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지크는 윈두르로 갑옷의 팔을 내리 찍었다.
팔뚝이 잘려 나갔다. 하지만 갑옷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구멍만 뻥 뚫린 팔뚝을 지크를 향해 뻗는다. 잘려 나간 팔도 뭍에 나온 생선처럼 펄떡댔다.
그 모습을 보고 한스와 스녹, 라일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지크는 담담하게 윈두르를 다시 휘둘렀다.
서걱!
이번엔 손바닥이 가로로 잘려 나갔다.
그럼에도 손목, 손가락들이 제각기 움직이며 지크를 공격하려는 듯 팔딱팔딱 뛰었다.
그새 다른 갑옷들이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지크는 담담히 그것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두 체의 갑옷이 다시 넘어갔다. 하지만 이놈들도 여전히 움직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크는 이번엔 손가락의 관절 부위를 잘라냈다.
툭!
관절이 잘려 나간 손가락의 윗부분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지크의 검이 빠르게 움직여 손가락의 관절을 모두 박살내고 아직까지 접혔다 펴졌다를 반복하던 손목마저 아작을 냈다.
전부 움직임이 멈췄다.
지크는 일행을 쳐다봤다. 일행은 각자의 방식으로 갑옷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한스는 지크와 비슷하게 검으로 갑옷을 찌르고 베어내 어떻게 하면 갑옷이 멈출지를 연구 중이었고, 스녹은 아예 갑옷들을 땅 안에 매장시켜 으깨고 있었다. 그리고 라일라는 갑옷들을 전부 얼려 놓고 반응들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레오나가 벙찐 모습으로 지켜보는 모습이 보인다.
‘역시 순진하군.’
죽지 않는, 누가 봐도 이상성이 역력한 움직이는 갑옷을 상대로 ‘어떻게 하면 죽을지 연구해보자’라는 지크의 말에 충실히 따르는 세 명이 어떻게 봐도 이상한 편이었지만, 지크는 그저 레오나가 순진하다는 생각으로 끝냈다.
지크에게 있어서는 그 세 명이 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지크는 동료들의 앞으로 움직이지 않는 갑옷을 툭 쳐 날렸다.
“관절을 부숴라. 그러면 멈춘다.”
서걱!
지크의 말을 듣자마자 한스가 움직였다.
빛을 휘감은 에스텔레이드가 힘차게 그리고 빠르게 휘둘러진다. 갑옷을 베어 넘기고 움직이는 모든 관절을 향해 검을 놀렸다.
순식간에 해체되다시피 한 갑옷이 곧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에 비해 스녹의 공격은 심플했다.
콰드득! 콰드드득!
지면 속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려댄다.
갑옷이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소리를 낼 수 있다면 아마도 지면 아래에서는 섬뜩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스스슥.
지면이 꿈틀거리며 삼키고 있던 것을 토해냈다. 이리저리 찌그러지고 부서진 갑옷의 잔해가 올라왔다.
하지만 완전히 가루로 만든 것은 아니었기에 몇 개의 관절이 살아서 움직였다.
콰직!
그러나 그것도 덮쳐온 돌덩이들에 아작 났다.
라일라는 훨씬 과격했다. 얼음 마법으로 갑옷을 얼려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영창을 읊는다. 그리고 쏘아냈다.
콰아앙!
새빨간 화염이 얼어붙은 갑옷을 휘감았다. 표면에 내려앉은 서리를 순식간에 거둬내고 열을 급속도로 올린다.
철컹!
얼어붙은 몸이 풀린 갑옷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라일라에게 달려들려고 한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 갑옷은 쓰러졌다.
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쉽게 쓰러지네?”
라일라는 영창을 중지시켰다.
그 모습들을 레오나는 뒤에서 멍청하게 쳐다봤다.
자신을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강하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나, 나도…!’
레오나는 급히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관절!’
다행히 금속 갑옷이기에 진짜 생명처럼 관절이 많진 않다.
그러나 화살 한 대로 관절 하나를 부순다고 했을 때 엄청난 화살이 필요할 거라는 것도 사실.
그러나 레오나는 굳이 화살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퍼엉! 퍼엉!
단 두 발의 화살이 갑옷 하나의 무릎 관절을 둘 다 날려 버린다.
쿵!
갑옷이 땅을 뒹굴었다. 하지만 역시 갑옷은 손으로 몸을 질질 끌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오나는 쓰러진 갑옷엔 시선도 주지 않고 다른 갑옷들의 다리도 꿰뚫었다.
모두 세 체의 갑옷이 땅바닥에 널부러졌다.
