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울창한 녹음. 사방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 잎사귀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와 은은하게 올라오는 흙 내음.
표현만 본다면 사람들의 심신을 고이 달래주는 아늑한 숲의 정경 같다.
하지만 지크 일행이 지금 걷고 있는 곳은 저 이미지에 걸맞은 곳이긴 했지만 절대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숲도 아니었다.
적어도 라일라에게는.
“앗!”
조용히 흙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지 눈치도 모르고 바깥까지 뻗어 나온 나무뿌리에 또 한 번 발이 걸렸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어이쿠!”
그러나 그녀가 꼴불견처럼 땅바닥에 몸을 날리는 일은 없었다. 앞에서 걷던 지크가 가볍게 그녀의 몸을 받아낸 것이다.
“고마워.”
“별 말씀을, 레이디.”
능글맞은 미소와 징글맞을 발언에 윙크까지 한 번. 가벼운 장난을 한번 치고는 지크는 라일라를 똑바로 세워줬다.
라일라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일까. 뿌리에 걸린 건 둘 째 치고 이곳엔 다른 함정도 너무 많았다.
수풀에 가려진 구멍이라든가 미끄러운 진흙이라든가 이끼 낀 돌이 잔뜩 있는 개울이라든가.
라일라는 새삼 주변을 살폈다. 보이는 건 오로지 우거진 수풀과 커다란 나무뿐. 시야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인간에게 식량과 목재 등 갖은 이득을 가져다주는 식물들이, 이곳에는 철저하게 인간을 적대하고 있었다.
아드로원 대수림.
그들이 걷고 있는 숲의 이름이었다.
시작은 다음 목적지를 레오나의 고향으로 잡은 지크의 결정이었다.
비올루윈 지하 유적에 있던 이상한 나무의 정체를 캐기 위한 것이었기에 라일라도 그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찬성이었다.
한스와 스녹이야 철저하게 지크의 의견에 따르는 자들이었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레오나는 고향에 친구를 데려갈 수 있다며 환영했다.
그렇게 진입한 아드로원 대수림.
첫날에는 상당히 신기했다. 이런 수림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그녀였지만 어디까지나 지식일 뿐,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신기해하는 것도 잠시. 두 번째 날부터는 이 어마어마한 수림에 질려버렸다.
땅 밖으로 튀어나온 나무뿌리는 발목을 부여잡고 인간 키만큼 자라난 수풀이 팔과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으며 평탄하지 않은 지형은 착실하게 체력을 갉아먹었다.
지크의 훈련 덕에 마법사답지 않은 체력을 가지고 있는 라일라였지만 마법사는 마법사. 계속된 행군에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러나 지친 건 그녀뿐. 검사로서 체력이 엄청난 지크와 한스는 이런 거친 길에도 숨소리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크는 계속해서 넘어지고 엎어지려는 그녀를 도울 여유조차 있었다. 그리고 엘프인 레오나는 말해봐야 입만 아팠다.
그나마 스녹이 그녀와 가장 비슷했지만, 그도 한스만큼은 아니지만 지크에게 철저하게 훈련받은 터라 라일라만큼 헥헥거리지는 않았다.
“꺄악!”
이번엔 길에 고여 있는 물기 때문에 진창이 된 부분을 밟아 미끄러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지크가 잡아줘 진창에 옷을 버리는 일은 없었다.
“너 진짜 둔하네.”
라일라가 도끼눈을 뜨자 지크가 도망치듯 거리를 벌렸다.
언제나 치는 장난. 하지만 지크의 등을 바라보는 라일라의 눈빛은 복잡했다.
‘지금까지는 평소의 지크가 맞는데.’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비올루윈의 숙소에서 본 그때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잘못 본 걸까.’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잘못 볼 리 없어.’
언제나 지크가 마왕이란 길로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감시하는 그녀다.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올라오는 불안을 내리눌렀다.
‘잠깐 마왕의 얼굴이 나왔을 뿐이야. 그렌 제너드를 만났다고 했으니 마왕의 감정이 올라왔을 수도 있어.’
실제로 지크는 지금은 평소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렌 제너드가 없는 지금, 갑자기 마왕으로 변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낌새가 보였다는 사실이 그녀는 공포스러웠다. 전부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지크 모어란 이름의 압박감만큼은 그녀에게 선명하게 남아 있던 것이다.
‘아아, 젠장! 왜 하필 지금이야!’
안 그래도 자신의 정체 때문에 골치 아픈 상황이 아니던가. 지크 모어라는 새로운 폭탄을 껴안기에는 그녀도 여유가 없었다.
“라일라, 괜찮아?”
어느새 곁에 와있던 레오나가 물었다.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한참 앞서가다 라일라가 자꾸 넘어지는 걸 보고 달려온 모양이다.
“솔직히 조금 힘드네. 아직 멀었어?”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걸으면 마을이 보일 거야.”
그 ‘조금만’이 정말로 ‘조금만’이길 바라며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레오나가 말한 ‘조금만’은 일반 상식적인 ‘조금만’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그들은 마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냐!”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 엘프 다섯 명이 나타났다. 굵긴 하지만 둥근 형태의 나뭇가지에서도 쉽게 균형을 잡고 화살을 그들에게 향한다.
하지만 그런 위협적인 모습에도 긴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작 그런 것으로 겁먹기에는 일행의 무력이 너무 높았다.
반대로 엘프들의 눈에 경계심이 상당했다.
이런 곳까지 오는 인간은 극히 드무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의 경계를 일순 허무는 사람이 등장했다.
“활 내려.”
레오나가 말했다. 뒤늦게 그녀를 확인한 엘프들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인간들 사이에 그들의 동족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한 명. 엘프의 경계조를 이끌고 있던 한 명은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공주님!”
