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문을 연 지크 일행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정말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지하에 이런 곳이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공동. 어쩌면 지상에 있는 도시인 비올루윈보다 눈앞의 공동이 더 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높이도 높았다. 천장까지 닿는 건물을 세운다면 족히 30층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더욱 놀라운 점은 이 공동에 기둥 같은 것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의 지하 공간이 기둥도 없이 버틸 수 있을까.
‘분명 어떤 마법적 처치가 돼 있겠지.’
지금도 딛고 있는 바닥에서 계속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게다가 빛 하나 없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마력과 마법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지금까지의 유적과는 다르게 이곳은 놀랍게도 천장에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천장에 박힌 큼직한 돌들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또한 유적에 흐르는 마력의 영향인 듯싶었다.
지크 일행이 나온 곳은 공동에서도 거의 천장에 닿을 듯한 높이에 있는 곳이었다.
옆쪽으로 난, 벽에 붙어 있는 계단이 지그재그를 그리며 까마득한 바닥까지 뻗어 있었다.
지크는 일행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난간 같은 건 없었지만 계단의 폭이 넓어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았다.
일행은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공동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커다란 석상들이었다.
최고 수준의 조각가가 충분한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듯 그 석상들은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았다.
크기는 성인 평균 키의 일곱 배 정도. 석상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대까지 포함하면 더 높았다.
그런 석상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도 없이 많았다.
지크 일행은 바닥에 도달했다. 아래에서부터 올려다보니 석상의 커다란 크기가 새삼 느껴졌다.
“우와아아!”
레오나가 눈을 반짝인다. 한스와 스녹도 상당히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게 보였다. 그에 비해 라일라의 시선은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그것과 비슷했다.
‘자신의 정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유적이니 당연하지.’
그러고 보니 자신의 등에 메인 윈두르가 떠올랐다.
지크를 이곳으로 안내하고는 열쇠 같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 후, 윈두르는 다시 새침을 떠는 것처럼 본 모양으로 돌아와 지크의 등에 얌전히 메어 있었다.
‘윈두르는 확실히 이 유적과 확실히 관련이 있는 것 같고, 라일라도 이 유적과 관련이 있다면 윈두르와 라일라도 뭔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둘 다 유적과 관계가 있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이 유적을 뒤져봐야지.’
일행들은 바로 움직이지 않고 지크의 의견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가까운 곳에 있는 것부터 살펴 볼까.”
지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석상을 가리켰다.
석상의 발치에 오니 목을 완전히 뒤로 꺾지 않으면 석상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게 됐다.
“왕일까요?”
한스의 말대로 석상은 누가 봐도 왕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래로 꽂아 넣은 검 자루 위에 손을 포개어 올렸고 몸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망토는 조각가의 실력에 힘입어 고급스러운 형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물론 망토 안쪽에 있는 다른 복장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석상이 왕이라는 걸 보여주는 건 머리에 쓰고 있는 화려한 왕관이었다.
“만약 이곳이 레오나가 말한 고대 제국의 유적이 맞다면 왕이 아니라 황제겠지.”
“아, 그렇군요.”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라일라는 석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에 가까이 붙었다.
“이거 그냥 받침대가 아니네.”
“그렇군. 받침대에 굳이 문이 달려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지크의 말대로 받침대에는 석문이 떡 하니 달려 있었다.
‘받침대가 아닌 석실인가. 뭐, 용도는 대충 예상이 가긴 하군.’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석실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안을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지크는 일행에게 뒤로 물러나라 손짓했다. 보통 무덤에 함정 같은 걸 많이 파놓지 않던가. 여기라고 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덜컥!
의외로 문은 쉽게 열렸다. 내부를 살폈다. 함정 같은 게 있진 않았다.
지크는 일행에게 이번엔 괜찮다는 손짓을 하고 석실로 들어갔다.