여전히 움직이긴 하지만 그들의 기동력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터벅! 터벅!
레오나가 그것들의 근처로 걸어갔다.
후웅!
한 놈이 레오나에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레오나는 그 공격을 무척이나 쉽게 피했다.
퍼엉!
화살이 갑옷의 팔 관절을 박살낸다.
퍼퍼퍼퍼퍼펑!
연신 쏘아진 화살이 팔의 관절을 모조리 쏘아 맞혀 부쉈다. 순식간에 팔 한 쪽이 완전히 해체됐다.
철컹!
갑옷은 다른 손으로 레오나를 붙들으려 했지만 레오나는 다시 손쉽게 피했다.
그 와중에 땅에 꽂힌 화살들을 회수했다.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녀석을 향해 지근거리에서 쏘아낸 터라 화살들이 전부 지척에 박혀 회수가 쉬웠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위를 당겼다.
퍼퍼퍼퍼퍼펑!
다시 쏘아진 화살의 폭풍우. 갑옷의 다른 팔도 박살났다.
끼긱! 끼기긱!
이제 움직이는 거라곤 고관절과 목관절뿐.
퍼억!
레오나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갑옷을 짓밟고는 마지막 관절을 향해 화살들을 발사했다.
투욱!
투구가 굴러떨어지며 갑옷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바닥에 박힌 화살을 회수한 레오나가 남은 것들을 확인했다.
아직 꿈틀거리는 발 두 개와 갑옷 두 개. 레오나는 다시 활을 시위에 걸고 그것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나머지 것들이 전부 산산이 분해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레오나가 마지막 관절을 부쉈을 때 더 이상 움직이는 갑옷은 없었다.
* * *
“이건 대체 뭐야?”
자신이 박살낸 갑옷을 쪼그려 앉아 뒤적이던 레오나가 말했다.
“인간 세계에선 이런 게 흔해?”
“설마요. 그 정도로 막나가는 세상은 아닙니다.”
지크는 뒤이어 올 ‘아직은’이란 말은 삼켰다.
“아마도 우리가 보물을 노린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누가 보낸 것 같습니다만.”
“그럼 라일라가 말한 대로 골렘인가?”
요 며칠간 지크 일행과 안면을 쌓은 레오나는 라일라를 제법 스스럼없이 불렀다.
“아닐 거야. 마법적인 흔적도 없고. 무엇보다 골렘은 쉽게 죽진 않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몸의 각 부위가 따로 놀지도 않아. 보통 코어가 있는 부분을 깨뜨리면 죽고, 그렇지 않는다 해도 코어와 연결이 끊어진 부분은 움직임을 멈춰.”
“그럼 대체 뭐야?”
“글쎄.”
라일라도 레오나의 곁에서 파편을 내려다봤다.
“이만 가죠. 어차피 계속 쳐다본다 해도 제대로 된 답을 내리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지크가 끼어들어 라일라와 레오나가 호기심을 중단시켰다. 두 사람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하나 가져가볼까?”
레오나가 파편 하나를 집어 든다. 하지만 지크가 말렸다.
“뭔지 모를 것들을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됩니다. 게다가 지금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잖아요?”
“아, 그렇지.”
레오나가 파편을 그대로 내던졌다. 그리고 보물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섰다.
일행은 다시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크도 윈두르를 등에 걸쳐 메고 일행을 따랐다.
지크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갑옷의 파편을 쳐다본다.
지크는 대부분 철저하게 으깨져 있는 관절 부분에서 반짝이는 뭔가를 발견했다.
하지만 뭔가 특이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저 흐릿한 미소를 지은 채 유유히 자신의 일행을 따라갈 뿐이었다.
그렇게 전투 장소에는 갑옷이었던 금속 쪼가리만이 남아 나뒹굴었다.
* * *
“골든 캐슬?”
라일라가 물었다.
“그래. ‘마인 골든 캐슬 윕스 미다스’. 그놈이 맞을 거야.”
지크는 앞에 있는 모닥불을 나뭇가지로 뒤적여 불을 키우며 대답했다.
밤이 깊어 지크 일행은 야영을 하고 있었다.
가도를 벗어나자마자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기에 그들이 이동한 거리는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무척이나 길었다.
한스와 스녹은 저녁 거리를 잡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레오나도 맛있는 걸 갖고 오겠다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야영지에 둘만 남은 상태에서 지크는 라일라에게 미다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기억에 있어?”
“으음, 녀석은 모르겠어.”
라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뭐, 척 봐도 재수없는 놈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잘 봤네. 그것만 알면 90%는 안 것과 같아.”
