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잘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 사람들이 수상한 건 사실이야.”
사과는 한다고 하지만, 브라우닝은 아직 지크 일행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걱정 마요. 제가 한 번 알아볼 테니까요.”
“응. 네가 움직여 준다면 듬직하지.”
브라우닝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불쾌한 사람들이었어. 네 선의까지 왜곡하다니 말이야.”
그녀가 그렌을 돌아본다. 그 눈빛에는 신뢰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 여자, 마치 네가 나를 방패삼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잖아. 나는 내 의견을 말했을 뿐이고 너는 내 의견을 존중한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시시콜콜 이야기해줄 필요는 없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설명을 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당신이 말싸움에 휘말려 든 걸 내버려둔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도 최후에는 날 감싸줬잖아?”
“그건 뭐.”
그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브라우닝이 웃었다.
“고마워, 제너드. 날 감싸줘서.”
“언제라도 그렇게 해드리죠.”
그렌도 따라 웃었다.
“그런데 브라우닝. 하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데?”
“저 유적,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았으면 해요.”
뜻밖의 말에 브라우닝이 놀랐다.
“뭐? 어째서? 저런 위험한 유적은 도시에 알려서 당장 처리해야 해! 저 ‘그림자’들이 도시로 쏟아져 나올지도 모른다고!”
‘그림자’의 숫자와 전투력을 생각한다면 도시에 알린다고 해서 탁월한 해결책이 나올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경계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게다가 도시의 전력으로 불가능하다면 국가의 지원을 받는 방법도 있다.
“게다가 멋모르고 들어온 관광객이 저 곳에 들어갈 수도 있어! 저 작자들을 봤잖아!”
사람이 적은 곳에서 유적을 둘러보고 싶어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왔다는 그들.
지금 보면 그 변명조차 굉장히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그들과 같은 관광객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관광객이 휘말리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저 비밀문은 함부로 열릴 것 같지 않으니까요.”
“…저게 어떻게 열리는지 알아?”
“대충 예상은 가요. 그리고 ‘그림자’는 저 문을 빠져나오지 못 하는 것 같으니 도시는 안전할 거예요. 아니, 오히려 이 소식이 알려진다면 비올루윈은 쇠퇴할 가능성이 커요. 도시 아래에 이상한 괴물이 나오는 유적이 있다는 걸 안다면 사람들은 불안에 떨 테니까요. 관광객도 오려 하지 않겠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시가 정말 안전할 때의 이야기야. 정말 도시가 안전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네.”
“이유는?”
“말씀 드릴 수 없어요.”
“그래.”
믿기에는 너무나 뻔뻔한 말. 근거도 이유도 대지 못하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무슨 장난을 하냐며 버럭 화를 내도 될 만한 말이다.
하지만 브라우닝의 반응은 너무도 가벼웠다.
“네가 그렇다면 이유가 있겠지.”
그건 그렌에 대한 무거운 신뢰에 바탕을 둔 행동이었다. 너무도 손쉽게, 그녀는 그렌의 말을 받아들였다.
“알았어. 말 안 할게. 그런데 우리만 입을 다문다고 되는 게 아니야. 그 사람들이 말을 하면 어떡할 거야?”
그녀는 이미 떠나버린 지크 일행을 상기시켰다.
“쫓아가서 얘기를 나눠봐야죠.”
하지만 그렌은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에스텔레이드를 갖고 있었다면 이 유적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야. 하지만 지금 비올루윈은 이 유적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
도시에서 이곳을 알고 있었다면 조사대를 꾸리든 뭐든 뭔가 행동이 있었을 것이다.
‘즉, 저 녀석들도 남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뜻이야.’
하지만 브라우닝을 납득시킬 만한 행동은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럼 어서 쫓아가자. 괜히 먼저 보냈네.”
자신의 탓인 것 같아 브라우닝은 그렌의 눈치를 보면서 괜히 툴툴 댔다.
“여기 우리가 왔던 곳 맞지?”
“맞아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그렌은 많은 출입구 중 브라우닝과 들어 온 입구를 안내했다. 그는 지금 여기의 입구밖에 몰라야 하니까.
“앞장 서. 나는 길을 잘 모르니까.”
“그러죠.”
“따라잡을 수 있을까?”
“서둘러 봐야죠.”
하지만 그렌은 느긋했다.
그들이 왔던 길은 이곳에서 관광지까지의 최단 거리였다. 지크 일행이 그들이 온 길을 똑같이 가고 있다면 조금 서두르는 것으로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지크 일행이 다른 길로 둘러 간다고 해도 상관없다. 최단 거리로 가는 만큼 그들이 지크 일행보다 빨리 도착할 테니까. 관광지 입구에서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길은 알고 있겠지? 우리가 들어간 입구랑 다른 입구가 있어서 그 쪽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르잖아.”
그렌이 안내하는 복잡한 갈림길에 질린 그녀가 물었다.
“그때는 우리가 찾으러 다녀야겠죠.”
“흥! 길 잃어서 고생 좀 해 봤으면 좋겠네.”
그녀가 빈정거렸다.
“아, 그런데 브라우닝.”
“왜?”
“당신의 무기 말인데요.”
정말로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그렌은 무척이나 가벼운 어조로 흘러가듯 그녀에게 말했다.
“역시 검과 방패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것보다는 방패를 위주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또 그 소리야?”
지금껏 그렌의 말에 단 한 번도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던 브라우닝이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까지나 충고에요. 브라우닝의 재능이 그 쪽으로 보여서요.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브라우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렌의 저 말은 우스운 말이었다. 실력은 그렌보다 브라우닝이 뛰어난 것이다.
