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고대 유적은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주력 관광 상품을 도시를 구한 용사들의 이야기로 바꾼 비올루윈이었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인기 많았던 관광 상품을 버리는 정신 나간 짓을 하지도 않았다.
지크 일행은 유적 안으로 진입했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그들은 따로 떨어져서 움직였다.
관광지에 들어가는데 무슨 놈의 잠입 작전을 하는 것처럼 해야 하냐며 지크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일행은 알았다. 그가 불만을 가진 이유는 정체를 숨겨야 하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붙은 용사 칭호 때문이란 것을.
지크와 라일라가 선행하고 한스, 스녹, 레오나가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다행히 간단한 변장만으로 사람들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동상이 세워지긴 했지만 일행의 얼굴을 직접 보고 만든 게 아닌 터라 생김새가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관광객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통행금지 표식을 그들은 상큼히 무시하고 움직였다.
지크와 라일라는 관광객들이 자신들을 보지 못하도록 안쪽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 나머지 일행이 다가왔다.
“들키진 않았지?”
“네!”
들켜도 상관은 없지만 귀찮은 일은 방지하는 게 좋다. 그게 ‘착한 일’을 위한 귀찮은 일이라면 다르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신감 있는 한스의 대답을 보니 진짜 목격자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지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가자.”
그들은 유적 깊숙이 들어갔다.
지크는 라일라를 쳐다봤다.
“뭔가 느껴지는 건 있어?”
저번 유적에서 뭔가를 느낀 그녀이니 여기서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하긴, 여기서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면 이미 예전에 그걸 찾아 나섰겠지.’
한때, 이 유적을 은둔처로 사용하던 그녀다. 결단력도 높으니 이상한 낌새가 있다면 바로 이 유적을 수색했으리라.
“이 유적에 대해 잘 안다고 했지?”
“비밀 통로 같은 건 전부 알고 있어. 구조도 그렇고.”
“지도를 그릴 필요는 없겠군.”
그렇지 않았다면 유적 전체를 뒤집고 다녀야 했을 것이다. 스녹이란 존재가 있어 어렵진 않았을 테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라일라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한다면 일단 그 괴물은 없다고 봐도 좋으려나.’
아니면 이미 죽어나자빠져 있다든지.
“수상한 공간 같은 건 있었냐?”
“모르겠어.”
“생으로 뛰어다니며 찾아봐야겠군.”
지도를 그릴 필요는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유적을 뒤집고 다닐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일단 그 비밀 공간으로 들어가자고.”
지크가 라일라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전에 들어갔던, 에스텔레이드가 꽂혀 있던 곳으로 이어지는 입구 위치는 새까맣게 까먹은 상태.
애초에 당시 비밀 문을 발견한 건 길을 잃었을 때가 아니던가.
스녹은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이 유적을 완벽하게 꿰고 있는 라일라가 있는데 굳이 스녹에게 기댈 필요는 없었다.
라일라가 앞장섰다. 지크와 일행은 그 뒤를 따랐다.
유적의 구조를 꿰고 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닌 듯 라일라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무료한 표정으로 라일라의 뒤를 따라 어딜 가나 똑같은 유적의 풍경을 보던 지크가 갑자기 전면을 바라봤다.
“라일라.”
“왜 그래?”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그녀의 어깨를 짚고 지크가 앞으로 나섰다.
“잠시 내가 앞장서마.”
“무슨 일 있어?”
“앞에 뭔가가 있어.”
“혹시… 뭔가 이상한 기척이 나?”
저번 유적에서 있던 일이 생각나 라일라의 표정이 굳었다. 다른 일행들도 긴장했다. 하지만 지크는 손을 저었다.
“긴장하지 마라.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럼 뭔데?”
“사람이 있어.”
“그래? 길 잃은 관광객인가?”
유적의 출입금지 구역에 몰래 들어갔다가 행방불명되는 일이 이 유적에서는 많이 일어난다.
일정구역만 개방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니던가. 실제로 이 유적 어딘가에는 길을 잃고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간간이 있을 것이었다.
“아니, 관광객은 아니야.”
이 기척, 느껴본 적 있는 기척이다.
“알고 있는 사람이야?”
“그래. 아마 너도 알고 있는 자일 거다.”
기억이 없는 터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라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마주친 사람을 보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 *
“오랜만이죠?”
지크가 손을 내밀었다. 회귀 전이 어쨌든, 이번 생에서는 적대하지 않은 사람이라 칼부터 뽑아들지는 않았다.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상대도 손을 뻗는다. 지크는 그의 손을 꾹 잡았다.
회귀 전에는 서로를 못 죽여 안달인 사이였지만 지금은 그저 안면 정도 있는 사이에 불과하다.
“지크 씨라고 하셨죠?”
“맞습니다. 당신은 그렌 제너드 씨죠?”
눈앞에 힘의 마왕 지크 모어의 숙적. 그렌 제너드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침뱉어주고 싶을 정도의 그 잘생긴 얼굴은 여전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천하의 지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당황할 이유도 없다.
지크는 태연하게 그를 대했다.
“예전 밸리드 놈들을 짓밟은 이후로 처음이군요.”
“네, 그렇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냥저냥 지냈습니다. 제너드 씨는 어떻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간다. 별 이상할 것 없는 말이다.
안면은 있지만 친분은 별로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갈, 영혼 없는 대화.
하지만 왜일까. 그 대화에서 뜻 모를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은.
