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한 마디로 자신이 꿀릴 이유는 없다. 속으로는 흥미와 관심이 넘쳐났지만 미다스는 일부러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겉과 속을 따로 하는 것 정도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닌,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지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미다스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별로 놀라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역시 평범한 사기꾼은 아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미다스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좋아. 항복이야. 아쉬운 건 이쪽이니 필요한 건 전부 말하지.”
지크가 두 손을 들었다. 너무도 쉽게 그가 항복 선언을 하자 오히려 미다스가 놀랐다.
하지만 지크는 오히려 시원하다는 듯 미다스의 앞에 있는 와인병을 빼앗아 병째로 들이켰다.
한 병에 웬만한 서민 가정의 여섯 달치 생활비와 맞먹는 와인을 야만적으로 들이켜는 지크의 모습에 미다스의 분노가 다시 샘솟았다.
하지만 그는 분노를 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속이 타는 건 어쩔 수 없어, 자기가 들고 있는 잔의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쿵!
지크가 탁자 위에 와인병을 거칠게 놓았다. 병의 내용물은 절반 이상이 사라져 있었다.
“좋은 와인이네!”
입술에 남은 와인을 혀로 핥으며 지크가 와인병의 상표를 찾았다.
“포르나인! 크으, 이 비싼 와인을 먹다니! 역시 황금마차를 끌고 다니는 인간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말할 용건이 있는 게 아니었나?”
아무리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 해도 언사가 거칠어지는 건 막을 수 없는지 미다스의 어조에는 불쾌함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성급하긴.”
지크는 치즈 한 덩이를 나이프로 잘라 안주로 씹어 먹으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예전에 추측한 바와 같이 난 그 엘프에게 ‘호수의 눈물’과 비슷한 보물이 있다는 걸 알고 접근했다. 그리고 하나하나 신뢰를 쌓아갔지.”
미다스는 이야기를 계속 해보라며 턱을 까딱거렸다.
“너도 봤다시피 이 엘프 아가씨는 호구야. 아니, 호구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개호구지. 그런데 이 개호구 아가씨도 그 보물을 지키는 일에만큼은 철벽이었단 말이야.”
골치가 아픈지 지크가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 미다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짜증 나는 놈의 불행만큼 그에게 기분 좋은 일은 없었다.
“힘으로 빼앗을 생각은 안 했나.”
상대가 먼저 숙이고 들어오자 미다스도 더 이상 견제를 하지 않고 물었다.
물론 그의 머리는 팽팽 돌아가며 상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재고 있었다.
“누가 엘프 아니랄까봐 강했거든. 나나 우리 일행도 상당히 강한 편이긴 하지만, 녀석이 전력으로 도주하면 잡을 순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녀석이 도망간다면 그게 무슨 쪽팔린 꼴이야.”
그 모습을 상상했는지 미다스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툰겔로 돌아온 건가? 답이 없어서?”
“답이 없다기보다는 다른 답을 찾으러 온 거지.”
미다스는 와인병으로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방금 지크가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마신 걸 기억한 것이다.
그 더러운 와인을 마실 생각은 없어 종업원을 찾다가 신음을 흘렸다.
혼자만의 식사를 방해받기 싫어 종업원들을 전부 내보낸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미다스는 손수 몸을 일으켜 와인 한 병과 새 잔을 가지고 왔다.
상표를 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싸구려였기 때문이다.
‘하긴, 귀한 건 전부 저장 창고에 있겠지.’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건 귀찮았다. 미다스는 싸구려 와인 -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충분히 비싼 - 와인을 새 잔에 따라 한 모금 머금었다.
“너희들이 찾으러 간다던 보물은 어떻게 됐지?”
“왜 이러실까. 그런 걸 믿을 만한 분은 아니실 텐데.”
“그도 그렇지.”
미다스가 몸을 바로 했다. 더 이상 설명을 듣는 건 필요 없어 보였다.
“네가 원하는 건 뭐냐.”
“돈.”
