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지크가 한 걸음 나선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개의치 않고 또 한 발을 내딛었다.
라일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크의 등을 쳐다본다. 하지만 붙잡진 않았다. 이미 지금껏 계속 말을 해왔으니까. 더 이상은 참견일 뿐이다.
저벅!
지크의 발이 토르니움 지척에서 멈췄다.
토르니움의 모습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검은 검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밋밋한 날밑과 자루. 그것을 들고 온갖 적들과 대항한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그러나 지크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좋아, 이젠 수상한 곳을 찾아보자.”
지크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미혹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라일라는 안도했다.
지크가 토르니움이 있는 방을 나선다. 그 발걸음엔 망설임 같은 것도 없었다.
일행이 하나둘 씩 지크의 뒤를 따랐다. 에스텔레이드와 동급의 마검이라는 설명에도 그 누구도 토르니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스녹이 방에서 모습을 감췄고, 토르니움이 있는 방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 * *
“자, 그럼 어디서부터 찾는다.”
지크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과장되게 주변을 둘러 봤다. 눈앞으로 유적의 통로가 쭉 뻗어있다.
뭘 찾는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저번 유적처럼 어떤 비밀 통로가 나오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할 뿐이다.
“여기 넓어?”
“상당히.”
지크의 물음에 라일라가 답한다.
이 유적의 통로를 쫙 꿰고 있을 그녀가 하는 말이다. 발품을 꽤 많이 팔아야 한다는 뜻과 다를 바 없었다.
‘뭐, 시간도 많은데 천천히 돌아볼까.’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뭘 찾진 못 하더라도 라일라가 납득할 때까지는 돌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걷는 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뭔가 단서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문득 지크의 생각이 윈두르에 미쳤다. 그는 등 뒤에서 윈두르를 꺼내 들었다.
여전히 괴상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검. 지크가 편한 형태로 변할 수 있지만, 별 다른 용건이 없다면 그 형태를 변하려고 하지 않는, 고집스럽고 어처구니없는 검이기도 했다.
‘예전에 이 녀석이 길 안내를 해 준 적이 있었지.’
정확히 말하면 지크의 손가락에서 튀어나온, 윈두르의 파편이었던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그랬었다.
‘이 녀석이 뭔가를 해줄 수 있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그 파편이 에스텔레이드를 이용해 지크와 라일라를 공간 이동시키고 길 안내를 해주었기에 이곳에서 윈두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어처구니없는 말은 내뱉은 건.
“여기 뭔가 찾을 만한 건 없냐?”
“…뭐 하는 거야? 이젠 검과 말하는 법까지 익힌 거야?”
옆에서 라일라가 기막혀 한다. 다른 사람들도 지크를 기묘하게 쳐다봤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가 이 녀석을 찾은 곳이잖냐. 예전의 경험도 있고, 워낙에 특이한 놈이니 한번 말해 본….”
지크가 말을 끊었다. 그를 포함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윈두르의 검 끝을 향했다.
스으으윽.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고 실제로도 그런 윈두르의 검신이 마치 한쪽 부분만 극히 가열한 금속이 늘어지듯 구부러졌다.
“…….”
“…….”
“…….”
“…….”
“…대체 이 녀석은 뭐야?”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지크의 말만이 정적을 깼다.
모습은 이상하게 생겼지만 성능이 무척이나 좋기에 애용하고 있는 검.
그러나 지크는 정말로 이 녀석의 정체에 대해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 * *
지크를 선두로 일행은 걸었다. 갈림길이 나오면 윈두르는 재주 좋게 검 끝을 틀었다.
“…저 검은 뭐야?”
“그, 글쎄요.”
레오나의 질문에 스녹은 명확히 대답해줄 수 없었다.
꽤나 특이한 모양의 검. 유적에서 지크가 갑자기 들고 왔다는 것밖에는 모른다.
그저 에스텔레이드보다 높은 성능을 자랑하고, 그래서 지크가 애용하는 검이라고밖에.
