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경매 물품을 설명한 종이들이 붙어 있는 나무판들은 로비 한쪽 면을 꽉 채울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역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은 중앙 경매장에 올라올 물품 설명서들이 붙어있는 곳이었다.
나무판의 크기가 여타의 것들보다 훨씬 더 크다. 물품들을 설명하는 종이도 정교한 삽화와 함께 훨씬 더 자세히 설명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종이 가장 밑자리에 적혀 있는 경매 시작가도 다른 나무판에 있던 것들보다 월등히 더 높았다.
레오나는 물품 설명서들을 천천히 훑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래에 있는 경매 시작가다.
아직 인간 세계의 시세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녀지만 그녀 나름으로 가치를 가늠했다.
‘이건 사과 30만 개. 이건 사과 35만 개. 이건 사과 배, 백만 개…!’
아득히 높은 숫자의 향연에 레오나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져갔다. 게다가 이것들은 경매시작가라고 했다.
레오나도 보석을 팔기 위해 경매에 한 번 참가해본 만큼 경매 시작가가 뭔지는 알고 있다.
‘만약 ‘호수의 눈물’이 여기에 나온다면….’
자신이 갖고 있는 돈과 보석으로는 도저히 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해소됐다.
“발견했어?”
지크의 물음에 라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레오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것 참, 설마 중앙 경매장에도 올라오지 않았을 줄은 몰랐는데.”
지크가 중앙 경매장의 물품 설명서를 붙여 놓은 나무판을 쳐다봤다.
어이없게도 그들은 거기서 ‘호수의 눈물’의 설명서를 찾지 못했다.
“못 찾은 건 아니겠지?”
라일라가 말했다. 하지만 지크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서로 네 번씩이나 찾아봤잖아. 이 정도로 찾았는데 없다면 그건 정말로 없는 거야.”
두 번째부터는 아예 눈에 마력까지 담아 그것들을 찾았다. 하지만 그렇게 두 번을 더 찾았음에도 ‘호수의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이 건물에서 그 보물이 느껴지십니까?”
“그, 그건 확실해.”
찾는 게 없어 울상을 지으면서도 레오나는 그 점에서는 자신을 보였다.
“일단 돌아가 보죠. 아직 설명서를 작성하는 도중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크의 머릿속엔 또 다른 가능성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그게 벌써부터 있던 건가?’
* * *
“뒷 경매장?”
오늘도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 지크의 방에 온 라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물론 정식 이름은 아니야.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뿐이지.”
의자에 편히 앉아있던 지크는 옆에 세워둔 윈두르의 손잡이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명칭으로 대충 어떤 곳인지는 상상이 가지?”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지크는 피식 웃었다.
“이 세상의 가치 있고 비싼 물품이 거래된다는 건 원래의 티리울 중앙 경매장과 동일하지만 뒷 경매장에서는 몇 개의 조건이 더 붙어.”
마치 범죄 공모를 하듯 지크가 과장되게 목소리를 낮췄다.
“위험한 것, 금지된 것, 윤리에 어긋나는 것 등등.”
“한 마디로 구매한 게 들키면 위험한 그런 것들을 말하는 거잖아.”
“그렇지.”
빠르게 학습하는 아이를 칭찬하듯 지크가 기껍게 대답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호수의 눈물’도 그 뒷 경매장에 올라갔을 가능성이 있어. 그게 장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뭔가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찾기는 훨씬 더 어려워졌겠지?”
“물론이지. 참가하는 것만도 어려운데다가 이것도 더더욱 올라가니까.”
지크가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았다.
“결국은 돈으로 귀결되는구나.”
“그거 위한 경매장이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게 문제야.”
지크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지크가 답지 않게 고민에 빠져 있는 것 같자 라일라가 조금 놀랐다.
“그렇게 비싸?”
“비싸지. 원래 몰래 사고파는 게 훨씬 더 가격이 올라가잖아. 위험 부담금이라는 거지. 우리가 갖고 있는 돈과 레오나가 갖고 있는 돈 전부 합친다 해도 그 뒷 경매장에 올라오는 가장 싼 물건조차 사지 못할 거야.”
“방법이 있다며?”
“무슨 방법?”
“‘호수의 눈물’을 되찾을 방법 말이야.”
“아, 그거?”
설마 그것도 거짓말이었을까.
‘하긴, 아무리 저 녀석이라고 해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만한 거금을 준비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러나 라일라의 생각은 지크를 너무 얕본 것이었다.
“그거야 당연히 있지.”
“…어떻게?”
“사면 그만이잖아.”
“…비싸다며. 돈 나올 구석은 있어?”
지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가문을 나와서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어.”
초반에만 잠깐 아낀다고 해봤을 뿐, 곧 의미 없음을 깨닫고 지금은 적어도 쓸 곳에는 아끼지 않고 있었다. 많은 사건과 부딪치며 거금을 쥐어 오기도 했었고.
일단 해결 방법이 있다고 하자 라일라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그냥 사면되잖아.”
“아니, 난 뒷 경매장이 생긴 게 마인 시대 즈음인 줄 알았거든. 티리울의 뒷 경매장은 그때 유명했으니까.”
그리고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때는 티리울의 대표 경매장으로서 대놓고 영업을 했었다.
물론 그건 지크에게 걸려 박살날 때까지의 성황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뒷 경매장이 있을 가능성이 생겨버렸단 말이야.”
지크가 웃었다. 그 미소는 종종 한스와 스녹, 라일라의 소름을 돋게 만드는 그 웃음이었다.
“가만히 놔두기엔 그렇잖아? 누가 봐도 나쁜 놈들이니까.”
* * *
지크 일행은 혹시 ‘호수의 눈물’의 설명서가 새로 나왔는지 매일 경매장에 들렀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설명서가 나붙지 않았다.
