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아무리 검이 좋다고 해도 사용하는 사람의 수준이 낮다면 그 힘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람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검에 사람이 휘둘리는 것이 빤히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전투에서 그런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검이 좋더라도 본인의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소용없죠. 적어도 검의 능력에 완전히 묻히는 것 같진 않았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군요. 일단 이 검에 어울리는 실력이 되는 것이 첫 번째 목표거든요.”
그가 순박하게 웃었다.
실력 있고 겸손하다. 브라우닝이 좋아하는 요소였다.
“그럼 다른 목표도 있나요?”
“영웅이 되는 겁니다.”
한스가 말했다.
예전에는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부끄러워했던 말.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한스는 이 말을 당당히 내뱉을 수 있었다.
커져가는 실력과 에스텔레이드에게 받은 선택. 그리고 본인은 지크의 곁다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비올루윈에서 원하던 칭호를 얻었다.
무엇보다 지크가 그의 꿈을 인정하고 있지 않던가. 먼저 나서서 말하고 다닐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꿈을 묻는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답변할 정도는 됐다.
그러나 좋은 대답이 돌아오리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꿈을, 꿈꾸는 아이들이나 한때 품을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좋은 꿈이네요.”
브라우닝은 은은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가요?”
“네. 대부분은 비웃었으니까요.”
비올루윈의 술집에서 스녹과 같이 꿈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시비를 걸었던 건달들이 대표적인 예였다.
지금껏 그의 꿈을 긍정한 것은 그의 일행 정도가 전부였다. 한데, 처음 본 사람이 그의 꿈을 또 한 번 긍정했다.
“잊어버려요. 남의 꿈을 비웃는 사람들은 형편없는 사람들이니까요. 제 꿈도 정의롭게 사는 거예요. 남들을 도우면서 말이에요.”
“멋진 꿈이군요.”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훈훈한 분위기가 감돈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 두 무리 사이에서 흐른 무거운 긴장감이 거짓말 같았다.
둘은 그 이후로도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꿈의 구체적인 설명과 간단한 신변잡기 정도. 하지만 원래 마음이 통하는 상대와는 이야기가 즐거운 법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저절로 그들의 꿈을 지탱해주는 존재, 지크와 그렌의 이야기로 흘렀다.
“대단한 분이군요. 정의롭기도 하고요.”
“맞아요. 제너드는 그런 사람이죠.”
한스가 그렌을 칭찬하자 브라우닝은 신나서 긍정했다.
“절 구해줬던 일도 그랬고 그 이후에 하는 일들도 하나같이 멋있었죠. 실력은 저보다 못하지만, 곧 절 능가할 거예요.”
사람인 이상 기본적인 경쟁심리는 있을 수밖에 없고 때문에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곧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현실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브라우닝은 그 사실을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그렌이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한스는 생각했다.
“저희 지크 님도 그렇습니다.”
“그 이상한 검을 든 사람을 말하는 거죠?”
브라우닝의 말투가 조금 어색해졌다.
그녀와 직접적으로 부딪친 상대이자 도시가 정한 규칙을 우습지도 않은 이유로 어긴 사람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다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일행인 한스의 앞에서 대놓고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기도 어려웠다.
한스는 브라우닝의 반응을 눈치 챘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했다.
“물론 그 제너드란 분처럼 한결같이 정의로운 분은 아닙니다. 아니, 따지자면 성격이 무척 더러운 분이시죠.”
“…그런데 같이 다니시는 건가요?”
“적어도 그분은 제 꿈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시죠. 능력이나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마음가짐 같은 것들도 말이죠.”
“마음가짐도요?”
성격이 더럽다는 사람에게 어떤 마음가짐을 배운다는 걸까.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는 건 압니다만. 정말입니다. 지크 님 본인은 자기가 성격 더러운 악당이니, 오히려 용사 같은 놈들이 하는 생각은 쉽게 알 수 있다면서 껄껄거리셨죠.”
“…….”
지크란 사람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브라우닝은 생각했다.
“게다가 성격과는 다르게 지크 님도 착한 일을 하려 노력하기도 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카르위먼의 명에 성기사였죠.”
“제너드 님에게서 들으신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지크 님이 그저 성질만 더러운 분이었다면 절대로 카르위먼에 인정을 받지 못하셨겠죠.”
브라우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기가 본 지크란 사람의 모습은 그 사람의 일부뿐인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저를 제자로 데리고 다닌다는 것부터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자세한 걸 말하면 길어질 것 같고. 요약하자면 예전의 전 싸가지 없는 철부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지크 님을 대놓고 무시한 적도 있었고요.”
“…네?”
지금의, 지크를 거의 은사처럼 말하는 한스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과거에 그녀가 놀랐다.
“같이 다니게 된 것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의 대가로서 제가 종으로서 지크 님에게 끌려온 거죠. 지옥이 시작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때가 생각났는지 한스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제게 힘을 주시고 경험을 주셨죠. 그리고 제 꿈을 들으신 후로는 지원까지 해주셨습니다. 물론 그 동안의 훈련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만, 그것들은 전부 제 꿈의 밑바탕이 되었죠.”
한스는 미소지었다.
“전 그분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 한심한 과거를 벗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에게는 정말로 감사한 사람이군요.”
“물론이죠.”
브라우닝은 지크에 대한 인식을 많이 바꿨다.
