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녀석이 회귀를 했다 해도 별 상관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었다.
하지만 녀석은 회귀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게도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녀석도 회귀를 했는데 내게 했던 말을 모르는 상황이 있을 수 있나?’
그는 머리를 굴렸다.
‘회귀는 했는데, 녀석이 회귀한 시점이 나와 같은 시점이 아니라면?’
맹점이었다. 자신의 경험 때문에 자연스럽게 녀석도 회귀를 했다면 자신과 같은 시점, 그 최후의 전투에서 했다고 생각해 버렸다.
‘아니, 기다려봐. 꼭 녀석이 회귀를 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어.’
지금 그의 동료 중엔 회귀를 하진 않았지만 온갖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물론 지금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상태긴 했지만.
‘라일라 같은 경우인가?’
그렇다면 그렌 제너드는 그 암살자 놈들과 연관이 있는 놈들일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암살자들은 대륙에 마인들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인들을 가장 많이 처단한 자는 바로 ‘태양의 용사’ 그렌 제너드.
만약 그 둘이 어떤 식이든 관계가 있다면.
‘위선자.’
바로 지크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설마 자신의 명성을 위해 마인들을?’
지크는 팔짱을 끼고 발을 까닥였다.
‘확실히 너무 나간 의견이긴 한데.’
하지만 그가 겪어 온 경험을 생각하면 그런 미친놈이 없으리라는 것도 보증할 수 없다.
‘나부터가 사람 엿먹이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하는 놈인데 제 명성 올린답시고 마인 만드는 놈이 없다고 단정하는 게 웃기지.’
지크는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언하긴 일렀다.
‘전혀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라일라 같은, 암살자 무리에게서 도망을 친 사람일 수도 있다.
계속해서 확장해나가는 의심의 가지에 지크는 머리를 짚었다.
‘가능성이 너무 많아.’
만약 그도 지크처럼 회귀를 한 것이라면 그게 시점이든 뭐든 지크의 회귀와는 다른 회귀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라일라처럼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이라면 암살자 놈들과 연관이 있을 확률이 크다.
‘회귀와 관련이 있다면 녀석이 회귀의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렌이 회귀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지크가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자신과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도 회귀를 했다면 ‘운명을 비트는 열쇠’ 때문에 회귀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시점에 회귀를 했다면 그와 이유가 다를지도 몰랐다.
‘회귀의 이유나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건 지크가 지금 여행을 다니는 이유 중 하나다.
‘암살자랑 관련이 있어 음모를 꾸미는 중일 수도 있어.’
지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잡아서 족쳐 봐?’
마왕이었던 시절이라면 바로 그랬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지크는 지크 모어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크가 마왕이 되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응? 무슨 일 있었어?”
쇼핑을 끝내고 돌아온 라일라가 뒤뜰에 나와 있는 지크와 한스를 보고 물었다.
“별일 아니야. 조금 있다 말해줄게.”
“알았어.”
라일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가벼운 콧노래까지 부르는 것이 상당히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던 모양이다.
‘뭐, 좋아.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일단은 내버려두자고. 아니, 생각해보면 이득 아닌가?’
지크가 미소지었다.
‘회귀에 관련됐든 암살자에 관련됐든 단서 비슷한 걸 하나 찾은 거니까.’
거기에 만약 그렌이 정말로 ‘자신의 명성을 위해 마인을 만든 자’라면 더더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 녀석이 정말 자신의 위업을 위해서 마인들을 만든 거라면, 그 녀석이 나를 마왕의 길로 이끌었다는 건데.’
그럼 찾은 게 아닌가. 그의 인생을 멋대로 조작한 인간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 따른 대접을 듬뿍 해드려야지.’
지금껏 엿을 먹여왔던 다른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말이다.
에스텔레이드를 다시 뽑아 수련을 계속하려던 한스가 지크의 얼굴을 보고 움찔 거리를 벌렸다.
‘또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저 웃음의 대상이 된 사람이 좋은 꼴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한스는 곧 신경을 껐다.
‘무고한 사람이 대상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다시 에스텔레이드를 휘두르며 훈련에 돌입했다. 다만 지크의 머릿속 대상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지크는 미소를 거뒀다.
지금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추측의 예상을 넘지 않는다. 근거도 단서도 아무것도 없는, 정황상으로만 보면 ‘그럴 수도 있다’라는 선일 뿐이다.
‘누가 들으면 콧방귀 낄 망상에 불과할 정도지.’
하지만 알아볼 만한 일이기도 하다.
‘일단 이 녀석에 대해서 알아보자고.’
지크는 메고 있던 윈두르를 꺼내들었다.
자신을 과거로 회귀시킨 일등 용의자인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합쳐진 검.
‘이 녀석과 고대 유적에 있는 괴상한 나무가 공명했었지.’
그리고 그 괴상한 나무는 레오나의 할머니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때문에 안 그래도 그 나무를 알아보려 레오나의 고향으로 가보려 했었다.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지크는 윈두르를 다시 등에 동여맸다. 그리고 수련을 하는 한스를 뒤로 하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그렌이 그런 비열한 녀석이라면, 녀석이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자신감에 차 자신에게 ‘다시 태어나면 착하게 살라’ 운운하던 녀석의 얼굴이 생생하다.
자신을 이긴 힘에 존경을 표해 이번 생은 착하게 살기로 하게 한 그 발언.