지크는 킬킬댔다.
“별명에 황금이 들어가는 놈답게 대부분 돈으로 해결하려는 놈이야. 폭력과 야만이 판치던 마인 시대에도 금은 통했거든. 그걸로 상당한 세력을 유지했지.”
심지어 같은 마인 몇을 금전으로 회유한 적도 있을 정도다.
“황금 하나면 세상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놈이야.”
“이제 이해가 되네. 그런 놈이라면 그런 마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이상할 게 아니지.”
라일라는 그 센스를 의심하게 만들었던 황금 마차를 떠올렸다.
“그런데 재력만으로 마인 소리를 들을 수가 있나? 힘이 없으면 뺐기는 게 마인 시대잖아.”
“물론 자체적인 무력도 있었어. 녀석의 이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야.”
골든 캐슬. 촌스러운 이명이지만 그만큼 녀석을 잘 설명하는 것도 없었다.
“녀석은 연금술사다.”
연금술. 가치가 없거나 낮은 금속을 황금으로 바꾸는 기술을 일컫는다.
“그래서 그렇게 부자였구나.”
라일라는 납득했다.
“가치 없는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능력도 대단하긴 하지만, 녀석의 능력은 그게 끝이 아냐.”
지크는 미다스의 마차를 떠올렸다. 통짜 금을 마차로 만들어 운용할 수 있던 이유.
“녀석은 자신이 만든 금 중 일정한 처치를 한 금에 한해 완벽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
지배력. 추상적인 말이다.
사람에게 사용한다면 그를 자신의 뜻대로 행사한다는 뜻이고 사물에게 사용한다면 그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이겠지만 지크가 그런 뜻으로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지배력?”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거나 형태를 변형시킨다거나 강도를 올린다거나 하는, 금을 완벽히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이야.”
“그건 굉장하네.”
“녀석의 전성기 때는 더 굉장했어. 골든 캐슬이란 이명은 비유적인 게 아냐. 녀석은 정말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금으로 만들어진 황금성을 소유했었다.”
태양이 떠오르면 그 빛을 사방으로 반사시켜 태양보다 더 웅장하게 보였다고 한다.
“그 성 자체가 녀석의 요새였어. 도저히 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강도로 만들어진 성벽은 모든 공격을 튕겨냈고 성 자체가 녀석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모습을 바꿔 적들을 공격하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고 하지.”
공방일체의 공포스러운 이동 요새. 그것이 황금성. 윕스 미다스에게 골든 캐슬이란 이명을 부여한 성이었다.
“우리를 공격했던 갑옷도 녀석이 보낸 건가? 아, 아니지. 갑옷들은 분명 통짜 쇠였지.”
“아니, 분명 통짜 쇠긴 했지만 녀석들의 관절 안쪽에 금이 입혀져 있었어.”
“그럼 관절만 움직여서 그것들을 조종했다는 거야?”
“맞아.”
“…괜찮겠어?”
라일라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뭘 말이야?”
“그런 녀석이 지금 우리를 노린다는 거잖아. 네 말을 들어보면 상당히 위험한 거 아냐? 그러고 보니 레오나에게 뜬금없이 금괴를 건넸다고 했지. 설마 그 금으로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선가?”
“눈치가 제법 빨라졌네.”
지크는 피식 웃었다. 그 때문에 레오나가 갑옷의 파편을 가져가는 것도 말린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건 없어. 그거야 미래의 얘기니까. 지금의 녀석이 전성기 때의 힘을 갖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어. 만약 지금 그런 힘을 갖고 있다면 녀석이 유명하지 않을 리가 없지. 당장 난장판을 치며 돌아다닐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도 있고 말이야. 그리고 잊고 있나 본데, 라일라.”
지크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때의 난 녀석보다 더 대단했어.”
“…어련하실까.”
라일라가 기막혀했다.
* * *
지크와 일행이 이동을 시작한 지 정확히 10일. 울창한 삼림으로 뒤덮인 어느 거대한 산에 그들은 도착했다.
물론 일반인이 10일 만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절대 아니었다.
눈앞으로 거대한 폭포가 보였다. 주변에 뿌연 물안개를 피우며 매 순간마다 막대한 물을 아래 웅덩이로 쏟아낸다.
신비롭고 장엄하며 대단한 광경.
그 숨 막히는 광경을 보고 전율하는 일행에게 지크는 폭포, 정확히는 폭포 뒤를 가리켰다.
“저기가 목적지다.”
막대한 보물을 품고 있는 미지의 장소가 그곳에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