서로의 꿈과 그 꿈을 지탱해준 사람들에 대해 얘기를 나눈 후 나온 주제는 서로의 실력에 관한 일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일단은 이 검에 걸맞는 실력을 쌓을 겁니다. 그쯤 되면 적어도 고개를 들고 다닐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스가 에스텔레이드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부럽네요.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게요.”
“브라우닝 씨는 그러지 않습니까?”
“요새 좀 흔들리고 있어요.”
브라우닝은 자신의 검과 방패를 한 번씩 쳐다봤다.
“어렸을 때부터 검이 좋았어요. 그리고 재능도 있다고 자부했죠. 하지만 아무래도 저한테 검의 재능은 없는 모양이에요.”
“그럴 리가요? 예전 전투에서 좋은 실력을 보여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저 좋은 스승과 좋은 환경에서 남들보다 먼저 검을 잡아서 그럴 거예요. 무엇보다 제너드도 그러는 걸요. 저는 검보다는 방패를 위주로 사용하는 게 나을 거라고.”
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도 경험이 적어서 정확하게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만, 그렇게까지 재능이 없다고 느끼진 못했습니다. 게다가 지크 님도 당신을 상당히 칭찬하셨었고요.”
지크가 그녀에 대해 평가하는 걸 한스도 들었었다.
“그런가요?”
두 사람, 자신의 검을 높게 평가를 해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녀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그녀의 검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한스가 그녀에게 뭐라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여기 있었냐?”
지크가 그렌을 이끌고 정원에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한스가 지크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렌이 브라우닝을 쳐다봤다.
“브라우닝도 여기 있었군요.”
“응. 로비에 있기도 심심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그녀가 자연스럽게 그렌의 옆에 섰다.
한스는 지크의 옆으로 움직였다.
지크가 그렌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 사람이 널 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와 봤다.”
“저를 말입니까?”
한스가 그렌에게 시선을 줬다. 그렌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한스를 쳐다봤다.
“그렇습니다. 일단 제 소개를 다시 하죠. 그렌 제너드라고 합니다.”
“한스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고개를 숙였다.
“비올루윈에서 용사로 칭송받는 분들을 한 번 뵙고 싶어 양해를 부탁드렸습니다. 특히 ‘태양의 용사’라고 칭송받는 분이 어떤 분인지 호기심이 들어서 말이죠.”
“분에 겨운 칭호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여기 있는 지크 님을 조금 도왔을 뿐입니다.”
겸양이 아니다. 지크의 몬스터들을 쓸어버린 그 압도적인 실력에 비하면 그의 실력은 곁다리조차 되지 않았다.
물론 그때 지크의 실력은 일시적이었지만, 말을 들어보면 그 실력을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하지 않던가.
“확실히 지크 님은 대단하신 분이죠.”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렌과 한스는 그 후로도 얼마 대화를 나눴다.
그리 중요한 대화는 아니었다. 그리고 대화 시간도 길지 않았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무척이나 유용한 시간이었군요.”
“저도 얘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눴다. 그렌은 다시 지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지크 씨도 한스 씨를 소개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다른 두 사람은 보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용사 칭호를 받은 다른 사람인 라일라와 스녹을 말하는 것이었다.
“막무가내로 찾아왔는데 이 이상 실례를 할 순 없죠. 두 분을 뵌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렌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브라우닝과 함께 사라졌다.
“어떠냐?”
“뭐가 말입니까?”
밑도 끝도 없는 지크의 질문에 한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렌 제너드라는 인간 말이야. 아마도 너와 같이 영웅을 지향하는 인간 같은데, 만나본 느낌은?”
“글쎄요. 별 감흥은 없습니다. 들으니 꽤 대단한 사람이건 것 같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곁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곁에는 지크라는 엄청난 존재가 있었다.
“적어도 그 사람은 밸리드의 무리에서 성녀를 지키거나, 밸리드 북부 지부를 쓸어버리거나, 몬스터 무리에서 도시를 구하거나 하지는 못했죠.”
“그러냐.”
지크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지크 님. 아까의 붉은 머리 아가씨 말입니다. 라라 브라우닝이라고 하던데. 그분의 실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관심 있냐?”
“그게 아니라, 앞으로 검을 놓을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지크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시선을 보내자 한스가 자신이 들은 말을 설명했다.
지크가 생각에 잠겼다.
“검에 재능이 없어 보이나요?”
“아니, 그 정도면 충분히 재능이 높아.”
물론 지크나 한스 같은 미친 재능은 아니지만, 그 둘만을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칭한다면 이 세상에 재능 있는 자들은 단 한 줌에 불과할 것이다.
‘라라 브라우닝이 마지막에 방패를 들고 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검보다 방패 위주로 스타일을 바꿀 만큼 재능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정말로 재능이 없는 건가. 그런데 지금 그렌 제너드 그놈 실력으로 남의 재능을 알아볼 수 있나?’
지크는 그렌의 실력을 떠올려봤다.
분명 수준자체는 낮았었다. 당장 본격적으로 수련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한스와 맞붙어도 비슷할 만큼.
‘하지만 몸놀림만은 묘하게 원숙했어.’
토르니움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도 능숙하게 사용한 건 덤이다.
마치 그 정도의 힘을 과거에도 휘둘러 봤던 것같이.
‘태양의 용사란 칭호를 받은 한스에게 이상하게 집착하는 것도 같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놈도 회귀했나?’
하지만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예전 그의 회귀를 의심했던 적이 있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근거.
회귀 전. 그가 죽어가는 지크에게 한 말.
‘다음에 태어나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돼라, 라는 말을 그놈은 왜 모르는 것 같았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