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성공적으로 입구의 통로로 진입한 지크 일행이었지만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석상의 크기가 크기인지라 통로로 들어올 순 없겠지만 뭔가 이상한 방법을 써 오거나 아니면 무식하게 벽을 때려부수고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다행히 석상은 걱정할 필요 없겠어.’
지크는 통로에서 공동 쪽을 쳐다보고는 생각했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올 기세로 추격하던 석상이 그들이 통로로 진입하는 즉시 움직임을 멈추더니, 곧 등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한숨 놔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위기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고이 그들의 추격을 포기한 석상과는 달리 그림자 놈들은 통로에까지 득실거리고 있었다.
공동에 있던 놈들도 통로로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왔다.
‘여기선 조금 더 귀찮겠군.’
그림자들은 말 그대로 통로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바닥만이 아니다. 지형을 무시하는 녀석들의 특성상 벽과 천장에 붙어 일행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서걱!
공중에서 뛰어드는 그림자 하나를 베어냈다.
녀석이 허공에서 터졌다. 그러나 다른 그림자가 방금 녀석의 빈 자리를 메웠다.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거나 벽에서 뛰어드는 등 녀석들은 공중에서까지 마구 덤벼들었다. 그나마 땅 속을 이동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뭐, 그래도.’
지크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덤벼들던 그림자 셋이 단칼에 베여 사라졌다.
‘이 정도는 쉽지만.’
석상이 버거운 상대였을 뿐 이렇게 쪽수만 믿고 덤비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녀석들을 전부 처리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조심해!”
라일라가 크게 소리치고는 지팡이를 들었다. 그녀의 지팡이에서 섬뜩한 뇌전이 번뜩였다.
콰르르르릉!
섬광이 통로를 휩쓸었다. 좁은 곳이라 천둥의 굉음이 고막을 직격했다.
일행은 인상을 썼다. 라일라가 번개 마법을 준비한 걸 깨닫고 귀에 마력을 옮겨 방어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모든 소리를 차단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간보다 청력이 좋은 엘프인 레오나는 한층 더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전면의 그림자들이 싹 쓸려나갔다. 방어력도 약하고 뚜렷하게 피할 곳도 없던 곳에 밀집해 있던 그림자들은 라일라의 번개를 견뎌낼 힘이 없었다.
‘역시 조건만 맞으면 마법만큼 확실하게 적을 쓸어버리는 방법도 없다니까.’
그 섬멸력만큼은 지크도 인정했다.
일행은 서둘러 움직였다.
앞의 그림자들을 전멸시키긴 했지만 벌써 새로운 그림자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움직여놔야 한다.
지크는 앞장서서 그림자들을 베었다. 석상이라는 최대의 위협이 사라진 이상 그는 그림자들에게 그의 강대한 힘을 아낌없이 쏟아부을 수 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문까지 도착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냥 열리진 않는군.’
나갈 때는 편하게 자동적으로 열리게끔 만들어 놓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크는 이 문을 만들어 놨을 과거 기술자들의 센스없음에 한탄했다.
‘여긴가.’
바깥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 안쪽에는 또 틈이 있었다. 지크는 방어를 잠시 일행에게 맡겨놓고 윈두르를 틈에 꼽았다.
그그긍!
들어왔을 때처럼 주변 벽이 원형으로 돌아간다. 반 바퀴를 돌리자 주변 벽이 밀려 사라졌다. 지크 일행은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전투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걱정이 현실이 됐군.’
바깥에도 우글거리는 그림자들을 보며 지크는 혀를 찼다.
‘설마 도시에도 이 녀석들이 우글거리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비올루윈이라는 도시는 진짜로 재수 없는 도시일 터였다. 하지만 아직은 모른다.
‘일단은 나가봐야 알겠지.’
지크는 계속해서 일행을 이끌고 전진했다.
“지크!”
“들었어.”
지크가 라일라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앞 통로를 쳐다봤다.
바로 앞에 보이는 갈림길 저편에서 그들의 것과는 다른 전투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누구지?’
여전히 유적은 그의 감각을 흐트러트리고 있었기 때문에 기척을 느끼기 힘들었다.
접근해서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투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보니 그들과 마주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듯싶었다.
“응?”
“어?”
두 무리는 정확히 갈림길에서 마주쳤다.
서로를 보고 그들, 지크 일행과 그렌 일행은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저 녀석들이었나.’
유적에서 한 번 마주쳤기에 그럴 확률도 있지 않을까 생각은 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가능성은 상당히 높았다.
‘토르니움을 찾았군.’
지크는 그렌이 들고 있는 검을 쳐다봤다. 익숙하기 그지 없는 검. 지크의 애검이었던 토르니움이었다.
‘에스텔레이드 대용인가?’
성검 대신 마검을 든 태양의 용사 그렌 제너드라니.
지크의 입장에서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아, ‘태양의 용사’ 타이틀도 한스에게 빼앗겼던가?’
물론 고작해야 비올루윈에서나 통하는 한스의 용사 칭호와 국제적으로 인정 받았던 그렌의 용사 칭호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렌의 ‘태양의 용사’ 칭호도 에스텔레이드의 힘이 컸던 걸 감안하면 정말로 용사 칭호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재미있는 상황에서 만나는군요.”
지크가 그림자 하나를 베며 그렌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습니까? 전 썩 유쾌하지 않은데 말이죠!”
그렌도 토르니움으로 ‘그림자’를 베어내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가시 돋친 대답을 지크는 능글맞게 받아넘겼다.
“인생사 어떤 사건이든 다른 생각을 하는 건 흔한 일이죠.”
두 집단이 가까워졌다.