지크가 바로 대답했다.
“솔직히 그 엘프의 보물을 얻으려고 온갖 발악을 한 이유도 돈 때문이지. 보물 그 자체엔 관심이 없어.”
“그런 놈이 금괴를 놓고 가?”
미다스는 지크가 자신이 준 황금을 카운터에 던지고 갔을 때를 언급했다.
“이봐. 그때는 엘프가 바깥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엘프들 귀 좋은 거 몰라? 신뢰를 주려면 그런 것부터 조심해야 돼. 그때는 내가 욕망 때문에 움직이는 놈이 아니라는 걸 계속 보여줘야 했으니까.”
과연 철저한 놈이다. 분명 그 금괴의 가치는 높았지만, 앞으로 들어올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스스럼없이 상대적으로 작은 가치의 금괴를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미다스는 새삼 지크가 사기꾼으로서 대단한 놈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만큼 위험한 놈이지.’
“나한테 떨어지는 건?”
“엘프가 가지고 있는 보물.”
“무슨 보물이냐.”
하지만 지금까지 잘 알려주던 지크가 마치 거리를 벌리듯 상체를 뒤로 젖혔다.
“미안하지만 이쪽도 상당히 많이 알려줬어. 슬슬 참가할 건지 말 건지 먼저 대답을 해줬으면 하는데.”
“전부 말한다고 하지 않았나?”
“‘필요한 건’이라고 전제조건을 붙였잖아.”
“보물의 정체도 충분히 필요한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네.”
침묵 속에 잠시 둘 사이로 신경전이 오고 갔다. 누가 먼저 시선을 떼면 지기라도 하듯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강하게 응시했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먼저 손을 든 건 아쉬운 게 있는 지크였다.
“‘대지의 눈물’이라는 거야. 정확한 정체는 나도 몰라. 엘프가 엄청나게 아끼고 있다는 것만 빼고 말이야.”
“그 외의 정보는?”
“없어.”
“그럼 협력은 불가능하다.”
“그럼 이쪽도 어쩔 수 없네. 깔 수 있는 정보는 다 깠는데도 안 된다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지.”
지크는 자신의 앞의 와인병을 잡아 쭈욱 들이켜 모두 비웠다.
“잘 있으라고. 부자 나리.”
“잠깐.”
지크가 미련 없이 일어나려 하자 미다스가 그를 제지했다.
“계획은?”
“더 이상 말해줄 건 없어. 그쪽이 참가를 할지 말지 정하는 게 먼저야.”
지크도 더 이상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줬다.
미다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정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좋아. 생각이 있다면 이쪽으로 사람을 보내.”
지크가 자신이 머무르는 숙소를 알려줬다.
“시한은 이번 뒷 경매가 열리기 전까지야. 그 후에 계약은 없는 걸로 알라고.”
“알았다.”
이번에야말로 지크는 일어섰다. 스스럼없이 바깥으로 나가려던 지크가 멈칫했다. 잠시 움찔거리더니 몸을 빙글 돌려 다시 미다스를 쳐다봤다.
“있잖아.”
“뭐지?”
지크가 조금 겸연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예전에 주려던 금괴, 지금도 줄 수 있나 해서.”
미다스는 잠시 벙쪘다. 하지만 곧 크게 웃더니 품에서 금괴 하나를 집어던졌다.
지크의 표정이 헤벌쭉해지는 걸 보고 미다스는 더욱 크게 웃었다.
* * *
미다스는 자신의 저택에 돌아와 있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넣고 몸을 푹 담근다. 그의 저택답게 그가 몸을 담그고 있는 욕조 또한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하루 간 쌓인 몸의 피로가 모두 풀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그의 신경은 피로가 풀어지는 걸 느끼는 것보다는 다른 쪽에 쏠려있었다.
‘들리는군.’
오늘 지크에게 내던지듯 줬던 금. 그것은 바로 미다스의 지배력이 미치는 특수한 금이었다.
미다스는 히죽 웃었다.