그렌이 지크의 뒤를 쳐다봤다.
“동료가… 느셨군요.”
“오다가다 만났습니다.”
라일라와 레오나가 그렌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렌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제너드 씨도 새로운 동료를 받아들이신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 무척 소중한 동료죠.”
브라우닝이 지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렌의 ‘소중한 동료’라는 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지 그녀는 상당히 뿌듯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는 출입 금지된 유적이지 않습니까.”
“그건 제너드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렌은 어깨를 으쓱였다.
“얼마 전에 이곳에 몬스터가 쳐들어 왔다고 들어서요. 쉬는 김에 겸사겸사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혹, 몬스터가 이 복잡한 유적에 들어와 숨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요.”
“그래, 네가 푹 쉰다고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뒤에서 브라우닝이 투덜거린다. 그렌이 뒤를 돌아 그녀를 달랬다.
“자자, 어차피 쉬는 건 똑같잖아. 몬스터가 나오지 않으면 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어?”
“너는 진짜…!”
브라우닝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다는 투가 역력하지만, 그 안에서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브라우닝을 다독인 그렌이 다시 지크를 쳐다봤다.
“제가 여기 있는 이유는 말했으니, 이제 지크 씨의 이유를 들어봐도 괜찮을까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의 음성엔 어떤 강요가 느껴졌다.
“관광입니다.”
“…관광이요?”
“네. 저쪽은 사람이 많아서요.”
“…이쪽은 출입금지 구역입니다만.”
“압니다.”
지크는 당당했다. 오히려 질문을 던진 그렌이 당황할 정도였다.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오는 걸 그렇게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지금 저와 같은 잘못을 저지른 분께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잘못이라니! 우리는 몬스터들이 혹시 숨어있지 않은지 확인하러 온 거라고요!”
브라우닝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그렌이 폄하되는 걸 참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시에서 허가는 받았습니까?”
브라우닝은 대답하지 못했다.
“시에서 허가를 받은 사항이라면 적어도 병사 한두 명 정도는 같이 다닐 텐데요. 시에서도 확실하게 정보를 알고 싶을 테니까요. 절차라는 것도 있고 말이죠.”
그녀가 머뭇거렸다. 뭔가 대꾸를 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결국 브라우닝은 울상을 한 채 그렌을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그럼 서로 못 본 걸로 하면 되겠죠?”
“하하하! 역시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니까!”
지크가 그렌의 팔을 툭툭 쳤다. 그렌은 한숨을 내쉬며 지크의 팔을 밀어냈다.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지크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조금 더 돌다 가렵니다.”
“길 잃지 않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그렌은 브라우닝을 이끌고 유적의 출구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소 화기애애하게 시작한 두 집단의 만남은, 어색한 분위기를 남기고 끝났다.
* * *
“대체 뭐야, 저 녀석들?”
지크 일행과 조금 떨어졌다고 생각되자마자 브라우닝이 화를 냈다. 그녀는 마치 지크가 눈앞에라도 있는 듯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참아, 브라우닝.”
“이걸 어떻게 참아! 마치 우리가 자기들과 똑같은 듯 말하잖아!”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 우리도 몰래 들어온 거니까.”
“그래도 우리는 이 도시의 안전을 위해서 들어왔어! 고작해야 구경하러 들어온 그 사람들이랑은 다르다고!”
그녀가 그렌을 쳐다봤다.
“어떻게 아는 작자야?”
“예전에 카르위먼 일로 알게 됐어.”
“카르위먼과 관련된 작자야?”
“명예 성기사야.”
그녀가 말도 안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명예 성기사? 너와 같은? 그 인간이?”
‘말도 안 되긴 하지.’
그렌은 브라우닝의 말에 동의했다. 그 지크 모어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니. 엇나가도 완전히 엇나갔다.
브라우닝은 계속 투덜거렸다. ‘말도 안 돼’라든지 ‘대체 인선을 어떻게 하는 거야’라든지 같은 말이 들린다.
지크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사실이 퍽 충격이 모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났는지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일행. 엘프를 빼면 이 도시에 세워지던 동상의 인간들과 닮지 않았어?”
그러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 없지. 도시를 구한 영웅들이 그렇게 개차반일 리가 없어.”
“브라우닝.”
“응?”
“조금만 조용히 해줄래?”
“아, 으, 응. 조금 시끄러웠지?”
그녀가 입을 닫았다. 그리고 힐끔힐끔 그렌의 눈치를 봤다.
그가 이렇게 대놓고 면박을 준 건 처음이다. 혹시 자신의 말 중 그렌의 심기를 어지럽힐 만한 게 있었던 걸까.
브라우닝이 자책하며 자신의 발언을 되짚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렌은 그런 브라우닝의 모습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지크 일행의 모습으로 가득 차있었다.
‘지크 모어.’
후에 ‘힘의 마왕’이라 불리게 될 그의 숙적.
밸리드 북부지부 사건 이후로 감시를 붙이려 했지만 홀연히 사라졌던 그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그 녀석이 이 유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그의 일행은 그의 머리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대지의 폭군 노웸.’
앞으로 마인으로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존재. 예전에는 먼발치에서 흘끗 봐서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니 확실했다. 그는 마인 노웸이었다.
‘레오나.’
후에 그의 동료가 될 엘프. 그와 함께 ‘힘의 마왕 지크 모어’를 토벌해야 할 미래의 동료가 토벌할 마왕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텔레이드.’
어떤 사내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확인한 그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