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지크는 레오나를 쳐다봤다. 당장 스콜의 미간에 화살을 박아버릴 것 같다.
그녀의 분노가 당장이라도 물리적인 형태로 모양을 이루어 스콜을 갈가리 찢어버릴 것도 같았다.
‘그럴 만하지.’
지크는 레오나에게 ‘호수의 눈물’을 빼앗겼을 때의 구체적인 사정을 들었다.
당시 숲에서만 생활하던 레오나는 종종 오는 인간 상인들에게 호기심을 품었다.
나이 든 엘프들은 젊고 어린 엘프들이 인간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걸 막아섰지만 호기심이란 게 그렇게 쉽게 통제가 되겠는가.
몰래몰래 인간과 접촉하는 젊고 어린 엘프들은 항상 있었고 레오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 만난 게 스콜이었다. 그는 레오나에게 세상의 신기한 것들을 설명해주며 환심을 끌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경계를 했던 레오나였지만 상행을 올 때마다 여러 가지 신비한 물품을 주고 이야기를 해주는 스콜에게 점점 마음을 열었다.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건 싸늘한 배신이었다.
어디서 알았는지 ‘호수의 눈물’의 존재를 스콜은 알고 있었다.
엘프의 비처에 있는 그것을 스콜이 직접 가지러 가는 건 어렵다.
그래서 그는 레오나를 이용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호수의 눈물’을 가져올 수 있도록.
‘순진해도 너무 순진해.’
세상물정도 모르는 그녀가 인간 세계에 나온 건 그런 이유였다.
자기의 잘못으로 강탈당한 엘프의 보물. 레오나는 강한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세상으로 뛰쳐나왔다.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진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거의 가출이나 다름없는 행태였다.
‘쯧쯧쯧! 그렇게 배신을 당했으면 사람을 좀 더 의심하지.’
아무리 지크가 그의 경험과 기술로 레오나를 잘 구슬렸다고는 하지만 스콜에게 뒤통수를 맞은 후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녀는 지크를 너무나 쉽게 믿었다.
‘그 덕에 나는 편했지만.’
적어도 레오나 본인에게 좋은 성향은 아니다.
때문에 라일라는 여유가 있을 때는 레오나를 데리고 세상물정에 대해 설명하는 수고를 들였다.
물론 라일라가 아는 세상물정은 철저하게 지식만으로 아는 것이었기에 종종 지크가 끼어들어 보충을 해주곤 했다.
‘라일라는 싫어했지만.’
순진한 아이에게 이상한 것 가르친다며 쫓겨나기 일쑤였다.
“내, 내가 잘못했어! 살려줘!”
레오나는 여전히 스콜에게 화살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시위를 놓진 못했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쩌시겠습니까?”
“…모르겠어. 저기, 지크. 여기선 어떻게 해야 돼?”
레오나가 역으로 물었다.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레오나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죽이든, 살리든, 반만 죽여 방치하든. 저희는 그 모든 걸 인정합니다.”
“…그래. 지크, 너는 그랬지.”
결코 결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의도를 밝히면, 지크는 그 의도대로 움직여줬다.
물론 방법은 지크 본인이 직접 정했지만, 레오나에게는 그것도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그를 믿기를 잘 했다. 레오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조언을 줘.”
“어떤 조언입니까?”
“내가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해?”
“지금 심정은 어떻습니까?”
“화가 나.”
“스콜에 대한 감정은?”
“죽이고 싶어.”
스콜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생사가 지금의 대화에 달린 걸 눈치 챈 것이다.
“그럼 뭘 고민합니까?”
지크는 잔잔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죽여요.”
“자, 잠깐! 내가 잘못했으니까 목숨…!”
퍽!
지크가 스콜을 걷어찼다. 나뒹군 스콜의 입을 발로 짓밟았다.
