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열심히 해라. 응원해 주마.”
지크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저기….”
라일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뭔가 부탁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지크는 어렵지 않게 라일라의 부탁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유적을 찾아다녀 보자고?”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고대 제국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그녀가 연관되어 있어 보이니만큼, 다른 유적에서도 라일라와 연관된 뭔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그녀 기억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이제는 완전히 우리와 일행이란 생각이 자리를 잡았나 보군.’
만약 일행에 합류한 직후였다면 당장 혼자서 유적을 탐사하러 떠났을 것이다.
‘전력이 필요한 이유도 있을 거고.’
오늘 만난 괴물 같은 것이 다른 유적지에도 있다면 라일라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기도 할 것이다.
“좋아.”
지크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별 일정도 없는 것, 유적 조사를 끼워 넣는다고 해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라일라가 안도했다. 그녀가 지크를 보고 미소 지었다.
“고마워.”
그 미소에 지크는 정말로 그녀의 미모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 * *
다음 날 일행은 유적을 나섰다. 여전히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를 나오니 파란 하늘이 그들을 반겼다.
“목적지가 있으십니까?”
한스가 물었다. 지크는 라일라와 한번 눈을 맞추고는 대답했다.
“비올루윈에 간다.”
윈두르와 에스텔레이드를 찾은, 그리고 누군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아직 토르니움이 있을 고대의 유적이 존재하는 도시.
예전에는 유적에 존재하는 토르니움을 찾으러 갔었지만 이번 목표는 도시의 유적 그 자체였다.
* * *
비올루윈은 입은 피해를 상당히 회복한 상태였다.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줄어들었던 관광객들도 다시 늘고 있었다.
비올루윈 수뇌부에서 실행한, 영웅 이야기 계획이 관광객들에게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비올루윈의 한 광장. 예전의 이름을 버리고 이제는 영웅의 광장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는 한창 네 개의 동상이 설치되고 있었다.
생생한 생동감까지 전달되는 듯 세세한 곳까지 섬세하게 완성된 동상이었다. 튼튼한 밧줄 수십 개가 동상을 받침대 위로 끌어 올린다.
인부들의 기합소리에 맞춰 동상은 차츰차츰 받침대 위로 일어섰다. 주변의 구경꾼들이 휘파람을 불고 함성을 질렀다.
쿵!
첫 번째 동상이 똑바로 섰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도시를 구한 영웅의 모습을 보러 사람들이 앞 다투어 동상 앞에 몰렸다.
그러나 광장의 끝, 어떤 건물 아래 있는 인물은 대다수의 군중과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딱딱한 눈빛으로 동상이 완성되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 제너드.”
그에게 어떤 여자가 다가왔다. 붉은 머리를 머리 뒤에서 질끈 묶은 미인이었다.
하지만 허리에 찬 검과 등에 맨 커다란 방패가 그녀가 아름답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렸다.
“음? 뭘 보고 있지?”
그녀가 남자, 그렌이 쳐다보고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 도시를 구한 영웅들인가.”
영웅. 그 소리에 그렌의 입가가 씰룩였다. 하지만 여성은 그렌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말을 계속 이었다.
“분명 터무니없는 별명이 붙었던데. 하긴, 자신들의 터전을 구해준 사람들이니 그럴 만하겠지.”
하지만 그녀의 음성은 딱히 그 영웅들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어조는 아니었다.
그저 피해자라면 당연히 자신을 구해준 자를 영웅으로 볼 거라고 이해한다는 어조였다.
“어떤 별명이었더라. 분명히….”
기억을 더듬던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분명 ‘대지의 용사’, ‘마도의 용사’, ‘힘의 용사’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 별명을 내뱉었다.
“‘태양의 용사’.”
뿌득!
그렌의 입에서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성이 흠칫 놀라 그렌을 쳐다봤다.
“뭐야? 왜 그래?”
“아뇨.”
그렌이 입을 열었다. 언제 이를 갈았냐는 듯 그의 얼굴은 평온했고 어조도 부드러웠다.
“제가 그때 여기 있지 못했다는 게 화가 나서요. 그랬다면 무고한 시민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아니야, 제너드.”
여성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정의롭고 고결한 이상을 지녔다는 건 알고 있지만, 네가 혼자서 모든 걸 할 순 없잖아. 너무 큰 이상은 독이 될 수 있어.”
“…그렇네요. 당신 말이 맞아요, 브라우닝. 어쩔 수 없는 일까지 마음을 질질 끌어선 안 되겠죠.”
그렌이 엷게 미소를 지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의 잘생긴 얼굴과 맞물려 그의 얼굴이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붉은 머리의 여성, 브라우닝이 슬쩍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흠! 흠! 이해했다니 기뻐. 그럼 계속 구경할 거야?”
“아뇨. 숙소로 돌아가죠. 내일의 일정도 있으니까요.”
“그 유적에 가는 거지?”
“네. 오랜만에 휴식이니, 유명 관광지를 돌며 머리를 식힐 생각입니다.”
“잘 생각했어. 전사에겐 휴식도 중요하니까.”
그렇게 대화를 하며 둘은 광장을 뒤로 했다. 그렌이 슬쩍 고개를 돌린다.
그의 시선이 지금 세워지기 시작한 ‘태양의 용사’의 동상에 꽂혔다. 그의 눈에 잠시 짙은 살의가 머물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렌은 다시 고개를 돌려 브라우닝과 대화를 하며 광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오랜만에 온 비올루윈은 활기가 넘쳤다. 몬스터의 침공 때의 도시가 어땠는지 아는 일행은 제법 놀랐다.