“일단 그쪽도 탈출을 원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협력하죠.”
지크는 그렌에게 협력의 손을 내놓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루벨라와 협력을 하고 레오나와는 같이 다니기까지 하고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익숙해지다보니 거리낌마저 없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사정을 들어야겠습니다.”
“사정이라. 뭔 놈의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가고 나서 하든 말든 합시다.”
그렌이 뭘 물을지 대충 예상은 갔지만 지크는 그것도 대충 넘겼다.
꿀리는 일은 없고, 있다 해도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지크 일행은 그렌 일행과 합류했다.
안 그래도 강하던 두 무리가 합세하니 움직임은 더욱 쉬워졌다. 단 한 번도 움직임을 맞춰보지 않았지만 각자의 실력이 출중하니 나름 볼 만한 파티가 완성된 것이다.
지크와 그렌이 앞장섰고 브라우닝이 그 뒤를 받쳤다. 한스는 근접전이 약한 라일라와 레오나를 보호하며 움직였다.
라일라와 레오나가 공격을 가해 전위의 부담을 줄여줬으며 스녹이 맨 후미를 맡았다.
퍼엉! 퍼엉!
한 번에 두 마리의 그림자를 베어내며 지크가 흘끗 옆에서 싸우는 그렌을 쳐다봤다.
‘잘 싸우긴 하는데….’
회귀 후, 그렌의 솜씨를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실력은 분명 뛰어났다. 하지만 그의 회귀 전 실력을 생각하자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게 사실이었다.
‘갑자기 실력이 폭발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거야 그럴 수도 있는데.’
애초에 지크 자신도 그런 경우가 아니던가.
‘그런데 저 실력으로 토르니움을 사용할 수 있던가.’
토르니움은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에게는 얌전하게 힘을 빌려 주지만 그 이하의 인간에게는 굉장히 흉포하게 군다. 한데, 그 토르니움을 휘두르고 있는 그렌의 실력은 뭔가 어설펐다.
‘하지만 부작용은 없는 듯한데.’
그러나 그의 생각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나가고 물어보지, 뭐.’
대답을 듣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토르니움은 더 이상 그와 관련된 검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그렌, 토르니움보다 더 그의 흥미를 끄는 존재가 있었다.
‘라라 브라우닝.’
새빨간 머리를 휘날리며 검과 방패를 놀리는 그녀의 모습에 지크는 적잖이 놀랐다.
‘이 녀석이 이렇게 강했나?’
지금 여기서 순수한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지크, 라일라를 제외하고 그녀가 가장 강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유려하게 흐르는 검술이 눈에 띄었다.
‘이런 놈이 왜 그 무식하게 큰 방패를 들고 설친 거야?’
방패를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척 보기에도 그녀의 검의 재능은 뛰어났다. 방패도 곧잘 사용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의 보조 수준일 뿐이다.
‘저 녀석이 방패대신 검을 들었다면 더 골치 아팠을 텐데.’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파티의 밸런스가 깨졌으려나.’
그렌 파티는 어디까지나 파티로서 지크를 타도했다. 일원 하나하나도 강했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극강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그 상태에서도 지크를 타도할 때 상당한 고전을 했던 걸 생각하면 라라 브라우닝의 방어가 사라지는 것은 큰 타격일 것이다.
‘그런데 그건 결과론이고.’
이유는 있겠지만 검 대신 방패를 든 것이 그녀의 실력을 낮추게 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생각도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제 사정이지.’
그냥 잠시 관심이 갔을 뿐이다. 지크는 다시 전방에서 그림자들을 쳐죽였다.
상대를 관찰하던 건 지크만이 아니었다. 그렌도 흘끔흘끔 지크가 싸우는 모습을 살폈다.
나뭇가지처럼 생긴 괴상망측한, 검인지 아닌지조차 의심스러운 무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그림자를 해치운다. 그 속도와 힘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지금의 자신은 감히 대적할 엄두조차 못 내는, 그런 수준.
‘역시 실력이 올랐어!’
그가 아는 지크는 급격히 강해지는 자이긴 했지만 이 시기에 이 만큼의 실력을 갖추진 않았다.
‘그것도 예상보다도 더!’
설혹 자신이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힘을 키워간다 해도 나중에 지크의 힘을 감당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젠장!’
그렌의 검이 거칠어졌다. 여전히 빠르게 그림자들을 도륙하지만 중심축이 흔들리고 자세가 커졌다.
자연히 빈틈이 나왔다.
“윽!”
그의 검을 피한 그림자의 팔이 낫의 형태로 변해 목덜미에 날아왔다.
검을 휘수해 방어하기에는 늦었다. 자칫하다간 즉사다.
그가 급히 몸을 꺾었다. 간신히 낫의 궤도에서 목을 빼내는데는 성공했지만 대신 어깻죽지가 노출됐다.
직격한다면 아마도 뼈까지 잘려나가는 큰 부상을 감수해야 하리라. 그러나 일단 죽음을 면해야했다.
서걱!
한 줄기 섬광이 그렌을 공격하던 그림자를 갈랐다.
그림자는 맥아리없이 터져 허공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그렌을 향하던 공격도 무효화됐다.
“그렌! 괜찮아?”
그의 위기를 본 브라우닝이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렌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를 구해준, 옆에서 다른 그림자를 조각내고 있는 지크를 쳐다본다. 지크도 그를 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그 한마디를 하고 지크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빌어먹을!’
그렌도 다시 토르니움을 휘둘렀다.
다가오던 그림자가 터져나갔다. 확실히 정신을 조금은 차린 것인지 그의 움직임은 원래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검에 들어간 분노는 아까보다도 훨씬 더 불어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