스콜이 발버둥 쳤지만 어찌된 일인지 입을 막고 있는 지크의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종족이 다르더라도 첫 살인은 힘들죠. 레오나 씨가 앞으로 싸움을 할 생각이 없다면 이 녀석을 고이 놓아주는 게 좋아요. 살인 같은 건 안 하면 안 할수록 좋으니까요.”
전직 마왕의 조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조언이다. 당연히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전투를 해야 한다면, 그리고 사람을 죽일 가능성이 높다면 여기서 살인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단순하게 원한 없는 놈을 죽이는 것보다 죄책감이 덜할 테니까요.”
한스와 스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이 사람을 죽이는 걸 거리끼지 않는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죄책감 같은 걸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지크가 철저하게 그들을 굴렸으니까다.
레오나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머문다. 스콜도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여기서 그녀의 선택에 따라 그의 목숨이 결정된다.
“…지크. 발 치워.”
스콜의 눈이 안도감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마음을 놓기엔 너무 일렀다.
“잘못하면 네 발까지 꿰뚫릴 수 있으니까.”
스콜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지크는 발을 치우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그냥 하세요. 어차피 그 정도로 활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것도 그렇네.”
퍽!
레오나가 활시위를 놓는 순간, 무언가가 꿰뚫리는 소리가 났다. 지크가 발을 뗐다. 스콜의 비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 *
툰겔에 소문이 돌았다. 경매장을 망친 용의자가 근처 산속에 숨어있다는 것이었다.
그저 소문일 뿐이었고 그래서 시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몇은 소문의 산을 찾아갔다.
하지만 상당히 험준한 산이었기에 일반인들은 산에 얼마 진입하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나, 용의자를 찾는 사람 중엔 일반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휙!
나무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친다. 거무튀튀한 ‘로브를 입은 자’들이 마치 풀숲에서 무언가를 수색하듯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깊고 험준한 산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규모가 엄청나게 큰 산도 아니다.
날랜 움직임으로 그들은 어느 숲 한가운데에서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반짝거리는 금이 나뭇잎 사이로 뻗어 오는 햇빛을 반사한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마차 앞에 내려앉았다.
끄는 말도 없이 숲 한가운데에 버려진 듯 방치된 황금마차는 뭔가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로브를 입은 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윕스 미다스.”
‘로브를 입은 자’ 중 한 명이 말했다.
“상황을 설명해라. 그리고 ‘호수의 눈물’은 탈취했나?”
철컥!
마차의 문이 열렸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놀랐다.
황금 마차는 미다스의 권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모양은 바뀔 수 있다.
안 그래도 툰겔에서 한바탕 하면서 마차의 황금을 사용한 모양이니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미다스는 통짜 황금으로 이루어진 마차를 타고 다니지, 도금한 마차를 타고 다니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본 마차의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내부 인테리어는 보통 마차와 다르지 않았다.
“…미다스가 아니군.”
“맞아. 난 윕스 미다스가 아냐.”
누군가 마차에서 내린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경계했다.
“넌 누구냐.”
“아, 알 것 없어. 그냥….”
마차에서 내린 남성, 지크가 씨익 웃었다.
“너희들을 무지하게 싫어하는 저승사자라고만 알고 있으면 돼.”
* * *
지크 일행은 지크가 함정을 파 놓은 산 아래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벌컥!
문이 열리고 지크가 들어온다. 일행이 지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라일라가 말했다.
“왔어?”
“응.”
“어떻게 됐어?”
지크는 대답대신 메고 있는 윈두르를 툭툭 두들겼다. 윈두르는 깨끗했다.
하지만 라일라는 윈두르에 흥건한 피가 묻었었을 거란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스녹.”
“네!”
“마차를 밖에 세워뒀으니까 금 떼라.”
“네!”
마차에 금을 코팅한 자는 스녹이었다. 지크의 명령에 그는 오두막을 나갔다.
지크는 허름한 거적때기가 깔린 침대에 엉덩이를 댔다.
라일라가 지크의 움직임에 시선을 맞췄다.
“그럼 전부 끝인가?”
