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덜걱!
의자가 바닥을 친다. 레오나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그, 그, 그게… 무슨….”
옆에 있던 라일라가 레오나를 안정시키려 손을 잡았다.
식탁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냉랭해졌다. 사정을 모르는 한스와 스녹이 눈알을 굴렸다.
내용상 레오나의 가족이 잡혀 있다는 말은 알아들었지만 생소한 단어가 나와 이해를 방해한 것이다.
“내가 엘프 왕국은 인간들의 왕국과 다르다고 했지?”
지크가 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드로원 대수림의 엘프들은 몇 개의 일족으로 구분되어 있다. 방금 말한 ‘철의 일족’이 그중 하나일 테고. 그 일족들이 인간의 왕국이라고 보면 돼. 그리고 엘프의 왕국들은 하나의 연합체를 형성하고 있고. 물론 인간들의 연합 왕국과는 달라. 훨씬 더 느슨하지.”
한슨와 스녹이 지크의 말에 열심히 집중했다. 드니엘은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그래도 연합체인 만큼 어느 정도 서로 교류를 해. 그중 하나가 이른바 ‘푸올라’라는 협의체 요구지. 어떤 일족이든 왕이 선언을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연합 왕국의 왕족들은 ‘멘티스’라는 중립 지대로 모여 회의를 한다.”
“잘 아시는군요. 인간들 중에 우리 아드로원 대수림 엘프들의 사회를 잘 아는 사람은 없는데 말입니다.”
드니엘이 감탄했다. 그러나 그는 감탄만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경계를 했다.
인간과 엘프는 좋냐 나쁘냐를 따지면 약간 나쁜 쪽의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인간이 자신들의 사회상을 꿰고 있으니 자연스레 경계심이 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알 기회가 있어서 말이죠.”
지크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할 말은 아니었다.
‘댁들이랑 제대로 한번 붙었었거든.’
당시 정말로 농담 하나 안 붙이고 만인에 대한 투쟁을 했던 지크와 그 부하들. 그중에는 당연히 엘프들도 있었다.
엘프의 기본적인 사회 같은 것들도 그때 배웠다. 정확히 말하면 부하가 알려줬었다.
‘그러고 보니 ‘철의 일족’에 대해서도 들어봤던 것 같기도 한데.’
지크는 생각을 더듬었다. 하지만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할까. 일단 지금은 얘기를 나누는 중이니까.’
지크는 한스와 스녹에게 나머지 설명을 이어갔다.
“얘기를 들어보면 ‘철의 일족’의 왕이 ‘푸올라’를 선언해서 레오나 일족의 국왕 내외와 무녀가 멘티스로 갔고, 거기서 그대로 감금을 당했다고 보면 된다.”
설명을 끝낸 지크가 드니엘을 쳐다봤다.
“이렇게 이해해도 괜찮을까요?”
“정확하십니다. 제가 설명해도 그 이상으로 설명할 순 없겠군요.”
“‘푸올라’를 선언한 게 ‘철의 일족’이라면 지금 전하 일행을 감금하고 있는 자들도 그들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맞습니다. 멘티스는 지금 ‘철의 일족’의 군대에게 점거당해 있다고 합니다.”
“왜?”
라일라에게 기대고 있던 레오나가 테이블을 치며 일어났다. 식기들이 덜그럭거렸다.
“그자들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우리보고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더군요.”
“무슨 소리야! 각 일족은 서로를 동등한 상대로 인정하는 게 연합체의 원칙이잖아!”
레오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혹시 명분은 있습니까?”
지크가 물었다.
“뭔가 복종을 요구하는 이유라든가 그런 것들 말이죠. 아니면 정말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건을 일으킨 겁니까?”
“…내세우는 명분은 있습니다만, 말도 안 되는 이유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트집을 잡으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죠.”
‘말을 돌리는군.’
명분은 정말로 트집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 보였다.
지크는 드니엘의 눈길이 일순간 레오나에게 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 ‘호수의 눈물’ 때문입니까?”
레오나가 얼굴을 홱 돌렸고 드니엘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그가 지크를 질책하는 눈빛을 보낸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도 보였다.
그러나 지크는 그 눈빛을 무시했다. 오히려 어서 답을 말하라는 듯 그를 쳐다봤다.
“그 말이 정말이야? 정말로 ‘호수의 눈물’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장난으로 훔친 일족의 보물 때문에 부모님이 감금되고 전쟁이 벌어지기 일보직전이라니. 레오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드니엘이 지크를 강하게 노려봤다. 그리고 얼른 레오나를 달랬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순전히 트집일 뿐입니다. ‘호수의 눈물’은 어디까지나 우리 일족의 보물입니다. 그놈들이 신경을 쓸 이유도 권리도 없는 물건이죠. 그걸 파괴하든 버리든, 설령 훔쳐가게 내버려뒀든 우리끼리의 일일 뿐, 녀석들이 끼어들 권리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드니엘의 말도 레오나의 기운을 다시 북돋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녀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드니엘이 다시 레오나를 진정시키려 할 때였다.
“후읍!”
레오나가 갑자기 깊게 숨을 들이켰다.
“후우우우우!”
그리고 내쉰다. 그걸 두어 번 반복했다.
“…그래서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어?”
아직까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경련하는 손도 그대로다. 하지만 드니엘은 그 와중에도 전진하려는 레오나의 눈빛을 봤다.
“충고합니다만.”
지크가 말했다.
“지금의 레오나를 당신이 알던 그녀와 같이 보지 마세요. 그녀도 나름 굉장한 일들을 겪었거든요.”
“…그런 것 같군요.”