그건 지크 일행조차 경악시킬 한 마디였다.
* * *
지크 일행은 마을로 안내 받았다. 수 백의 엘프가 살아가는 그 마을은 거대한 나무 위에 지어져 있었다.
사람 열 명이 함께 껴안아도 모자랄 만큼 굵은 나무 위에 지어진 집은 굉장히 크고 넓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나무 위에 지어진 집과는 전혀 달랐다.
마을엔 의외로 나무도 적었다. 집이 지어져 있지 않은 곳의 나무들은 아예 뿌리째 뽑아 제거해버린 것 같았다.
마을을 확장하고 있는 듯 마을의 끝으로 보이는 곳에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잘려나가는 걸 본 스녹이 중얼거렸다.
“엘프는 숲을 사랑하는 것 아니었나요?”
“인간들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를 거야.”
라일라가 대답했다.
“인간들에 비해 숲을 소중히 다루는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게 그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야. 숲이란 존재는 엘프의 삶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들이 숲을 아끼고 가꾸는 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살기 위해서라는 뜻도 돼. 그래서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숲을 어느 정도 개량하는 건 흔해.”
“그렇군요.”
낯선 인간들이 신기한지 집에 있던 엘프들이 하나둘 나와 지크 일행을 관찰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호의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적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심한 경계. 딱 그 정도의 상태였다.
지크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살폈다. 지크와 눈이 마주친 엘프들이 고개를 움츠렸다.
‘낯선 인간들을 경계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건 조금 심한데.’
인간과 교류가 완전히 없는 엘프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의 엘프는 인간과 교류를 한다고 하지 않던가.
‘호수의 눈물을 훔쳐간 녀석들 때문에 그런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했다. 그렇게 인간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사실이 알려졌다면 저들이 보낼 눈빛은 경계가 아니라 적대일 것이다.
그 때 일행을 안내하던 엘프가 어느 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손님분들은 이쪽에서 머물러주시길 바랍니다.”
엘프들의 다른 집이 그렇듯 일행이 안내된 집도 높은 나무에 매달리듯 지어져 있는 집이었다.
손님용인 듯한 그 집은 다른 집들과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시설은 충분했다. 방도 넉넉해 사람 당 방 하나 씩을 사용할 수 있었다.
라일라가 안내원 엘프에게 인사했다.
“감사해요.”
“아닙니다. 공주님의 일행에게 이런 대접밖에 해드리지 못해 오히려 송구스럽습니다.”
“괜찮아. 내 일행들은 착하니까.”
레오나가 으스댔다. 안내원 엘프가 살짝 웃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고치더니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정말로 죄송스럽습니다만, 바깥출입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어? 왜?”
레오나가 놀라 물었다. 하지만 라일라가 그녀를 제지했다.
“알겠어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지는 가르쳐 줄 수 있나요?”
그녀도 마을 안의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모양이다.
다행히 말이 통하는 것 같자 안내원 엘프는 안도하는 것 같았다.
“저녁에 다른 분이 오셔서 자세한 설명을 해드릴 겁니다. 그럼.”
안내원 엘프는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갔다.
레오나는 아직 영문을 모룬 채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크가 툭 쳤다.
“너무 당황하지 마라. 마을에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다.”
“일이라고?”
“그래. 엘프들의 경계도가 장난이 아냐.”
레오나는 동족들의 반응을 떠올렸다.
빼앗긴 ‘호수의 눈물’을 되찾아 왔다는 기쁨과 친구들에게 고향을 소개해줄 수 있다는 것에 들떠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새삼 생각해보면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집 밖으로 나가려는 레오나를 지크가 붙잡았다.
“나가서 뭘 하려고.”
“그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야지! 난 이 숲의 공주라고!”
“아서라.”
지크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들쑤시면 괜히 다른 엘프들의 불안감만 커질 가능성이 커. 곱게 저녁에 누군가 오길 기다리는 게 낫다.”
“으음.”
당장 나가 사람들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레오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지크의 말을 듣고 실패한 경험이 없는 것이 큰 지분을 차지했다.
“알았어.”
“그럼 서로 피로를 풀고 저녁 때 보자고.”
“난 잘래.”
숲에 진입한 후 가장 고생한 라일라가 바로 방 하나를 정해 들어갔다.
레오나도 집의 현관을 한 번 쳐다보더니 자신의 방을 골랐다.
“너희도 들어가라.”
지크는 남아있는 한스와 스녹에게 말했다. 하지만 둘은 뭔가를 전력으로 말하고 싶은 기색이었다.
“레오나가 공주님이란 것 때문에 놀랐냐?”
“그, 그야 당연히 놀라죠!”
스녹이 말했다. 한스도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같이 여행한 동료가 엘프의 공주님이었다니.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엘프의 왕은 인간의 왕과는 달라. 엘프를 다스리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표 격인 인물에 불과하지. 남들보다 조금 더 대우는 받을지언정 인간처럼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진 않아. 따라서 레오나에 대한 대우도 인간 왕국의 공주와는 달라.”
만약 인간 왕국의 공주님이 이런 마을에 입장이라도 했다면 마을 사람들이 지금의 엘프들처럼 담백한 반응을 보이진 않을 거다.
하지만 한스와 스녹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살아 온 세상과는 전혀 다른 체계니 그럴 만했다.
“이해할 필요 없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겨. 레오나도 그냥 지금처럼 대하고.”
그 말만을 남기고 지크도 자신의 방을 선택해 사라졌다.
남은 한스와 스녹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라니. 하지만 그들에게 그 이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둘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에도 지크의 말을 억지로 머리에 새겨 넣으며 자신들의 방을 정해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