“그래. 적어도 툰겔에서의 일은 전부 끝났어.”
‘호수의 눈물’을 찾았고 도둑놈을 죽였으며 경매장을 부수고 윕스 미다스마저 죽였다.
미다스의 시체는 불태운 후 대충 길가에 뿌렸다.
툰겔은 경매장 파괴의 유력한 용의자로서 미다스를 찾고 있었지만 그들이 미다스를 찾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좋아?”
지크가 방 한쪽 의자에 앉아있는 레오나에게 물었다.
지크는 레오나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호수의 눈물’을 찾아준 후 레오나 쪽에서 권유를 했고, 지크도 거절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레오나는 ‘호수의 눈물’을 꼭 안고 있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원수 같은 놈이라도 사람을 죽인 것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은 딱딱했다.
지크는 그녀를 쳐다보다 ‘호수의 눈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당히 좋은 능력을 갖고 있는 거겠지?’
엘프의 보물인 것도 그렇고 ‘로브를 입은 자’들이 노리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능력은 좋아 보였다. 그러나 지크는 아직 그 능력을 몰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별로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알아서 뭐 하게.’
오로지 그 이유였다.
“이제 돌아갈 거지?”
지크가 물었다. 라일라가 이런 저런 훈련을 시켰다지만 레오나는 아직까지 불안불안했다.
게다가 지금은 거의 가출과 마찬가지 상태가 아닌가.
여러 모로 지금은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다른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인간 세계와 천천히 접촉을 하며 경험을 쌓는 편이 나았다.
물론 지크는 그녀의 부모나 보호자가 아니었고, 그녀가 만약 계속해서 여행을 하고 싶다면 보내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때는 지크의 보호 없이 그녀 혼자 이 세계에서 여행을 해야 했다. 그리고 결과는 아마도 그리 좋지 않을 거라고 지크는 추측했다.
“돌아가야지.”
다행히 그녀는 고이 집으로 돌아갈 모양이었다. 라일라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게 보인다. 그녀는 레오나가 상당히 걱정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바로 보물을 찾았던 유적 탐험을 간다고 했었지?”
레오나가 물었다.
“그래.”
라일라의 제안으로 다음으로는 유적 탐사가 이미 계획으로 잡혀있었다.
“나, 그것까지만 참여하고 가면 안 될까?”
지크는 레오나의 눈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는 분명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아마 유적에 들렀을 때, 유적에 호기심을 가진 모양이다
그러나 다른 감정도 엿보였다. 아니, 다른 감정 쪽이 훨씬 더 컸다.
‘죄책감을 잊으려고 하는 건가.’
다른 일에 집중해 죄책감에 잠시 시선을 돌리는 것도 충분히 괜찮은 일이다.
‘나는 별 상관없지만.’
지크는 라일라를 쳐다봤다.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인다.
레오나를 걱정하는 그녀도 유적까지의 동행은 걱정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좋아. 그렇게 해.”
지크의 허락에 레오나의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
* * *
지크 일행은 예전에 움직였던 길을 고스란히 따라 폭포 앞에 도착했다. 폭포는 여전히 시원한 물줄기를 땅으로 내리꽂고 있었다.
예전처럼 스녹이 만드는 돌길을 걸어 일행은 폭포 뒤의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안을 걷자 곧 몸을 꿉꿉하게 만들었던 습기가 사라지며 유적이 나타났다.
예전처럼 지크가 문을 열었다. 풍경은 예전과 같았다.
단, 예전에 모두 때려 부셔서 미스릴 덩어리로 만들어 챙긴 터라 골렘은 나오지 않았다.
지크는 뒤를 돌았다. 일행이 각자 관심 있는 곳에 시선을 두고는 이리저리 유적을 둘러봤다.
예전에는 골렘과의 전투와 경매라는 시간제한 때문에 제대로 유적을 관찰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지크는 손뼉을 쳐 시선을 모았다.
“좋아, 친구들. 이제 이 유적이 어떤 놈인지 확인해 보자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