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1억. 무척이나 간단한 말이다. 발음하기도 어렵지 않고 단어도 짧다.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너무나 쉽게 내뱉을 그런 말.
하지만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앞에 ‘금화’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면 더더욱.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미다스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이제는 오히려 말하기가 편안하기까지 했다.
“금화 1억 개라니. 액수를 떠나서 그 무게만으로도 마차 한두 개로 못 실어!”
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터져 나오는 울분에 결국 마지막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분명 그에게서 돈을 최대한 긁어낸다고 하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이건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고작 ‘대지의 눈물’을 경매에 올린다는 조건 하나만으로 금화 1억 개라니.
협상을 시작할 때는 생각하는 금액보다 높이 부르는 게 보통이라지만 이건 너무 높다.
협상을 하자는 게 아니라 파탄을 내자는 뜻과 같다.
“그래도 1억이다.”
“이…!”
얼굴이 벌게진 그가 욕설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지크가 종이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 금화 10만 개
미다스는 종이를 봤다가 지크의 얼굴을 봤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입으로는 1억이라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르고 종이로는 10만이라는, 그보다 훨씬 적은 숫자를 써내다니.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지크가 두 번째 쪽지를 내놨다.
- 밖에 엘프
그제야 미다스는 지크의 이상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지의 눈물을 빼앗았다고 하더니, 엘프를 완전히 떼어놓은 건 아니었던 건가.’
아니면 자신을 속이려고 연극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지크가 요구한 실질적 금액이 1억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이 아니라는 게 중요했다.
‘흠음, 그래도 10만 개도 좀 많지 않나.’
‘호수의 눈물’이나 ‘대지의 눈물’을 직접 구매하는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고작해야 경매장에 올려주는 대가가 아니던가.
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로 내주기도 뭐 했다.
“너무 많다.”
물론 이 말은 1억 개가 아닌, 금화 10만 개를 말하는 것이다.
지크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협상은 사절이야. 줄지 말지, 그것만 말해.”
미다스가 지크를 노려봤다. 하지만 지크에게 무서운 눈빛 같은 게 통할 리 없었다.
미다스는 몇 번 더 가격을 깎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지크는 철벽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둘 다 금화의 정확한 개수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다스는 눈가에 주름을 만들었다. 허세를 부리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대지의 눈물’은 그만큼 그에게 위협적인 보물이었다.
“…그냥 내가 사면 안 되겠나? 금화 50만 개를 주지.”
“안 돼.”
지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종이 하나를 꺼내 펜으로 슥슥 뭔가를 썼다.
- 초치지 마. 그냥 조용히 경매로 받아가.
‘엘프 때문이군.’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종이로 설명할 리 없다.
‘빌어먹을! 분명 빼앗았다고 했잖아!’
완전히 빼앗은 게 아닌지. 아니면 사정이 꼬인 것인지.
그러나 그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기서 또 한 번 거절한다면 지크는 정말로 일어설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좋다. 그 조건으로 하지.”
그는 어쩔 수 없이 지크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경매의 날이 밝았다. 뒷 경매장은 중앙 경매장이 열린 날과 같은 날에 열린다.
단, 은밀하게 열리는 뒷 경매장답게 낮에 열리는 중앙 경매장과 다르게 밤에 열렸다.
지크 일행이 경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경매장의 로비는 여전했다. 그러나 로비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과 달랐다.
예전에도 경매장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지금 로비에 있는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의 재질은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부드러워보였고 몸 여기저기에 치장되어 있는 보석들은 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반사해 아름답게 빛났다.
전부 오늘 열리는 중앙 경매장에 참여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중앙 경매장이 열리는 날에는 평소에 열리는 자잘한 경매장들은 모두 문을 닫는다. 오로지 중앙 경매장만을 위한 날.
때문에 오늘 경매장을 찾은 사람들은 중앙 경매장에 참여할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들뿐이었다.
어찌 보면 왕실이나 고위 귀족의 저택에서 열리는 무도회 같기도 한 분위기다.
자신들보다 급이 낮은 자들을 사정없이 쳐내는 그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지크 일행은 그 분위기 사이를 보무도 당당하게 걸었다.
지크 일행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은 그들은 이 고급스러운 분위기에서 사정없이 튀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하지만 그들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로비의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어쩐 일이시죠?”
안내원이 묻는다. 하지만 존대라는 형식만 갖췄을 뿐, 안내원의 목소리에 친절이란 감정은 없었다. 심지어 얼굴에 미소도 없다.
평소에는 우회적으로 조롱을 하더라도 상냥한 미소와 친절한 목소리만큼은 잊지 않던 안내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늘이 중앙 경매장이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날, 안내원들은 그들의 ‘진짜 손님들’을 위해 급이 안 되는, 정확히 말하면 돈도 없이 얼쩡대는 인간들을 사정없이 쫓아냈다.
그리고 지크 일행의 겉모습은 절대로 돈이 있어 보이는 외견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그놈이로군.’
레오나를 조롱하며 돈이 있으면 경매에서 사라고 하던 놈이다. 놈도 그걸 알고 있는지 눈에 품고 있는 한기가 한층 더했다.
용건을 묻긴 했지만 이미 안내원은 손짓으로 경비병을 부르고 있다. 경비병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무장이 평소보다 충실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그 장면을 바라봤다.
대부분 사람들은 지크 일행이 경비병들에게 쫓겨나리라 예측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중앙 경매에 참여하려고 왔다.”
