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뭔 소리냐?”
지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레오나에게 원하는 것.
지크에게 그런 것은 없었다. 지크의 인성은 정말로 더럽고 지금 하고 있는 행동도 분명 사기꾼과 똑 닮긴 했지만, 놀랍게도 그의 행동은 선의였던 것이다.
“노리는 건 없어. 내 행동은 순수한 성의야. 아, 혹시 너도 남을 돕는 선의에 눈을 뜬 거냐? 그런 거라면 내가 돕게 할 수도 있는데.”
“웃기는군. 너는 만약 나 같은 놈이 선의를 위해서 남을 돕는다고 생각하면 믿겠나?”
“너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확답을 내릴 순 없다만 이 짧은 순간에 본 네 인상으로만 판단한다면 절대 못 믿지.”
“지금 네가 말한 게 내 답이다.”
“뭐가 답이냐, 멍청아. 나는 달라. 진짜로 착한 일을 하는 중이라고.”
“그게 보물을 찾으러 간다는 거냐?”
“물론이지. 너도 껴볼래?”
미다스가 지크를 노려봤다.
“처음엔 그저 순진한 엘프 하나 꼬셔서 어딘가에 팔아 몸값이라도 받아내려는 줄 알았다. 주변 인간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데 그러기엔 넌 시간을 너무 끌었어.”
미다스는 레오나가 떠난 곳을 한 번 더 쳐다봤다.
“너를 저렇게까지 믿을 정도로 신뢰를 쌓아놨는데 뭐 하러 시간을 끌지? 예상 못한 사건이 터지기 전에 바로 끌고 가야지. 그런데 넌 그러지 않았어.”
지크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얘기를 계속 해보라는 듯 턱을 까닥였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 엘프에게서 뭔가 더 뜯어낼 게 있다고 말이야.”
“없어. 돈은 제법 갖고 있는 것 같다만, 네가 원하는 게 고작 금전 나부랭이는 아닐 것 같은데.”
“호수의 눈물.”
미다스가 눈을 번뜩였다.
“그것과 비슷한 것을 갖고 있다고 나는 판단을 내렸다.”
“미안하지만 난 ‘호수의 눈물’이 뭔지도 몰라.”
“그 엘프를 도와준다고 꼬드겼으면서?”
“물론이지. 나는 어디까지나 그녀가 ‘일족의 보물’을 찾게 도와주고 있을 뿐이야. 굳이 그게 어떤 건지 알아서 뭐 하겠어?”
푸른색의 보석이란 건 알고 있지만, 그게 왜 중요하고 어떤 때 사용하고 혹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지크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당연히 미다스는 믿지 않았다.
“…협력할 생각이 전혀 없군.”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만 너와 협력할 생각이 없는 것도 사실이야. 너 같은 사기꾼 같은 놈을 어떻게 믿겠냐.”
“…사기꾼 놈에게 사기꾼이라고 듣는 것도 참 달갑지는 않아.”
미다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불쾌한 눈으로 지크를 내려다봤다.
“그것도 질 떨어지는 사기꾼 놈에게 말이야.”
“그 말을 대체 어떤 사기꾼 놈에게 듣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러니까 평소의 행실을 잘했어야지. 나 같은 정직한 사람은 물론이고 사기꾼 같은 놈에게까지 사기꾼 소리를 듣는다면 너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지크는 자신의 앞에 있던, 미다스가 레오나에게 던졌던 금괴를 그에게 슥 밀어줬다.
“알았으면 앞으로 처신을 잘해. 그리고 이것도 챙기고. 네 거지? 이런 걸 휙휙 던져주니까 사기꾼처럼 보이는 거 아냐.”
“필요 없다. 어차피 그 엘프가 나를 웃게 한 대가로 준 것이니, 그 녀석에게 가져다줘라.”
“그래? 그러면 사양 않지.”
지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괴 같은 귀한 것도 줬으니 이건 내가 내지.”
그리고 카운터로 뚜벅뚜벅 걸어가 카운터 위에 금괴를 툭 떨어뜨렸다.
“계산은 이걸로. 잔돈은 필요 없어.”
카운터를 한 번 손바닥으로 때린 후 지크는 가게를 나왔다.
