의 시선이 레오나의 몸을 훑었다. 혹여나 다친 곳이 있지 않을까 살펴보는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손녀를 걱정하는 할아버지 같았다.
다행히 레오나의 몸에 커다란 상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프리드는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을 더욱 감췄다.
“공주님의 일행이시죠? 저는 ‘프리드 윌 드라우드’라고 합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이 왕궁의 관리를 맡고 있는 사람이죠.”
그가 지크 일행을 보며 인사했다. 지크 일행도 그에게 마주 인사를 건넸다.
“공주님을 보호하고 ‘호수의 눈물’을 찾는데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호수의 일족’의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지크 일행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들어가시죠. 왕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프리드는 일행을 안내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공주님.”
그가 살짝 고개만 돌려 레오나를 바라봤다.
“오늘 왕자님을 뵌 후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분위기는 절대로 온건하다고 할 수 없었다. 레오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화낼 거지?”
“당연하죠.”
무덤덤한 목소리로 프리드가 말한다.
레오나의 어깨가 떨궈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레오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사고치고 가출한 공주의 교육을 누가 방해한단 말인가.
“물론 제 순서는 왕자님 다음입니다. 왕자님께서도 잔뜩 벼르고 계시니 저한테 찾아오시는 건 좀 많이 뒤가 되겠군요.”
레오나는 어깨에 이어 고개까지 떨어졌다.
프리드가 드니엘을 쳐다봤다.
“여기까지 공주님과 일행분들을 안내하느라 수고했네. 숙소를 준비해놨으니 자네는 이만 가보게.”
“네!”
드니엘이 힘차게 대답하고는 레오나와 지크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엘프의 안내를 따라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드니엘이 좌천됐다며.”
레오나가 묻는다. 하지만 프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 대해서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전부 왕자님께 여쭤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랑 어머니, 할머니에 대한 것도?”
“…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대답하는 프리드는 무척 착잡해 보였다.
프리드는 지크 일행을 어느 방 안으로 안내했다.
상당히 커다란 방이었다. 바닥을 뚫고 나온 굵은 나무 두 개가 양 옆으로 우뚝 솟아 지붕을 관통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와 잎들이 마치 화려한 샹들리에처럼 천장을 수놓았다.
그들이 들어온 입구 맞은편으로 단이 솟아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커다란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다.
왕과 왕비의 옥좌였다. 그리고 옥좌보다 조금 앞, 단 아래에 양 옆으로 두 개의 의자가 더 있었다.
의자들 앞으로 뒷짐을 쥐고 서성대는 엘프 한 명 보였다. 그가 지크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
레오나가 그를 향해 뛰어갔다.
그는 레오나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안아줄 듯 두 팔을 벌렸다.
레오나도 망설이지 않고 팔을 쫙 펼쳤다.
둘은 그대로 서로를 와락 껴안을 것 같았다. 레오나에게 미소를 짓고 있던 엘프가 갑자기 주먹을 높이 들어 올리지 않았다면.
따악!
“아악!”
커다란 타격음에 지크 일행이 움찔했다. 레오나가 머리를 쥐고 주저앉았다. 정수리를 가격한 주먹에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야!”
레오나가 고개만 쳐들고 그 엘프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여있는 것이 상당히 아파보였다.
그러나 레오나를 쥐어박은 엘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의 미소는 어디로 가고 무척이나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어 레오나가 목을 움츠렸다.
“내가 ‘어서 오려무나!’라며 상냥한 미소로 맞아주기라도 할 줄 안 거냐, 이 바보 동생아!”
그리고 주먹을 흔들어 보인다. 레오나가 찔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할 말은 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호, ‘호수의 눈물’은 찾아왔….”
“뭐?”
하지만 서슬 퍼렇게 눈을 부라리는 오빠의 모습에 다시 입을 닫았다.
한동안 레오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대체 우리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느냐.”
“으….”
레오나는 할 말이 없었다. 오빠의 목소리에서 절절한 걱정과 사랑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미안해.”
그녀가 의기소침하게 사과의 말을 내뱉는다. 왕자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기소침한 동생을 내려다봤다. 아직 얼굴은 잔뜩 찌푸려진 채였지만, 그 눈에는 어쩔 수 없는 애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잘 돌아왔다. 어디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니 다행이구나.”
“응!”
레오나가 크게 대답했다.
주자 앉은 레오나를 일으킨 왕자가 지크 일행에게 시선을 줬다.
남매의 상봉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일행에게 왕자가 다가왔다. 레오나가 그 뒤를 따랐다.
“죄송합니다. 귀한 손님들 앞에서 추태를 부렸군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지크가 한 걸음 나서 왕자의 말을 받았다.
“일단 제 소개부터 하죠. 드로니안 펄 수 드라우드라고 합니다. ‘호수의 일족’의 왕자이자 저 철부지의 오빠죠.”
드로니안의 소개에 지크 일행도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소식은 이미 들었습니다. 동생을 지켜주시고 ‘호수의 눈물’을 되찾는데 도움을 주셨다고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정말로 고마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곤혹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크게 대접을 해드리겠습니다만, 지금 이쪽의 사정이 그다지 좋지가 않군요.”
“들었습니다. ‘철의 일족’이란 곳이 인질을 잡고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드로니안은 음울하게 대답했다.
“내가 ‘호수의 눈물’을 찾아왔는데 그걸로 어떻게 안 돼?”
이미 지크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오나가 물었다. 하지만 드로니안에게서 돌아온 대답 또한 부정적이었다.
“안 된다. 어디까지나 녀석들은 트집을 잡은 것뿐이니까. ‘호수의 눈물’을 우리가 되찾아 왔다고 해도 풀어줄 리 없어.”
“녀석들이 인질을 잡은 건 ‘호수의 일족’의 국왕 전하 내외분과 무녀님뿐입니까?”
갑자기 물어 오는 지크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푸올라’에 참석하는 건 엘프의 다른 일족들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죠? 적어도 ‘철의 일족’에 동조를 하든가, 아니면 그들도 왕이 감금을 당해 있든가 그럴 것 같은데요.”
“음, 그게 왜 궁금한지 물어도 될까요?”
드로니안이 물었다.
지크가 너무 상세하게 묻는 것에 꺼림칙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아닌가.
아무리 동생과 일족의 보물을 지켜준 은인이라고 해도 사정을 이렇게 꼬치꼬치 묻는 것에는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지크는 드로니안의 경계심을 이해했다.
“별거 아닙니다. 우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않을까 해서요.”
“도움이요?”
“혹, 용병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