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너무도 엇나간 시간의 흐름. 그렌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일단 레오나는 괜찮아. 어떻게 저 속에 들어가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호수의 눈물만 확보한다면 동료로 들일 수 있어.’
이미 레오나가 무사히 호수의 눈물을 확보했다는 걸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설혹 레오나가 동료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 대체품은 있으니까.’
그녀는 우선 순위로는 낮은 축에 속한다. 그녀만큼 ‘완벽한 파티’에 어울리는, 아름답고 예쁜 존재는 또 있다.
‘하지만 에스텔레이드는 없어.’
정확히는 그 외의 검이 싫었다.
그렌은 한스가 갖고 있던 검을 떠올렸다. 그건 분명 에스텔레이드였다.
에스텔레이드를 잊는다는 건 그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만큼 용사에게 어울리는 검은 없어.’
그 고귀한 형태와 찬란한 능력은 ‘태양의 용사’라는 이명과 더불어 ‘진정한 용사’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에스텔레이드를 누군가 가져갔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분노했던가. 그런데 그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보고로는 몬스터의 습격을 막은 네 명의 용사 중 한 명이 에스텔레이드를 가져갔다고 했지. 그리고 가증스럽게 ‘태양의 용사’라는 이명까지 단 놈이고.’
그렇다면 아까 본 지크 일행이 그 네 명의 용사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동상에 엘프는 없었으니, 아마도 레오나를 뺀 네 명이 도시의 용사일 것이다.
‘그럼 용사라고 불린 사람 중 한 명이 그 지크 모어란 뜻이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직함만으로도 기가 찰 일이건만 이 곳에서는 용사로까지 불리고 있다니.
‘젠장!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절대 인정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 세계의 최악의 존재로서 그 악명을 떨쳐야 할 인간이 용사라니.
‘게다가 지크 모어가 벌써 그만큼이나 강해졌다고?’
비올루윈의 몬스터 습격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여기서 그렌은 한 번 더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리고 소문을 들어보면, 물론 도시가 이야기를 관광 상품화하며 조금 과장도 했겠지만, 도시로 쳐들어왔던 몬스터들의 세력은 상당히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네 명이서 처리하다니.
‘역시 계획에서 벗어난 지크 모어는 만만치 않다는 건가.’
그 찬란한 재능과 비록 인성은 망가졌을지언정 어떤 역경도 물리치는 그 능력.
정말로 오랜만에 그렌은 깊은 열등감을 느꼈다.
‘…지금 처리할까.’
그럼 에스텔레이드도 회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렌은 곧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정말로 지크 모어가 그 정도로 강해졌다면 지금의 내 힘으로는 무리야.’
그의 강함은 지크처럼 순수하게 재능과 노력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정보를 이용한 온갖 기연들이 보충을 해야 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지금 그는 그렇게 많은 기연을 집어먹은 상태가 아니다. 주변에 큰소리칠 정도로 강해지긴 했지만 정말로 괴물이라 불리는 자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일단 호수의 눈물이 있다면 어느 정도 실력을 늘릴 수 있겠지.’
그가 호수의 눈물을 갖으려 한 이유는 나중에 레오나와 인연을 만들기 위함도 있지만 순수하게 그에게 필요해서이기도 했다.
‘그래. 내버려두자. 내 완벽한 인생을 위해서 마지막 장애물은 꼭 지크 모어가 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에스텔레이드를 포기하는 것도 좀 그렇다.
‘…일단 감시를 붙이자 그리고 상황을 살피는 거야.’
그가 아는 많은 정보들을 이용한다면 에스텔레이드를 탈취할 기회가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애초에 지크에게 감시도 붙이려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단지 지크를 찾지 못해 감시를 붙이지 못했던 것뿐이다.
‘…역시 ‘그’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끝까지 일부 정보 단체를 남겨야 한다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렌은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에게 기회는 많았다.
‘일단 정보를 모아 이 세계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아봐야 돼. 그리고 지크 모어가 어떤 경로를 밟아 왔는지도.’
그리고 비올루윈을 공격한 정체불명의 세력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몬스터들을 부리고 있었다고 했지.’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세력을 그렌은 딱 하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리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세력은 바로 그렌 자신의 세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리 없지. 내 세력은 내가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으니까.’
적어도 보고도 없이 갑자기 그런 짓을 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파악하지 못한 다른 세력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차라리 잘됐어. 이렇게 변동이 심한 세계라면 꽤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계획을 포기하진 않았다. 언제 어느 때라도 그는 오로지 계획을 위해 전진한다. 다만, 정보를 얻으면 다음 기회 때 한층 더 유리해질 거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조사하자. 지크 모어의 일행도, 그들이 걸어 온 행적도 전부.’
그렇게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하나의 상념을 끝내자 곧 다른 상념이 떠올랐다.
‘그런데 저놈들은 이곳에 왜 온 거지?’
관광이라고 말을 했지만 그런 이유만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에스텔레이드를 가진 걸 보면 분명 이 유적의 비밀 공간을 발견했다는 뜻인데….’
그렌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심각한 얼굴의 그에게 브라우닝이 뭔가 말을 건다. 하지만 그는 대꾸할 여유가 없었다.
‘설마 뭔가 또 다른 보물이 있다고 생각해서 온 건가?’
그렇다면 위험하다. 그렌이 알기로 지금 이곳에는 또 하나의 보물이 잠들어 있었다.
토르니움.
에스텔레이드와 버금가는 마검. 그리고 지크 모어의 상징인 검.
‘아니, 아예 토르니움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서 왔을 수도 있어.’
아직 그 정보가 지크 모어에게 들어갈 시기는 아니지만, 이미 이 정도로 계획이 어긋난 상태가 아닌가.
그의 안색이 시커매졌다.