한스와 스녹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계산원이 당황한 눈으로 지크 일행과 미다스를 번갈아 쳐다본다.
지크의 등을 미다스가 조용히 노려봤다.
* * *
“기다렸지?”
경매장 밖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라일라와 레오나에게 지크가 다가왔다.
“잘 끝났어?”
“잘 끝나고 뭐고가 어디 있겠냐. 그냥 헛다리 짚고 희망사항 늘어놓는 놈에게 현실을 가르쳐준 것뿐인데.”
라일라의 질문에 대답한 지크가 어느 한쪽을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화려한 녀석이 있군그래.”
“우리도 저걸 보고 있었어.”
그것은 마차였다. 바퀴 네 개가 달리고 벽과 지붕이 있고 말 두 마리가 이끄는, 흔한 마차.
하지만 그 마차를 흔하게 만들지 않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아주 금으로 도배를 했군.”
벽, 지붕, 심지어 바퀴까지 황금빛으로 번쩍인다. 저 정도로 공을 들였다면 아마 내부의 인테리어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지크는 생각했다.
“어때, 아름답지 않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크는 저 정신 나간 모습의 마차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네 거였냐?”
그는 미다스였다.
금괴를 척척 내는 것부터 갖고 있는 부가 상당하다는 건 알았지만 마차에 금칠을 하고 다니는 미친놈일 줄은 몰랐다.
“너 같은 놈들은 꿈에서라도 갖지 못할 마차지.”
“그건 인정하마. 나는 꿈에서라도 갖지 못할 거야.”
마왕으로서 세상에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던 때도 이런 용감한 짓은 하지 못했다. 지크는 겸허히 패배를 인정했다.
‘아니, 잠깐. 그런데 이런 미친 짓을 하고 다닌 놈이 하나 있지 않았나?’
스케일은 지크가 아는 놈 쪽이 압도적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정신 나가도록 재미있는 짓을 하는 놈이 또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어이, 너 이름이 뭐냐?”
지크가 드디어 자신을 우러러보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걸까. 미다스는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윕스 미다스다.”
“…그렇군.”
지크가 묘하게 대답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라. 내가 건 조건은 나쁜 게 아니니까.”
“아니, 다시 생각할 필요 없어.”
은근하게 꼬시는 투의 미다스에게 지크는 딱 잘라 말했다.
“생각 없거든.”
미다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지크를 노려봤다.
“…그래. 꼭 그래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
불쾌감을 숨기지 않으며 그는 등을 돌렸다. 마차로 걸어가자 대기하고 있던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지크의 예상대로 마차의 내부조차 금빛으로 번쩍번쩍 빛났다.
마차에 탄 미다스가 창문 너머로 지크를 내려다봤다.
“후회하게 될 거다.”
“후회라. 한번 경험해보고 싶긴 했어.”
지크는 씨익 웃었다.
“어디 한번 해 봐.”
탁!
마차의 창문이 닫혔다. 마부가 고삐를 크게 내려치자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황금으로 빛나는 마차는 달리면서도 주변의 이목을 확 끌었다.
“마차에 도금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니. 세상에는 별 정신 나간 놈이 많네.”
라일라가 말했다. 한스와 스녹도 마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어이없어했다.
“도금 아니야.”
지크가 말했다.
“도금이 아니라고? 그럴 리가. 그럼 저게 금이 아니라는 거야?”
“금은 맞아. 단, 도금이 아닐 뿐이지.”
“…설마 저게 통짜 금이란 소리는 아니지?”
금은 무른 데다 무겁다. 적어도 마차를 만들 재료로서 알맞은 재료는 아니다.
설혹 마차로 만들었다고 해도 말이 오래 끌지 못할 것이고, 혹 끈다고 해도 마차 자체가 쉽게 파괴될 공산이 크다.
“통짜 금 맞아.”
“하지만 잘 굴러가잖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놈이 타고 있으니까.”
윕스 미다스. 지크의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었다.
‘마인 골든 캐슬. 저놈이 이 시기에 여기 있었군.’
지크는 멀어져가는 황금 마차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 * *
다음 날, 지크 일행은 보물을 찾기 위해 출발했다.