석실의 내부는 외부의 것들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았다. 성인 10여 명이 누우면 가득 찰 것 같은 방.
그 중앙에 어떤 물건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역시.’
지크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돌을 깍아 만든 길쭉한 형태의 네모난 물건. 관이었다.
“역시 무덤이었네.”
지크의 곁에 서며 라일라가 중얼거렸다.
“이 석상의 주인일까요?”
“아마 그러지 않을까?”
스녹과 한스가 의견을 교환한다. 지크도 둘과 같은 의견이었다.
지크는 관의 곁으로 갔다.
의외로 관은 평범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단순한 문양조차 없이 밋밋한 표면이 바깥의 거대함과 괴리를 일으켰다.
라일라가 말했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던 걸까?”
“그건 아닐 거다. 아무리 생전에 강대한 권세를 누리더라도 죽은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거나, 굳이 관까지 화려하게 만들지 않아도 바깥의 거대함만으로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기에 아무 문제 없다거나, 그런 쪽이겠지.”
“그러네.”
그녀는 지크의 말에 순순히 긍정했다.
지크는 관 뚜껑에 손을 댔다.
“열게?”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호기심 때문이라면 몰라도 지크가 굳이 관을 열 필요는 없다. 이미 정신은 완성되어 있고 실력이 완성되는 것도 시간만이 문제인 그에게 고작 고대 황제라 추정되는 자의 관 뚜껑 열어젖히는 게 필요한 일일 리가.
나 때문이다. 라일라는 지크의 의도를 짐작했다.
이번에도 지크는 손짓으로 다른 자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그그긍!
돌과 돌이 마찰하는 거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쩌면 수천 년이란 시간 동안 봉인되어 있었을지도 모를 관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함정은 없군.”
하지만 어조가 미묘하다. 일단 함정은 없다고 하니 일행들이 관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관 안쪽을 보았을 때 일행은 크게 놀랐다.
“어, 어? 사, 살아 있는 사람?”
“아니, 죽었다.”
놀라 외치는 스녹에게 지크는 냉정하게 말했다.
라일라가 관 옆에 무릎을 꿇어 앉았다. 그리고 관 안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 같은 노인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봤다.
“숨을 쉬지 않아. 정말로 그냥 시체야.”
“아마도 이 유적에 흐르는 마력의 영향이겠지. 입구의 벽화를 유지시키고 있던 것과 같은 류의 것 말이야.”
지크가 시체의 턱을 붙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다. 정말로 방금 죽은 자처럼 목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얼굴의 안색도 좋았다.
“얼굴을 보면 이 석실 위에 있는 동상의 인간이 확실한 것 같아.”
석상이 무척이나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지크 일행은 석실에서 나와 다른 곳들도 돌아보기 시작했다. 석상들은 모두 똑같았다.
받침대 아래로 공간이 존재했고 그곳에 관이 놓여 있다. 그리고 관 안에 든 시체들 모두 바로 직전에 죽은 것 같은 생생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받침대의 석실 안 한 쪽 벽면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글자였다.
고대의 글자인 듯 알아볼 수는 없는 글자였지만 그것만큼은 석실마다 전부 달랐다.
라일라는 그것이 관에 안치된 인물의 일대기가 아닐까 추측했다.
몇 개의 석실을 확인한 지크 일행은 더 이상 다른 석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른 것들과 똑같은 형태일 게 뻔했으니까.
다만, 라일라가 석실 벽면에 적혀 있을 일대기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혹시 아는가. 거기에 라일라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을지.
“일단 석실을 전부 조사한 다음에 해.”
당장이라도 탁본을 뜨려는 걸 지크가 말렸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자신의 마법 상자와 지크가 제공한 거금이 생기자 당장 연구에 관련된 것들을 구매한 그녀였다.
라일라가 실망했지만 지크의 말에도 일리가 있기에 물품을 마법 상자 안에 도로 넣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다.