‘좋다고 받아가는 꼴이 웃겼어.’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는 정신을 집중했다. 금괴를 통해서 지금 금괴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 정보가 들어온다.
‘시야는 막혔군.’
어딘가에 넣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법 상자 같은 곳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러면 됐다. 마법 상자에 들어가 있으면 아무리 그라도 연결을 할 수 없으니까.
‘목소리는 들려.’
미다스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 어땠어?
여성의 목소리다. 그 엘프의 목소리는 아니다. 아마도 사기꾼과 같이 있던, 그 끝내주게 예뻤던 여자가 아닐까 생각됐다.
- 일단 제안은 던지고 왔어.
이건 그 사기꾼의 목소리다.
‘정확히 시간을 맞춘 것 같군.’
화제가 분명 자신과 만난 것에 대한 것이다. 그는 더욱 목소리에 집중했다.
- 반응은?
- 관심은 보였어. 이제 저 쪽이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지.
- 넘어올 것 같아?
- 모르겠어.
금괴로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조금만 더 있으면 엘프가 갖고 있었다는 보물에 대한 정보가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 젠장! 설마 ‘대지의 눈물’이 ‘호수의 눈물’이 없으면 그냥 고철덩어리 같은 존재였다니!
고급 정보가 나왔다. 미다스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저 멍청한 꼭두각시들이 자신을 위해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다.
- 기껏 뺏어놨는데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잖아!
‘‘대지의 눈물’은 이미 뺏어놨었군.’
누가 사기꾼 아니랄까봐 자신에게도 사기를 치려했던 모양이다.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새겨졌다.
그는 사기를 치면 쳤지 당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픈 꼴을 좀 보여줘야겠어.’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정보를 더 얻는 게 중요하다.
- ‘호수의 눈물’은 비싸겠지?
- 당연하지. 그 ‘윕스 미다스’도 노리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녀석과 돈으로 경쟁하는 건 미친 짓이야.
미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을 만들어내는 그의 앞에선 세상 어떤 존재도 돈으로서는 의미가 없다.
‘적어도 그런 주제 파악은 잘 하고 있군.’
미다스는 처음으로 지크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뿐. 지크에게 따끔한 꼴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바뀐 건 아니었다.
- 그러니 어떻게든 계획을 성공시켜야 돼. 걱정하지 마. 계획만 잘 성공하면 ‘호수의 눈물’은 물론이고 ‘윕스 미다스’의 돈도 어느 정도 긁어낼 수 있을 거야.
‘안됐지만 사기꾼.’
미다스가 욕조의 물을 손바닥으로 들어 올렸다. 당연히 물은 손가락 사이로 줄줄 새어나갔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게 꼭, 얼마 후에 흘리게 될 사기꾼의 피 같았다.
* * *
한스와 스녹은 방 가장자리에 선 채 방 안에서 펼쳐지는 희극을 어처구니없이 쳐다봤다.
방 한가운데에 테이블이 있고, 그 위로 두꺼운 주머니 하나가 올려져 있다. 그 안에는 오늘 ‘윕스 미다스’에게서 받아온 금괴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은 지크와 라일라가 심각한 어조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와 내용에 비해 둘의 얼굴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라일라는 유적에서 가져 온 골렘의 핵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었고 지크는 한 손으로 미스릴 조각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심각한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둘의 입은 번갈아서 계속 열렸고 대화 아니, 대화 비스무리한 것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그건 대화가 아니었다. 금괴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 미다스를 속이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각본을 읽으며 연극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지크와 라일라는 유명 극단의 대배우 뺨치는 목소리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일을 따로 하면서.
지크야 원래 사기꾼 같은 역할을 종종 했다지만 라일라가 설마 저렇게 사람을 속이는 일을 잘 할 줄은 몰랐다.
그 신기에 가까운 연극을 보며 한스와 스녹은 동시에 생각했다.
둘의 모습은 영락없는 사기꾼, 그것도 ‘부부 사기단’ 같은 모습이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