지크의 말에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안내원도 비죽이 웃었다.
“참가비가 필요합니다. 최소 금화 200개요.”
안내원이 말을 하고 팔짱을 낀다. 어디 한번 내볼 테면 내보라는 반응이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이런 무시는 화가 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귀여워 보일 뿐이다.
“VIP객실로 내 놔.”
그리고 지크가 품에서 자루 두 개를 꺼내 안내 데스크에 던졌다. 자루의 끈이 풀리며 데스크에 금화가 촤르륵 쏟아져 나왔다.
“…어?”
지크 일행을 무시하던 안내원도, 당장이라도 지크 일행을 끌어내려던 경비병도 전원 시선을 금화에 뒀다.
“뭐야, VIP 객실은 금화 1,000개 아니었나?”
지크가 세보라며 고개를 까닥인다. 안내원은 동료와 당황스럽게 시선을 맞춘 후, 금화를 세었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자루에 든 금화가 정확히 1,000개임을 확인했다.
“확인했지? 안내해.”
지크가 거드름을 피웠다. 당황하던 안내원이 곧 공손하게 자세를 바꿨다. 경비병에게 다급하게 손짓을 해 물러나게 만들었다.
중앙 경매장에선 돈이 전부. 참가할 수 있는 돈이 있다면 그게 설령 거지꼴을 하고 있더라도 손님이다.
“죄, 죄송합니다만, 손님. VIP 객실은 예약을 하셔야….”
“아, 그러고 보니 그걸 안 줬네.”
팔랑!
지크가 무언가를 던졌다. 그건 한 장의 종이였다.
자유롭게 휘날리면서도 그 종이는 똑바로 안내원의 발밑에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주워둔 안내인이 침을 삼켰다.
그건 VIP객실 예약 서류였다.
안내원은 더욱 얼어붙었다. 이건 돈만 많다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미다스에게 뜯어내길 잘했어.’
지크는 속으로 낄낄거렸다. 경매장에서 상당히 신용을 받고 있는 것 같은 미다스에게 요구해본 건데 의외로 미다스는 쉽게 내줬다. 그만큼 ‘대지의 눈물’이 중요했으리라.
“뭐 해? 안내 안 해?”
지크가 내려다보듯 고개를 젖혔다. 안내원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객실까지 안내할 자를 불렀다.
“아, 그런데 말이야.”
객실로 떠나기 전, 지크가 안내원을 쳐다봤다. 그리고 검지를 쭉 세운 채 그의 가슴을 밀듯 연신 찔렀다.
“조금 더 서비스 정신을 새겨 넣어, 이 새꺄. 내가 너처럼 싸가지 없는 놈은 처음이야.”
그러고는 안내원의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친다. 많이 아픈 건 아니지만 분명 무척 굴욕적인 행위였다.
“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친절하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는데, 그러면 손님을 파악할 줄 아는 안목이라도 있어야지. 그 눈깔은 장식이냐? 이런 대단한 경매장에 어떻게 너 같은 아마추어가 있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안내원은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를 계속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잘해.”
지크는 안내원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객실로 올라갔다.
남은 건 수치와 굴욕에 부들부들 떠는 안내원과 그에게 몇 걸음 떨어져 있는 동료, 그리고 주변에서 그를 보고 웅성대는 사람들뿐이었다.
“굳이 그럴 것까지 있었어? 자기 일을 하던 것뿐이잖아.”
라일라는 지크의 행위가 조금 불쾌했던 듯 물었다. 하지만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분명 그 녀석 일은 맞지만, 적어도 예전에 레오나를 조롱하던 행위는 그 녀석의 일이 아니지.”
“아!”
설마 지크가 레오나의 복수를 해줬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라일라는 조금 놀랐다.
엘프의 좋은 청력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레오나도 감동한 눈초리였다.
물론 지크는 레오나의 복수 겸 자신의 취미 생활을 한 것뿐이었지만.
안내를 받은 지크 일행은 중앙 경매장의 VIP객실로 들어갔다.
“우와아아!”
VIP객실에 들어선 사람들은 놀랐다. 한스와 스녹, 레오나가 입을 한껏 벌리고 탄성을 질렀다.
방은 꽤 넓었다. 바닥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고 고급스러운 장식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문 맞은 편 벽은 뻥 뚫려있었다. 난간에 손을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경매 물품을 소개하는 곳이 그대로 보였다.
“돈값은 하네.”
지크는 방 한편에 비치해둔 와인 한 병을 까 잔에 따랐다. 자신의 방처럼 스스럼없어 보이는 행동이었다.
“너희들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어라.”
지크는 테이블 위에 얹혀있는 과일 바구니와 그 옆에 놓여 있는 메뉴판을 보며 말했다.
한스와 스녹이 바로 달라붙었다.
지크는 이런 걸로 돈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지크에게 얼마나 많은 재산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둘 아니, 노웸까지 껴 셋은 뭐가 더 맛있을까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레오나는 난간에 손을 대고 아래를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이 비장하다. 드디어 그녀의 목표인 ‘호수의 눈물’을 찾는 순간이 온 것이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지크가 레오나의 옆으로 와 와인 한 잔을 권하며 말했다
“호수의 눈물은 반드시 찾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지크의 모습은 레오나에게 너무도 믿음직하게 보였다.
얼마 후.
“그럼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테라스 너머로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