그들은 석상 사이사이를 지나쳤다. 그러다 곧 어떤 석상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른 석상들과 달랐다. 가장 뒤쪽에 위치한 그 석상은 다른 석상들보다 적어도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자세도 달랐다. 이 석상은 힘차게 앞으로 칼을 뻗은 모습이었다.
어느 누가 봐도 특별한 석상.
“이 녀석이 여기 있는 자들 중 가장 잘난 자인가 본데.”
지크가 석상의 부리부리한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위치나 크기를 보면 뭐, 개국을 한 황제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아, 그럼 ‘황금 황제’일 거야.”
레오나가 말했다.
‘이건 또 촌스러운 별명이 나왔는데.’
지크가 레오나에게 시선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고대 제국을 세운 사람. 그리고 고대 제국의 전성기를 연 사람. 제국의 인물들은 그 사람을 일컬어 ‘황금 황제’라고 칭했다고 들었어.”
“그 정도면 충분히 특별대우를 할 만하지.”
일행은 ‘황금 황제’의 석실로 들어 갔다. 특별한 석상이니 혹시 다른 석상들과 뭔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저 석실의 크기가 조금 클 뿐, 똑같이 밋밋한 관짝 하나가 있는 것이 전부였다.
“여기도 별것 없군. 욕심도 없으셔라.”
관까지 열어보고 지크는 혀를 찼다. 라일라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는커녕 무언가 흥미로운 것도 없었다.
‘진짜 황실, 혹은 그 비슷한 권력자의 공동묘지일 뿐인 모양이야.’
지크는 석상들에 흥미를 잃었다.
‘남은 건 피라미드뿐인데.’
레오나의 말에 따라 대충 ‘황금 황제’라고 이름 붙인 석상의 뒤편으론 커다란 피라미드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위로 놀랍게도 나무처럼 생긴 것이 자라 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별 흥미가 없는 모양이군.’
라일라는 석실에 새겨져 있는 알 수 없는 글자를 탁본 뜨는 것에 더 관심이 팔리는 모양이고 한스와 스녹도 고대 제국의 황제라고 추측되는 석상들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피라미드에 관심이 있는 건 레오나뿐인가.’
아마도 엘프의 특성상 피라미드 위에 있는 나무에 흥미가 갔을 것이다.
지크는 손뼉을 쳐 일행의 주의를 끌었다.
“나는 피라미드 위를 살펴보고 올 테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놀고들 있어.”
그리고 지크는 피라미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예상대로 그를 따라오는 건 레오나뿐이었다.
라일라는 바로 ‘황금 황제’의 석실로 들어갔고 한스와 스녹은 석상의 모습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언뜻 들리는 바로는 생긴 걸로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는지 추측을 하는 것 같았다.
“이 위에 있는 나무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지크가 물었다. 레오나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음, 모르겠어. 너무 멀리서 봐서 그런지 몰라도 뚜렷이 떠오르는 게 없어.”
엘프인 레오나가 모른다면 지크도 당장 알 방도가 없다.
‘일단 가까이서 한번 봐 보자고.’
둘은 순식간에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올라섰다.
“우와아아!”
레오나가 소리쳤다. 지크도 감탄했다. 멀리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나무의 크기는 무척이나 컸다.
형태도 평범하지 않았다. 보통 몸통으로부터 사방으로 가지를 뻗는 일반 나무와는 달리 지면부터 각자 가지가 솟아 이리저리 얽혀 자란 느낌이었다. 게다가 얇은 가지 같은 것들이 곳곳에 솟아 축 늘어져 있었다.
지크가 물었다.
“어떤 나무인지 알겠어?”
“으음, 모르겠어.”
‘모르는 건가.’
지크가 가볍게 실망했을 때 레오나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거 나무 몸통 맞나? 생긴 게 나무의 몸체보다는 뿌리 같은데.”
지크의 시선이 나무 아래쪽, 피라미드의 표면을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