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윈두르와 토르니움이 앞길을 막는 ‘그림자’들을 무참히 도륙한다.
그것들의 징글징글한 숫자 때문에 이제는 상대하는 게 익숙해진 덕일까. 그들의 전진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 듯도 보였다.
“앞에서 왼쪽입니다!”
그렌이 외쳤다. 왼쪽 편에 서있던 지크가 갈림길에 도착한 후 옆쪽을 크게 베었다.
‘그림자’ 몇몇이 베이고 공간이 생겼다. 지크는 그 공간에 몸을 집어넣었다. 일행이 그를 따랐다.
“다음은 오른쪽!”
이번엔 그렌이 통로를 뚫었다.
그렇게 몇 번 정도 갈림길을 지났을 때였다. 통로 끝으로 막다른 길이 보였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든 건 아니었다.
“저기가 입구입니다!”
일행이 벽으로 위장되어 있는 입구에 접근했다.
그그그긍!
비밀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일행은 긴장된 눈으로 문 너머를 쳐다봤다.
혹시 그쪽까지 ‘그림자’들이 들어차 있다면 관광용으로 개방된 곳에도 ‘그림자’가 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수가 없다면 도시에까지도.
하지만 다행히도 문 저편으로 보이는 것은 유적 특유의 벽과 텅 빈 공간뿐이었다.
일행은 급히 문을 나왔다. 그리고 혹시 따라 나올지 모를 ‘그림자’들을 경계했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스녹이 문을 나온 순간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스르륵!
그것들은 형태가 무너져 내리더니 곧 마치 메마른 대지에 스며드는 빗방울처럼 바다, 벽, 천장으로 사라졌다.
일행은 혹시 다시 ‘그림자’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뒷걸음으로 문과 거리를 뒀다.
하지만 문이 완전히 닫힌 그 순간까지 ‘그림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끝났군.”
지크가 윈두르를 등 뒤에 맸다. 다른 일행도 긴장을 풀었다.
지크는 일행을 둘러봤다. 격한 전투를 증명하듯 모두 몸에 상처 한두 개 씩은 달고 있었다.
지크가 석상을 상대하는 동안 전면에서 길을 뚫던 한스는 피가 흥건했다. 그러나 깊은 상처는 없었다. 모두 생채기 수준이었다.
“일단 피부터 씻자고. 옷 같은 것도 갈아입고. 이 꼴로 나갈 순 없으니까.”
지크 자신도 상처를 갖고 있었기에 포션을 꺼내 상처에 부었다. 다른 일행들도 각자 포션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렌과 브라우닝의 눈치를 힐끔힐끔 봤다. 아무래도 낯선 일행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크는 그들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지크가 그러자 다른 이들도 각자 자기 할 일을 했다.
물이 가득 담긴 통과 천을 꺼내 피를 닦아내기 시작한다. 옷이 손상된 이들은 여벌옷을 꺼내들었다.
“저기요!”
천에 물을 묻혀 피가 튄 피부를 닦고 있던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무시당한 게 기분 나쁜지 인상을 쓰고 있는 브라우닝이 보였다.
“뭡니까?”
“…….”
성이 나 한마디 하긴 했지만 브라우닝은 할 말이 궁했다. 여기서 자신들을 왜 무시하냐고 화를 내기에도 뭐 한 것이었다.
“혹시 이거 필요하세요?”
옆에 있던 한스가 새 물통과 천을 내밀었다. 포션은 비싸서 차마 권하진 못했다.
고대 유적을 싹 털어서 돈은 넘치도록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크가 준 돈이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타인을 위해 낭비할 순 없었다.
브라우닝이 조금 더 당황했다. 무시 이후에 친절이라니. 오히려 짜증을 낸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때 그렌이 나섰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렌이 자신의 마법 상자에서 물통과 천을 꺼내 보였다. 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여분의 그것들을 다시 집어넣었다.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의 몸이 전부 깨끗해졌다. 눈에 띄게 옷이 손상된 한스는 옷까지 전부 갈아입었다.