‘호수의 눈물’을 곧 찾을 거라 생각한 레오나는 물론이고 한스와 스녹도 순전히 보물 찾기라는 로망에 무척 들떠 있었다. 그리고 라일라도 기대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들은 툰겔을 나와 가도를 걸었다.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가도를 통해 움직일 생각이었다.
인적이 드물어지고 작은 야산으로 난 길을 걸을 때였다.
“지크!”
“알아.”
라일라의 경고에 지크는 윈두르를 꺼내 들었다. 한스와 스녹도 전투 준비를 했다.
레오나도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등 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활시위에 걸고 주변을 둘러본다.
“헛수고하지 말고 나와라.”
지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마력이 담긴 그 목소리는 주변에 선명하게 퍼졌다.
푸스럭!
가도 주변으로 흩어져 있던 수풀에서 뭔가가 나왔다.
“이건 또 개성 넘치는 놈들이군.”
지크의 말대로 수풀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은 단순한 강도나 산적이 아니었다.
몸을 완전히 감싼 단단한 전신 갑옷. 얼굴까지 두꺼운 헬멧으로 가려 본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마치 기사 같은 차림새.
하지만 아무리 야산이라고 해도 이런 산속에서 저런 전신갑옷을 입고 움직인다는 건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상대는 그 어려운 일을 가뿐히 해냈다.
텅!
대화는 관심도 없다는 듯 ‘갑옷 입은 자’들이 일제히 지크 일행을 습격해 왔다. 숫자는 열둘.
하지만 지크 일행도 절대 만만한 집단이 아니다.
지크는 윈두르를 들어 올렸고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꽉 쥐었다. 스녹이 손을 들어 올리고 라일라가 영창을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공격을 가한 건 레오나였다.
슈욱!
화살 한 발이 그녀의 손에서 쏘아진다.
화살이란 게 보통 빠르기 마련이지만 무슨 수를 부렸는지 그녀의 화살은 마력으로 강화된 눈으로도 쉽게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퍼억!
화살이 정확히 ‘갑옷 입은 자’ 한 명의 머리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그 힘에 ‘갑옷 입은 자’가 크게 넘어졌다. 머리에 맞았으니 분명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벌떡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녀석들은 아닌 것 같네.”
라일라가 말했다.
“마법적 기운 같은 건 느껴져?”
“아니.”
라일라가 그렇다면 그럴 확률이 높다.
‘역시 그 녀석이군.’
지크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화살이 통하지 않자 레오나의 눈썹이 솟았다.
화살 한 대를 더 들어 시위에 건다. 다시 화살이 쏘아졌다.
하지만 이번 화살은 아까와 달랐다.
콰앙!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날아간 화살이 가장 앞에 있던 ‘갑옷 입은 자’의 복부에 꽂혔다.
콰드득!
갑옷이 회전하는 화살에 말 그대로 쥐어 뜯긴다. 엄청난 위력에 갑옷의 옆구리 부분이 도려내졌다.
이번 공격도 분명 생명이 끊겼어야 할 공격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갑옷 입은 자’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골렘인가?”
라일라가 갑옷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눈을 찌푸렸다.
갑옷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은커녕 그 비슷한 것도 없다. 혹 강대한 화살의 위력에 몸통조차 소실된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면 육편이나 적어도 흩날리는 피 정도는 보여야 한다.
“어? 어?”
기세 좋게 화살을 쏘아낸 레오나가 당황한다. 자신의 화살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처음인 것이다.
“어, 어떻게 하지?”
경험 없는 티를 그대로 드러내며 당황하는 그녀를 지크가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오히려 즐겨보죠.”
지크는 한 발 앞으로 나서 윈두르를 휘둘렀다.
서걱!
갑옷 하나가 두 동강 났다. 하지만 녀석은 계속 움직였다.
땅으로 떨어진 상반신은 계속 기어왔고 하반신도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당황하지 않았다.
퍼억!
지크는 하반신을 걷어찼다. 상반신에도 윈두르를 박아 넣었다.
아직도 버둥거리는 녀석들을 보며 지크가 말했다.
“이놈들이 어떻게 해야 죽는지 같이 알아봅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