‘모양도 변화시킬 수 있었지.’
하지만 정작 주인인 지크조차 잘 모르는 검의 정체를 스녹이 알 수 없었다.
“지크는 신기한 것들과 관련이 많은 것 같아.”
그 말에는 스녹은 물론 그들보다 조금 앞을 걷고 있던 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한스는 지크가 가문을 나왔을 때부터 동행한 만큼 레오나의 의견에 한층 더 동의했다.
스윽.
지크의 발이 멎었다. 동시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췄다.
윈두르의 검신이 옆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그러나 윈두르가 가리킨 곳은 통로가 아닌, 유적의 벽이었다.
사람들은 동시에 한 가지를 떠올렸다.
‘비밀통로!’
지크는 벽을 살폈다.
‘틈이 있군.’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의 작은 틈이었다. 그러나 길이는 길어 사람의 팔뚝 길이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하지?’
이 유적에 들어오는 통로의 문은 지크가 다가갔을 때 자동적으로 열렸었다. 하지만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벽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크는 벽을 두드려봤다.
둔탁한 충격음이 들렸다. 적어도 안이 비거나 한 소리는 아니다.
‘위장인가. 아니면 이 녀석이 그냥 맛이 간 건가.’
지크는 윈두르를 쳐다봤다. 조금 흔들어봤다.
‘응?’
윈두르의 검 끝이 움직였다. 하지만 다른 곳을 가리킨 건 아니다. 검 끝은 계속 같은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위로 움직이면 검 끝이 아래로 내려가고, 아래로 움직이면 위로 올라간다.
지크의 시선이 검 끝이 향하는 곳을 향했다.
‘틈의 중앙이군. 방향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저 지점을 가리키는 건가?’
지크는 윈두르가 제 모습을 찾도록 검을 수평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조용히 틈 사이로 검을 찔러 넣었다.
마치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듯, 윈두르의 검신은 틈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갔다.
철컥!
벽 뒤에서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지크는 일행을 돌아봤다. 한 명 씩 시선을 맞춘 후, 다시 유적의 벽을 보며 검을 돌렸다.
끼긱! 끼기긱!
일정 부분의 벽이 원 형태로 회전한다. 지크는 계속해서 검을 돌렸다.
철컥!
검이 반 바퀴를 회전했을 때, 다시 한 번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스윽! 스윽! 스윽!
벽을 이루고 있던 벽돌 하나하나가 뒤로 빠지더니 옆으로 모습을 감췄다. 지크 일행의 앞으로 뻥 뚫린 구멍 하나가 나타났다.
“어디로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목적했던 건 찾은 것 같군.”
지크는 슬쩍 통로 안을 들여다봤다.
“진짜 제대로 찾은 것 같은데?”
지크가 안으로 들어섰다.
비밀 문 너머도 통로였다. 하지만 지금껏 그들이 걸어 온 통로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일단 넓었다. 지금껏 지나온 통로보다 적어도 네, 다섯 배는 될 것 같았다. 천장은 높고 폭도 넓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벽과 천장을 온통 메운 벽화였다.
온갖 색채를 이용해 다채롭게 그려진 벽화는 문외한이 보기에도 굉장히 수준이 높아 보였다.
“굉장히 보존이 잘 되어있어.”
지크의 뒤를 따라 들어온 라일라가 벽화들을 보고 감탄했다. 한스, 스녹, 레오나도 고개를 연신 꺾어대며 벽화를 쳐다봤다.
지크도 라일라의 곁으로 가 벽화를 둘러 봤다.
“아무래도 마력 때문이겠지?”
“그럴 거야. 이 공간에 들어온 이후 느껴지는 마력이 갑자기 늘었으니까.”
라일라가 벽에 손을 대본다. 꿈틀거리는 마력이 그대로 느껴졌다.
“건물 전체에 마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예전 유적처럼 마력로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것도 그게 숫자든 질이든 아니면 둘 다든 그 유적보다 더 대단한 걸로.”