그렇다고 레오나가 무슨 역전의 명장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같은 인물이 됐단 건 아니다. 지금도 떨리고 있는 그녀의 몸이 증명한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사달이 났다는 걸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앞을 향하려는 그 기개만큼은 드니엘을 무척이나 흡족하게 만들어줬다.
정말로 이번 여행은 레오나에게 엄청난 득이 된 것 같다. 드니엘은 ‘호수의 눈물’을 훔쳐간 그 도둑놈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한번 상향조정했다.
죽어서 의미는 없겠지만.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날 기색은 없습니다. 군사적 긴장감은 팽팽해져 있지만 아직 행동으로 옮겨지진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어딘가에서 그게 무엇이든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순 없습니다.”
드니엘의 말이 한결 편안해졌다.
“일족은 지금 누가 이끌고 있어?”
“드로니안 님입니다.”
“오빠가?”
레오나가 놀랐다가 이내 납득했다. 왕도 왕비도 무녀도 잡혔다면 남은 건 다음 계승권자인 그녀의 오빠뿐이었다.
“다행히 드로니안 님은 총명하신 분이죠.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움직임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크게는 나라의 왕과 왕비가 적국에 잡혀있는 것이고, 좁게는 부모님의 목숨이 걸린 일인 것이다.
“일단 내가 ‘호수의 눈물’을 찾아왔으니까 그걸로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까?”
“무리일 겁니다.”
드니엘이 말했고 지크도 동의했다.
“정말로 녀석들이 트집을 잡고 있는 거라면 바로 다른 트집을 잡을 테지.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하더라도 ‘너희에게 ‘호수의 눈물’을 맡길 순 없으니 내놔라’라든가 ‘인간에게 ‘호수의 눈물’을 도둑맞은 너희를 신뢰할 순 없으니 복종하라’라든가.”
“정확하십니다.”
“…그게 뭐야.”
레오나가 분노에 차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트집이란 그런 것이니까.
지크가 드니엘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주민들이 긴장하고 있었군요.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니까요.”
“그렇죠. 게다가 여긴 인간 세력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이다 보니 혹시 전력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었을 때 인간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을 겁니다.”
드니엘이 레오나를 쳐다봤다.
“그래도 공주님께서 ‘호수의 눈물’을 가지고 돌아오셨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어도 걱정 하나는 덜게 됐으니까요.”
“미안해, 드니엘.”
“괜찮습니다. 솔직히 지금의 공주님의 모습을 보면 저 개인으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무척 멋지게 성장해 오셨으니까요.”
드니엘이 미소를 보였다.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은 수도로 올라가시죠. 일행분들도 그때 함께 올라가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리 시기가 안 좋다 해도 공주님을 지켜주시고 ‘호수의 눈물’을 되찾는데 도움까지 주신 분들이니 대우는 나쁘지 않을 겁니다.”
“드니엘은 계속 여기 있는 거야?”
“아닙니다, 공주님. 혹시 공주님이 귀환하신다면 수도까지 안내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습니다. 수도까지는 모실 수 있습니다.”
레오나는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무를 다 마치자 드니엘은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갔다.
레오나가 한숨을 쉰다. 옆에서 계속 레오나를 다독이던 라일라가 물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위로해줘서 고마워, 라일라.”
확실히 아까보다 그녀의 표정이 편안해져 있다. 마음을 어느 정도 다잡은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연합체의 일족은 몇 개지?”
지크가 물었다. 그걸 꼭 지금 물어야 하겠느냐는 듯 라일라가 도끼눈을 떠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레오나는 순순히 지크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총 다섯 개야. 아까 말한 ‘철의 일족’을 포함해 ‘호수의 일족’, ‘산의 일족’, ‘바다의 일족’, ‘평원의 일족’이 있어. 우리는 ‘호수의 일족’이야.”
‘그래서 보물이 ‘호수의 눈물’인가?’
별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그는 턱을 쓰다듬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레오나를 데려다 주며 레오나의 할머니에게 ‘거꾸로 박힌 나무’에 대해 물어 보고 겸사겸사 엘프 나라 관광이나 하려던 계획이 깡그리 무너졌다.
지크는 여기서 일행이 향할 길을 정해야 했다.
그냥 레오나를 데려다 주고 자기들 갈 길을 가든가 아니면….
‘곧 있을 것 같은 전쟁에 참여하든가.’
지크는 회귀 전 있었던 전쟁을 떠올렸다.
‘그건 좋았지.’
힘과 열과 투지, 그리고 비명과 비탄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회귀 후 몇 번의 싸움은 있었지만 전쟁이라고 부를 만한 건 경험하지 못했다.
밸리드 북부 지부를 쓸어버릴 때가 가장 비슷하긴 했지만 그 때도 지크는 전장에 뛰어들었다기보다는 신전 안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았던가.
그렌 제너드가 그가 아는 정의의 용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지크는 지금껏 고집하던 ‘착한 일’보다는 ‘전쟁’이란 것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마왕처럼.
‘그러고 보니 그렌 제너드 그 녀석이 엘프의 전쟁에 참여했다는 소리를 언뜻 들었던 것 같은데.’
분명 아드로원 대수림의 엘프가 어떤 이들에게 억압을 받고 있다는 걸 풀어줬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 다녔다.
‘녀석들의 명칭이 분명….’
순간 지크는 아까 뒤로 미뤘던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철의 일족’. 맞아, ‘철의 일족’이었어.’
지크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다 문득 레오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레오나. 레오나의 할머니는 괜찮으시겠어?”
“아니, 아까 아버지, 어머니랑 같이 감금당해 있다는 무녀. 그분이 할머니야.”
레오나가 우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지크의 눈은 반짝였다.
‘이거, 아무래도. 전쟁에 참여해야 할 것 같군.’
그리고 레오나를 다독이던 라일라가 그런 지크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