“끝났냐? 그럼 가자.”
“잠깐만요!”
그렌의 부름에 지크의 발이 멈췄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렌을 바라봤다.
“…이번엔 용건이 있는 거겠죠?”
브라우닝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뒤로 살짝 당기며 대신 그렌이 앞으로 나왔다.
“일단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그렌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저희도 도움을 얻었으니까요.”
지크가 가볍게 손을 잡아 흔들었다.
“그 말을 하려고 부르셨습니까?”
“저 숨겨진 구역엔 어떻게 들어가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지크는 피식 웃었다.
“우연히요.”
“…우연히…라고 하셨습니까?”
“네, 아~주 우연히 들어갔죠.”
그렌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옆의 브라우닝도 터무니없다는 시선이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지크는 당당히 팔짱을 끼고 그렌을 쳐다봤다.
“그럼 저 안에서 나온 검은 것들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렌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날카로워졌다.
지금 그것은 그렌이 지크를 붙잡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도 저런 이상한 ‘그림자’들을 보는 건 많은 세월 속에서도 처음이었다.
“전혀요. 갑자기 튀어나와 저희도 상당히 놀랐습니다.”
고대 제국 황제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있던 나무와 윈두르의 공명이 원인인 것 같지만, 지크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솔직히 지크가 아는 것도 딱 거기까지일 뿐, 자세한 것은 알지 못 했다.
“그 말 정말이에요?
브라우닝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대놓고 지크 일행을 수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이고말고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고요?”
초면의 상대에게 분명히 무례한 언동이다. 하지만 평소 말렸을 그렌도 그녀의 태도를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그만큼 그는 정보가 급했다.
지크가 그녀를 쳐다봤다. 브라우닝도 지지 않고 마주 바라봤다.
지크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이 건방진 녀석을 어떤 말로 요리할까 생각할 때, 먼저 나서는 자가 있었다.
“무례하네요.”
라일라였다. 머리에 튀긴 피를 닦아내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을 휙 넘긴 그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신들에게 우리를 신문할 권리라도 있나요?”
아름다운 눈이 한기를 머금고 브라우닝을 쳐다본다.
그 박력에 브라우닝이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브라우닝도 만만치 않았다.
“정체불명의 유적에서 이상한 것들을 봤는데, 그때 우연찮게 당신들이 그곳에 있었잖아요? 의심하는 게 당연하죠.”
“그 말에 따르면 당신들도 충분히 의심 가능한 것 아시죠?”
“우리는 정말로 우연히 찾은 것뿐이에요!”
“우리도 그래요. 당신들은 믿지 않는 것 같지만요. 그럼 우리도 당신들을 믿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브라우닝이 입술을 깨물었다. 억울한 것 같았다.
그녀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정말로 그렌의 손에 이끌려 유적을 헤맸을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열린 비밀 문을 통해 숨겨진 구역으로 들어간 후, 지크 일행을 만났다.
그녀의 입장에서 지크 일행은 고작해야 조금 더 관광을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도시가 정한 규칙을 어기고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온 자들.
경험은 무척 적지만 정의감이 강한 그녀로서는 좋게 보기 힘든 자들이었다.
물론 규칙을 어긴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몬스터의 순찰이라는 선의를 가지고 한 게 아니던가.
게다가 그조차도 그녀가 믿고 따르는 그렌이 아니었다면 절대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무척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 성격이 대답을 할 수 없게 했다.
원래 고지식하고 정의감이 강한 자일수록, 그게 설령 무척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니까.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런 그녀가 규칙을 무시하고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왔을 만큼 그렌을 믿고 따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브라우닝, 그만해.”
뒤늦게 그렌이 나섰다. 분노와 자기혐오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그녀를 등 뒤로 숨긴다. 그리고 지크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신 사죄드리죠.”
“역으로 물어보건데, 당신들도 저 ‘그림자’들과 상관이 없죠?”
“물론입니다.”