하지만 브라우닝이 바로 반박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렌 제너드의 천재성.
지금이야 그녀의 실력이 위라지만, 그녀는 언젠가 그렌이 자신의 실력을 우습게 따라잡고 곧 추월할 거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종종 보여주는 그의 안목은 그야말로 소름끼칠 정도로 매섭고 정확했다.
그런 그렌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검에 재능이 없다고.
“저는 브라우닝의 선택을 존중해요. 하지만 아닌 걸 아니라고 할 수도 없어요. 브라우닝이 검을 계속 잡고 싶다면 잡아도 되요. 하지만.”
앞서가는 그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만은 브라우닝에게 크게 꽂혔다.
“높이 올라가지는 못할 거예요.”
“…….”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어렸을 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휘둘러 온 수련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는 손이다. 하지만 그렌은 그것들이 전부 쓸모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생각해볼게.”
브라우닝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그것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그 후 둘 사이에선 말이 사라졌다. 지크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만이 통로를 울렸다.
익숙한 출입금지 표시가 보였다. 그들은 관광 지역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사람이 없네?”
브라우닝이 당황해 말했다. 보통 그들이 출입금지 선을 넘을 때 인적이 드문 곳을 이용하긴 한다. 아무래도 대놓고 넘어갈 순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너무 사람이 없었다.
“설마!”
어떤 생각에 닿아, 브라우닝이 기겁했다.
“제너드! 혹시 그 ‘그림자’들이…!”
“그건 아닐 겁니다.”
그렌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림자’들이 여기까지 생겨났다면 뭔가 전투의 흔적이 있어야 해요. 브라우닝도 겪어 봤잖아요. 방어력은 없다시피 한 녀석이었지만 공격력만큼은 대단한 녀석들이었다는 걸요. 스피도도 좋았고요.”
그리고 주변을 살핀다.
“만약 그 녀석들이 침범했다면 어떻게든 흔적이 있었을 겁니다. 시체든 피든 뭐든지요.”
“그럼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이 너무 없잖아.”
그렌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네요. 한 번 가보죠.”
그렌과 브라우닝이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빨리 했다.
가까이 갈수록 소리는 커졌다. 하지만 그게 혹시 비명 같은 것이 아닐까 했던 브라우닝의 걱정은 점점 사라졌다.
그건 분명 환호성 소리였다.
그들은 유적 바깥으로 나왔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듯 구름 같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브라우닝은 인파의 중심을 살폈다. 인파에 둘러싸인 몇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어? 저 사람들.”
브라우닝이 놀라 말했다.
그들은 방금 헤어졌던 지크 일행이었다.
혹시 출입금지 지역에 들어간 것을 걸린 것일까. 하지만 그런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무슨 영웅을 보려 몰려드는 군중 같은 느낌이었다.
브라우닝은 근처에 있는 사람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용사님들이 왔어요!”
“네?”
“도시를 구한 용사님들! 그분들이 오셨다고요!”
브라우닝은 잠시 눈앞의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호, 혹시 그 용사…님들이라는 게 저 사람들을 말하는 건가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지크 일행을 가리키는 그녀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럼요!”
브라우닝은 경악했다. 그렌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둘의 감정은 아랑곳없이 사람들의 환호성은 계속됐다.
* * *
지크 일행이 들킨 건 우연이었다. 하필이면 예전, 도시를 구한 후 그들을 가까이서 시중들던 사람을 유적 입구에서 만난 것이다.
당연히 그는 지크 일행을 대번에 알아봤고, 주변에 지크 일행에 대한 정체를 큰 소리로 알렸다.
남은 건 용사를 찬양하는 사람들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관광객들. 그리고 당황한 일행과 똥 씹은 표정의 지크뿐이었다.
지크 일행은 도시에서도 가장 화려한 숙소로 머물 곳을 옮겼다. 다시 도시에 방문한 용사들을 소홀히 대접할 수 없다며 도시에서 숙소 전체를 대절해준 것이다.
거절할까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들킨 거 차라리 도시의 호의를 받는 편이 편하다고 생각해 지크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오래 있지도 않을 거고.’
지크는 커다란 방의 푹신한 소파에 누워 아까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칭송은 소름 돋을 정도로 별로였지만, 딱 하나 흥미로운 것이 있었다.
자신들의 뒤를 이어 나온 것 같은 그렌 제너드. 그가 놀란 표정으로 지크 자신을 보고 있었다.
‘큭큭! 용사 앞에서 용사 취급을 받는 마왕이라니.’
회귀 전에도 이런 기괴한 경우는 경험한 적이 없다. 지크는 몸을 늘어뜨렸다.
‘그러고 보니 토르니움에 대해 물어보는 걸 깜박했군.’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그 실력으로 토르니움을 사용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궁금한 게 하나가 더 있긴 했다. 하지만 지크는 그 생각을 끝냈다.
‘어차피 호기심 이상은 없었으니까.’
지크는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내일이나 모레 떠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도시의 시장이란 녀석이 그들을 도시의 관광객을 끌기 위한 광대로서 쓰고 싶은 것 같았으니까.
물론 광대로서 사람들 앞에 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감히 날 이용하냐며 베어죽이기는 그러니 귀찮지 않으려면 빨리 떠날 수밖에.’
자신이 관대해졌다고 혼자 낄낄 댄 지크는 잠이 들었다. 이미 그에게 그렌 제너드와 라라 브라우닝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단 하루 만에 그들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루만이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그의 앞에 웃는 낯의 그렌 제너드가 앉아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