안내원에게 그런 물품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지금 경매장에 등록된 물품은 나무판에 있는 것이 전부라는 것뿐이었다.
닷새 째 경매장을 들락날락거린 후, 지크는 확신했다.
“분명해요. ‘호수의 눈물’은 뒷 경매장에 나올 겁니다.”
사태 설명을 위해 사람들을 전부 자신의 방에 모은 지크가 말했다.
“뒷 경매장이 뭐야?”
레오나가 물었다. 지크는 라일라에게 설명해준 그대로 뒷 경매장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 게 있었어?”
“네. 저도 간신히 얻어낸 정보죠. 하지만 틀림없을 겁니다.”
드디어 ‘호수의 눈물’의 정보를 얻게 된 레오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현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경매장에 나오는 거지?”
“그렇죠.”
“비, 비쌀까?”
“말씀 드린 대로 뒷 경매장은 티리울 중앙 경매장보다 더욱 비싼 값의 물품을 내놓습니다. 떳떳하지 않은 물건 정도가 아니라 사고파는 게 걸리면 무척이나 위험한 물건들이니까요.”
지크의 상세한 설명이 있었지만 레오나는 지크가 말한 뒷 경매장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위험성을 확연히 추정하기엔 경험이 너무 적었다.
하지만 중앙 경매장보다 출품 가격이 비쌀 거라는 이야기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아들었고, 그건 레오나가 충분히 절망할 만한 말이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너, 너 분명히 뭔가 방법이 있다고 했었지?”
지금 믿을 수 있는 게 지크밖에 없는 것처럼 레오나가 간절히 물었다.
이게 정말 처음 만났을 때 지크를 그렇게 경계하던 소녀일까.
‘아니, 처음 만났을 때 잠깐뿐, 그 이후에 별다른 경계는 없었지.’
라일라는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레오나를 쳐다봤다.
경계심 높은 들개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주인을 보고 끙끙거리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가 거기 있었다.
“물론이죠. 방법은 있습니다.”
“그게 뭐야?”
레오나의 눈빛이 반짝였다. 눈에서 빛이라도 쏠 것 같다.
라일라도 자세를 고치고 지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태껏 조용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던 한스와 스녹도 고개를 빼고 지크의 말을 기다렸다.
“어차피 경매는 벌어집니다. 결국 우리가 ‘호수의 눈물’을 사면 끝나는 일이예요.”
“응! 응!”
저러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레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게는 충분한 돈이 나올 곳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지크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두근대며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레오나와 귀를 기울이고 있는 다른 이들을 향해 말했다.
“보물을 찾으러 가죠.”
“보, 보물?”
레오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곧 눈을 반짝였다.
“보물이 있는 곳을 아는 거야?”
“알죠.”
“많아?”
“무척 많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호수의 눈물’을 살 수 있어?”
“분명 살 수 있습니다.”
레오나가 환호했다. 보물이라니. 어렸을 적 읽었던 소설 속, 던전에 있는 금은보화가 절로 떠올랐다.
정말로 지크가 그런 보물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면 ‘호수의 눈물’을 되찾을 수 있을 게 분명하다.
때문에 그녀의 뒤에서 다른 이들이 지크에게 보내는 눈빛을 보지 못했다.
그 눈빛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사기꾼 같아.]
* * *
지크가 형체도 없는 보물을 대안이랍시고 내놓고 레오나가 거기에 넘어가 기뻐한 후, 지크는 사람들을 각자의 방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라일라는 나가지 않고 지크를 흰 눈으로 흘겼다.
“기가 막혀. 그 해결책이란 게 고작해야 보물이었단 말이야?”
“왜. 거짓말 같아?”
지크는 무척이나 뻔뻔했다. 뭐가 잘못됐냐며 코를 세웠다.
“누가 봐도 사기꾼의 대사잖아. 그래, 보물을 찾으러 가자며 순진한 애를 꼬드겨 놓고 이젠 어떻게 하려고? 인신매매?”
“보통 사기꾼한테 빠진 사람들이라면 그런 결말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지.”
“그래서. 너는 아니란 거지?”
“그 녀석을 팔아넘겨서 뭐 하게?”
지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라일라가 지크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 순진한 사람을 사기꾼이 등쳐먹는 것 같아 말해 본 것뿐, 그녀도 지크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의 정보지?”
“물론이지.”
지크는 회귀 전 기억을 더듬었다.
“여기서 우리가 전력으로 10일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산에 고대 유적 하나가 발견될 거야. 그곳에서 정말로 막대한 재화들이 발견됐다고 하더군.”
어떤 유적인지, 재화 이외에 어떤 물건이 나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거기서 엄청난 재화가 나온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재화였다.
“아무리 ‘호수의 눈물’이 높은 가격을 찍는다 해도 그 재화면 충분히 살 수 있을 거야.”
“그럼 다행이네.”
라일라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 참. 누가 봐도 사기꾼의 꾐 같은 이야기에 순진한 시골 촌뜨기가 넘어갔는데, 그 사기꾼 같은 꾐이 진짜라니. 웃기지 않아?”
“그도 그렇군.”
지크도 따라 웃었다.
“그럼 나도 돌아갈게. 사건은 다 해결된 것 같으니까, 나도 푹 쉬어야지.”
“뭐가 다 해결돼?”
“…해결됐잖아? 뭐야,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의자에서 일어나던 라일라가 지크의 심각한 얼굴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녀 자신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지크가 어떤 인간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그 뒷 경매장을 어떻게 날려야 잘 날렸다는 평가를 받을지가 해결이 안 됐잖아.”
“…에라, 이 인간아!”
라일라가 옆에 있던 쿠션을 지크에게 던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