“그럼 됐어요. 우연히 발동한 유적의 방위 시스템 정도로 서로 이해하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라일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묻고 싶은 말을 일행에게 떠넘기고 마치 자기는 아니라는 것처럼 뒤편에 있다가,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일행을 대신해 대신 사과한다는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았으면 해요. 솔직히 그게 더 불쾌하거든요. 치졸해보이기도 하고요.”
“…명심하죠.”
뭐라 소리치려는 브라우닝을 말리며 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라가 등을 돌렸다. 뒤에서 혹시 큰 다툼으로 번지지 않을까 긴장하던 일행이 안도했다. 물론 그 안에 지크는 없었다.
지크 일행은 그렌 일행을 놔두고 이동했다. 이야기 소리가 들린 것은 그렌 일행과 헤어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였다.
“설마 네가 나설 줄은 몰랐다.”
지크가 그의 곁에서 걷고 있던 라일라에게 말했다.
“네 성격에 당장 들이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싸움을 헤치고 나왔는데 또 전투라고? 그건 사양이야.”
게다가 상대는 그 그렌 제너드다. 싸우는 폼을 보아하니 아직 그녀의 지식 속마냥 압도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숫자 차이도 있으니 지크 일행이 유리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미래에 최고의 용사 칭호를 받는 사람이다.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유는 더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쪽이 진짜 이유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짜증나잖아. 사람을 무슨 범죄자 취급을 하고 있어.”
“날 대신해서 화를 내 준 거냐?”
지크가 우스갯소리로 말을 했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때문에 어조도 농담 투였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의외였다.
“당연하지. 네가 그런 소리를 듣고 있는 걸 보고 있으라고?”
“…….”
정말로 의외의 말이었던 듯, 지크는 그답지 않게 바로 대답하지 못 했다.
“…나를 위해 화내줬다고?”
“그게 뭐.”
라일라가 지크를 뚱하게 바라봤다.
“이래봬도 난 너한테 꽤 크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거든? 적어도 네가 허튼 소리로 욕을 먹는다면 화를 내줄 만큼은 말이야.”
“그건 고마운걸.”
지크는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허튼 소리는 아니었잖아?”
“그건 맞지.”
변명처럼 관광하러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온 건 아니고 우연히 숨겨진 구역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림자’의 원인도 지크, 정확히 말하면 지크의 무기인 윈두르일 가능성이 높다.
지크와 라일라는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 좋아. 그 치들은 모를 테니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자고.”
“어차피 사실을 증명하지 못 하면 뭐든 허튼 소리일 뿐이니까.”
그리고 그들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 * *
지크 일행이 떠난 후 그렌 일행은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지크 일행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길 원한 것이다.
그리고 브라우닝이 화를 삭일 시간도 필요했다.
“참아, 브라우닝. 저 여자 말대로 우리도 떳떳한 건 없어.”
“…그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래도 저 자들이 수상하다는 건 변함이 없잖아!”
“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도 그렇지.”
“오히려 그게 더 분하다고!”
그 때문에 더 강하게 나가지 못 했다. 그리고 정보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자존심이나 의심 때문에 지크 일행을 몰아붙인 건 아니었다.
그녀가 불안하게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비밀 문을 쳐다봤다.
“저 ‘그림자’들, 도시에 해를 끼치진 못하겠지?”
“가능성은 낮아 보여. 저 문 밖으로 나오지 못 하잖아.”
“그래도 불안해. 안 그래도 몬스터들에게 한 번 습격을 받았던 도시잖아. 새로운 몬스터가 땅속에서 솟아오른다면 이 도시에 사는 것 자체를 불안해 할 거야.”
미숙함과 성급함이 앞서는 그녀지만 어디까지나 기저에 깔려있는 것은 엄연한 선의였다.
그것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선의.
그렌은 그런 그녀를 보고 기분이 좋았다. 이 아이는 ‘루벨라’와는 달리 ‘타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심하는 건 좋지 않은 짓이야.”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녀가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아직 의심이 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다음에 만나면 사과부터 해야겠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