다만, 지크는 익숙했다. 그 온갖 깡패 같던 마인들이 난리를 치던 시대에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가던 게 바로 인간이란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크를 놀래킬 일은 따로 있었다.
비올루윈에 도착한 저녁. 숙소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전부 제각각이었다. 한스와 스녹은 굉장히 설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스는 괜히 에스텔레이드를 쓰다듬었고 스녹은 노웸을 들어 올려 두런두런 얘기를 했다.
고대 유적에 흥미가 있다며 이번 여행에도 따라 온 레오나는 지크 일행을 감탄과 경의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라일라의 표정은 조금 복잡했다.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 입가가 씰룩였다.
자신의 정체에 대한 고민 때문에 요새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기던 그녀가 정말로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을 내보였다.
하지만 한켠에는 조금 부끄러운 감정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지크.
언제나 태연하고 침착하며 그다지 표정을 무너뜨리는 일이 없는 그가, 정말로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그렌 제너드에게 패했을 때도 이런 표정을 지은 적 없는 그인 걸 감안하면 놀랄 일이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진짜 이 도시에 소문이 퍼진 영웅들이란 거지?”
“네, 뭐….”
자랑스럽게 말을 하고 싶지만 더욱 인상을 일그러뜨리는 지크 때문에 한스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레오나에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네가 ‘태양의 용사’.”
레오나가 한스를 보며 말한다. 한스가 겸연쩍어하면서도 자랑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네가 ‘대지의 용사’.”
스녹이 노웸을 쓰다듬었다. 노웸이 ‘쿠우우!” 하고 울었다.
“네가 ‘마도의 용사’.”
필사적으로 얼굴 근육을 진정시키던 라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운지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나하나 별명을 부른 그녀가 마지막 남은 지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크가 그녀를 쏘아봤다. 말하지 말라는 명백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용사라고 불리는 이들이 앞에 있음에 흥분한 레오나를 말릴 순 없었다.
그녀는 한스, 스녹과 같은 과지만, 그들처럼 지크의 눈치를 보는 이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지크가 ‘힘의 용사’.”
“풋! 크크크크크큭!”
결국 참지 못했다. 라일라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았다. 어깨가 들썩인다. 그녀의 입을 비집고 나온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녀의 인내는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하하하하하! 아하! 아하하하하하하!”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녀가 몸을 튕겼다.
허리가 새우처럼 꺾인 상태로 그녀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자칫하다간 의자 째로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천하의, 천하의 지크가! 용사! ‘힘의 용사’! 아하하하하!”
미래의 지크를 알고 있기에, 그리고 용사라는 단어가 자기에게 붙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기에 라일라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쯧!”
지크는 혀를 찼다. 그 반응에 라일라가 더 자지러지게 웃었다.
한참을 더 웃고 나서야 라일라가 웃음을 멈췄다. 어찌나 웃었는지 그녀의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자그마치 용사 칭호를 받은 사람께서.”
“…….”
지크는 말이 없었다. 지크가 놀리고 라일라가 화를 내는 평소와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었다.
“기가 막혀. 용사 칭호가 그렇게 싫어?”
“무지막지하게.”
마왕이라 불린 자신에게 감히 용사 칭호를 달다니. 지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리적인 혐오감이 그를 덮쳤다.
“은혜도 모르는 놈들. 목숨 살려 줬더니 나한테 그런 끔찍한 명칭을 붙여?”
“끔찍한 명칭이라니. 다른 사람들은 원해도 얻지 못하는 명칭인데.”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지.”
상당히 충격이 큰 것 같았다. 천하의 지크가 저렇게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모습은 좀체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라일라는 또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걸 참았다. 그래도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 준 지크가 아니던가.
“그래도 네 말대로 조용히 들어오는 게 맞긴 했네. 만약 우리를 발견했다면 난리가 났을 테니까.”
혹시 자신들을 알아보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있을까봐 그들은 도시에 몰래 들어 온 상황이었다.
성벽도 그냥 넘었고 숙소도 레오나를 내세워 잡았다.
만약을 위한 일이었지만 정답이었다. 만약 그들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었다면 소란 정도가 아니라 난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너희는 좀 아쉽겠어.”
라일라가 한스와 스녹을 보고 말했다.
지크는 물론이고 라일라도 용사라는 칭호가 그리 좋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좋은 기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귀찮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하지만 한스와 스녹은 다르다. 그들은 용사라는 존재를 동경하는 자들이었다.
“괜찮습니다. 굳이 유세를 떨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저 제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기쁠 뿐입니다.”
“전 솔직히 조금 아쉽긴 해요. 그래도 두 분이 불편한 상황이 되는 건 더 싫으니까요.”
“착하기도 하지.”
라일라가 지크를 돌아봤다.
“어떻게 이런 녀석 밑에 이런 녀석들이 있을까.”
“다 교육의 힘이다.”
한스와 스녹을 잘 가르쳤다는 것에는 꽤 자긍심을 느끼는지 지크가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하지만 라일라가 다시 ‘용사’라고 중얼거리자 인상을 구겼다.
“…지크를 사부로 모시면 용사라고 불릴 수 있어?”
“…젠장! 너 때문에 애가 이상한 생각을 품었잖아.”
눈을 반짝이는 레오나를 보며 지크가 투덜거렸고, 라일라는 다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