‘하지만 녀석이 내 인생을 망친 녀석이라면, 위선자라면,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용사답게,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녀석이 정말 위선자라면 그냥 헛소리였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녀석의 말을…내가 따라야 하는 걸까.’
덥석!
누군가 그의 소매를 쥐었다.
“지크!”
라일라였다.
어느새 건물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쇼핑의 전리품을 방에서 정리하고 로비로 내려온 그녀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유령이라도 본 듯 창백해 보였다.
“응? 무슨 일이야? 뭔 일 있어?”
지크가 물었다. 라일라가 다급하게 그의 얼굴을 뜯어봤다. 지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야. 왜 그러는데.”
“…후우!”
지크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나쁘게 남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네. 이 잘생긴 얼굴에 뭐가 불만이라도 있는 거야?”
지크는 자신의 뺨을 한 번 쓸어내렸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평소라며 ‘잘생긴 얼굴’ 운운에서 빈정거렸을 그녀가 고이 물러나자 지크가 더 수상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라일라는 연신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정말 별거 아냐.”
“그러냐.”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에게 지크는 신경을 껐다.
“그럼 난 올라간다. 아, 아까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해줄게.”
“그래. 밥 먹을 때 해줘도 충분해.”
지크는 계단을 뚜벅뚜벅 올라갔다.
그의 모습이 위층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의 등을 계속 쳐다보던 라일라가 근처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마치 다리에 힘이 빠진 듯한 모습. 자신의 팔을 끌어안고는 부들부들 떨기까지 한다.
‘…그 얼굴.’
라일라가 로비에 내려와 지크의 얼굴을 봤을 때, 그녀는 심장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뭔가 상념의 빠져 있던 그의 얼굴.
익숙한 얼굴이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기도 했다.
‘그건…, 그 얼굴은 분명…!’
아주 잠시다. 자신이 그의 소매를 잡자마자 사라진 얼굴.
그러나 그 얼굴은, 라일라의 얼마 남지 않은 기억 속에서도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얼굴이었다.
‘지크 모어의 얼굴이었어.’
어째서 지크가 일순간이라지만 마왕의 얼굴을 하고 있던 걸까.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 * *
그렌과 브라우닝은 천천히 숙소를 벗어났다.
숙소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전부 다 도시를 구한 영웅들의 모습을 한 번 보러 온 구경꾼들의 모습이었다.
그렌이 그들을 한 번 훑어보는데 옆에서 브라우닝이 말을 걸었다.
“어땠어?”
“뭐가요?”
“그 용사라는 사람들 말이야. 두 명을 만나봤잖아.”
“나쁘지 않았어요. 지크라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고. 한스라는 사람도 정의관이 뚜렷한 것 같더군요.”
“그렇지?”
그렌이 브라우닝을 쳐다봤다. 그녀는 굉장히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렌은 그녀가 한스와 대화를 나눴던 걸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브라우닝도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눠봤지요.”
“응! 다퉜던 무리의 사람이라고 해서 처음엔 조금 꺼려졌는데, 말을 해보니까 상당히 좋은 사람이더라고. 말도 통하고.”
“그렇습니까?”
브라우닝은 그렌에게 그녀와 한스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들려줬다. 그렌은 미소 띤 얼굴로 그녀의 대화를 세심히 들었다.
아니, 듣는 것 같았다.
“상당히 마음에 든 것 같네요.”
의미심장한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브라우닝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좋은 만남이었어.”
“그거 다행이네요. 한데, 브라우닝. 검과 방패에 대해 생각은 좀 해 보셨습니까?”
“아, 그게….”
브라우닝이 어색하게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 아직….”
“괜찮습니다.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까. 하지만 너무 시간이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응, 그럴게.”
그 이후로 그렌은 입을 다물었다. 굳어버린 침묵 속에서 그렌은 지크에 대해 생각을 했다.
‘지크 모어. 확실히 이상해.’
이번에 그들과 접근해서 확인하고 확신했다.
아무리 종종 그가 예측하지 못하게 세계가 변한다지만 이건 너무나 많이 변했다.
‘대지의 폭군과 레오나가 왜 녀석의 일행이 된 거지? ‘에스텔레이드’는 왜 녀석의 일행이 가지고 있고.’
그것만이 아니다.
‘지크 모어란 존재도 너무 많이 변했어. 지금의 그는 아직 저렇게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니, 아직 스틸월 백작가에서 뒹굴고 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얼마 조금 있다가 마왕의 길에 진입해야 한다.
한데, 지금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마왕은커녕 오히려 용사라고 불리고 있다. 거기에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란 직함까지 가지고선.
‘루벨라도 그 녀석과 친해 보였지.’
언제나 진중하고 매사에 조심스러운 그녀가 ‘농담 따먹기’까지 하며 그와 어울리고 있었다.
이런 이변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그렌은 조심스럽게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녀석도 회귀를 한 건가?’
처음에는 지크가 말했던, 그를 변하게 한 존재가 그를 바꿔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작 사람 한 명의 존재가 이렇게까지 세계를 ‘일그러뜨릴’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또 한 명의 회귀자가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참을 생각한 그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래 그럴 리 없다.
‘이런 특별한 힘을.’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이 힘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을 리 없으니까.’
어디까지나 ‘특별’한 건 ‘자신’뿐이다.
그 생각과 함께, 그렌은 마음속에서 솟아오른 작은 의심을 지워 없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