설명을 하는 라일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곳이 정말로 그 유적과 같은 문명의 유적이라면, 그들이 상대했던 괴물 같은 놈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
지크는 기운 내라는 듯 라일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그리고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통로를 따라 벽화는 계속됐다. 벽화에는 엄청나게 많은 병정들이 그려져 있었다. 골렘이나 강력한 몬스터들도 보였다.
그림 속의 그것들은 싸우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편인 듯 똑같이 스산한 눈으로 통로 쪽을 험상궂은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마치 통로를 걷고 있는 자들을 겁박하는 것 같았다.
한스가 말했다.
“무슨 경비가 엄청나게 삼엄한 왕궁에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네 기분이 맞을 거다.”
“네?”
“저 그림들이 삼엄한 경비들을 표현한 게 맞는 것 같다고.”
지크의 긍정에 한스는 다시 벽화를 쳐다봤다.
“내가 예술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무의미한 병졸들의 나열을 예술이랍시고 그리는 놈들은 없어. 그것도 벽은 물론 천장에까지 덕지덕지 말이야.”
천장에는 날아다니는 몬스터들, 그리고 그것들에 타 있는 병졸들이 역시나 통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순한 정신이상자 예술가의 변태적인 작품일 수도 있지만 이런 그림들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있긴 해. 이런 그림들이 아닌 진짜 병력이 필요한 살아 있는 권력자들과는 다르게, 그림 속의 존재들을 병졸로 세운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자들이.”
“죽은 자.”
라일라가 지크의 말에 덧붙였다. 그 말 뜻을 깨달은 한스가 놀랐다.
“네? 그 말은….”
“맞아. 이곳은 무덤일 가능성이 높아. 그것도 이 정도 규모의 무덤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권력자의 무덤 말이야.”
일행의 눈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지크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그 문을 열었다.
문 너머의 광경이 일행에게 들어 왔다.
* * *
“저기, 제너드.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브라우닝은 조금 당혹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지크라는 자와 그의 일행을 만나고 오늘은 숙소로 돌아갈 것처럼 행동하던 그렌이 어느 순간 생각에 빠지더니 다시 유적 안으로 발을 돌린 것이다. 게다가 누가 봐도 서두르고 있었다.
아까 방해를 한 이유로 차가운 반응을 돌려받았던 그녀인지라 질문에는 조금 껄끄러움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고민에서 벗어난 듯 그렌은 평소와 같은 반응을 보여줬다.
“역시 관광으로 이런 곳을 돌아다니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그 사람을 데려오려고요.”
“아, 그래?”
그녀의 안색이 밝아졌다.
“응, 역시 그렇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규칙은 지켜야지. 그것도 단순한 관광 때문에 규칙을 깨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고.”
뒤에서 브라우닝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납득하고 있지만 그렌은 그녀에게 반쯤 신경을 끄고 있었다.
지금 그를 움직이는 건 어떻게든 토르니움을 확보해야 한다는 다급함이었다.
브라우닝이 수상하게 보지 않도록 며칠 정도 유적 안을 헤맬 생각이었지만 지금 그런 여유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따라 비밀 통로가 있는 곳으로 똑바로 전진했다.
드드드득!
통로로 위장되어 있던 문이 열렸다. 브라우닝이 놀랐다.
“이런 곳에 이런 게 있었나!”
“들어가 보죠.”
“어, 잠깐! 제너드!”
브라우닝이 통로로 들어가는 그렌을 급히 쫓았다.
그렌은 이번에도 익숙하게 통로를 누볐다. 갈림길이 나왔어도 일고의 주저도 없었고 함정 같은 건 애초에 생각도 않았다.
그렇게 최단 기간으로 통로를 주파한 그의 앞에 어떤 방 안이 나왔다.
그리고 방 중앙에 꽂힌 검은 검을 보자, 그렌은 그제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