토르니움은 에스텔레이드를 찾지 못할 시 그가 들어야 할 검이었다.
마검이라고 해도 사용자에게 충분히 다룰 힘만 있다면 해를 끼치는 부류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가 알기로 에스텔레이드, 토르니움보다 좋은 검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이 유적을 돌아다니고 있던 것도 토르니움을 얻기 위한 밑밥을 깔던 것이 아니었던가.
한데, 그 토르니움마저 지크 일행이 가져가 버린다면?
“제너드? 무슨 일이야, 제너드.”
브라우닝이 연신 그를 불렀지만 그렌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 * *
‘흠, 설마 그렌 제너드를 만날 줄이야.’
그렌이 헤어진 후, 지크도 나름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이 즈음에 에스텔레이드를 손에 넣은 건가? 아니면 그냥 우연인가.’
지크는 슬쩍 한스가 메고 있는 에스텔레이드를 쳐다봤다. 다시 시선을 전면으로 돌렸다.
‘뭐, 이번에는 한스가 갖게 됐으니 무리겠지만.’
회귀 전 주인이 그 녀석이라고 해서 에스텔레이드를 곱게 가져다 받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한스도 엄연히 에스텔레이드의 주인으로 선택받아 휘두르는 자가 아니던가.
‘에스텔레이드가 주인을 가린다는 것은 심히 의심스럽지만.’
하지만 어쨌든 이번 주인은 한스였다.
그것보다도 지크의 눈을 끌던 건 그렌의 뒤에 붙어 있던 붉은 머리의 여자였다.
‘그거 분명 ‘라라 브라우닝’이었지?’
기억에 있는 인물이다. 아니, 기억에 있는 걸 넘어 회귀 전, 최후로 싸운 용사파티의 인물 중 하나였다.
‘커다란 방패로 내 공격을 계속 방어해내는 게 짜증났지.’
전면에 서서 루벨라의 지원을 받고 레오나의 견제로 지크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 하는 상황이라는 조건 하에서긴 했지만 천하의 힘의 마왕 지크 모어의 공격을 꿋꿋이 받아내던 그 터프함은 그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다.
‘벌써 같이 다니고 있었나?’
그녀의 모습이 기억과 조금 달랐던 걸 기억했다. 회귀 전 싸움 때는 커다란 방패로 주로 일행을 보호하고 간간이 얇은 세검으로 견제를 하는, 전형적인 파티의 방어 담당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 그녀의 모습은 장검과 적당한 크기의 방패를 장착한 모습이었다.
‘뭐, 주력 무기를 바꾸는 건 흔한 건 아니더라도 없는 것도 아니니까.’
지크는 거기서 생각을 끝냈다. 라라 브라우닝에 관해 그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야.”
라일라가 어느 벽 앞에 섰다.
그그그긍!
벽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뒤로 밀린다. 그들의 앞에 커다란 구멍이 드러났다.
예전 유적의 비밀 공간에 진입했을 때와 같다. 경험을 했던 일행은 담담했다. 그저 레오나만이 동그란 눈으로 구멍과 벽 이곳저곳을 쳐다 봤다.
지크 일행은 안으로 들어섰다. 일행의 모습이 구멍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얼마 후.
그그그긍!
유적의 벽면이 다시 닫혔다. 언제 문이 있었냐는 듯, 벽은 시치미를 뚝 떼고는 여지껏 그러했듯 조용히 벽면 뒤 쪽을 숨겼다.
“이제 어디로 안내할까?”
라일라가 지크에게 물었다.
“뭔가 특별하거나 수상한 방 같은 게 있었어?”
“몰라. 적어도 내가 아는 수상한 방은 딱 두 개 뿐이었어.”
그녀가 손가락 두 개를 쭉 펼치더니 하나씩 접었다.
“에스텔레이드. 그리고 토르니움이 있던 곳.”
“흐음.”
지크는 잠시 고민했다.
“토르니움이 있던 곳으로 가보자. 어차피 수상한 곳을 찾으며 돌아다녀야 할 텐데, 그 전에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보기만 하는 거야.”
“알았어. 어차피 나한테는 더 좋은 게 있잖아.”
지크가 자신의 등에 메인 윈두르의 손잡이를 툭툭 두들겼다. 잠시 더 의심의 눈빛을 보냈지만 라일라는 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섰다.
“토르니움? 그게 뭐야?”
레오나가 묻자 지크는 한스, 정확히 말해 에스텔레이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녀석이 갖고 있는 성검과 비슷한 성능을 가진 마검.”
“마검? 마검이 있어?”
레오나가 호기심에 차 물어 온다.
“그래. 하지만 뽑지는 마라.”
“왜? 아, 마검이라서 위험한가? 막 사람 몸을 조종한다거나 그런 거.”
“토르니움은 마검 치고는 위험하지 않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검 카테고리 안에서 그런 거지. 일정 수준 이하의 인간이 검을 사용하면 마검의 힘 때문에 몸이 상해간다. 그리고 너희들은 아직 그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고.”
레오나가 입을 삐죽였다. 지크가 말한 자신의 수준에 대해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크의 힘을 어느 정도 알게 됐기에 그녀는 조용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한스와 스녹은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 한스야 에스텔레이드가 있었고, 스녹은 혼자서 에스텔레이드를 들지 못 한 이후로 성검, 마검 같은 것들에 완전히 관심을 끊었다.
“여기야.”
지크 일행은 하나의 공간에 도착했다.
구조는 에스텔레이드가 꽂혀 있던 곳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단 하나. 누가 봐도 성스러움이 풀풀 묻어나던 에스텔레이드와는 다르게 광폭한 기운을 슬금슬금 내비치는 검은 검신의 검이 중앙에 꽂혀 있는 것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