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돈?”
레오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허리춤을 뒤져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인간의 돈은 잘 몰라서….”
레오나는 테이블 위에 내용물을 쏟아냈다.
‘얘 정말로 불안하네.’
스스로도 경험이 없어 세상살이가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라일라지만, 레오나는 그녀보다 더했다.
누가 봐도 엘프 사회에서만 자라다가 갑자기 인간 세계에 내던져져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였다.
‘대체 부모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애를 혼자 내보낸 거야?’
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아는 건 아니었기에 라일라는 그 이상의 욕은 삼갔다.
의외로 레오나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많았다. 인간의 돈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귀해 보이는 보석이 몇 개 있었다.
“예상보다 많군요.”
“그래?”
일족의 보물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인 것일까. 레오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 정도의 보석이라면, 음….”
지크는 누가 봐도 금전 감각이 없어 보이는 레오나가 알아듣기 쉽게 그녀가 떨군 것들 중 붉은 보석 하나와 금화 하나를 집었다.
“저도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닙니다만, 이 붉은 보석 하나를 팔게 되면 이 금화 500개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응?”
레오나가 당황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여행 자금을 대기 위해 이 보석이랑 비슷한 걸 팔았는데….”
“얼마 못 받으셨군요.”
지크는 대번에 상황을 알았다.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이, 이 금화로 85개.”
그녀가 가리킨 금화는 지크가 가리킨 금화와 똑같은 것이었다.
‘심각하게 후려쳤군.’
지크가 말한 금화 500개도 최저한으로 말한 것이다. 아마 가치는 그보다 높을 확률이 컸다.
‘거의 1/6에서 1/8까지 후려친 정도야.’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사기를 당하셨군요. 레오나 씨가 인간 시세에 어두운 점을 이용해 돈을 덜 준 겁니다.”
“그, 그런 거야?”
기분 탓일까. 그녀의 귀가 늘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여행 시기가 길었나요? 금화 85개를 받은 것치고는 남은 돈이 얼마 없군요.”
식탁 위에 나뒹구는 돈 중 금화는 고작해야 세 개뿐이었다.
“응? 나 숲 나온 지 20일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
“…….”
지크와 라일라는 입을 다물었다.
“왜, 왜 그래?”
또 뭐가 잘못된 것일까. 레오나가 불안해했다. 방금 전까지 경계를 하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숙소를 화려한 곳으로 잡으셨습니까?”
“아니. 난 기본적으로 숲에서 자. 인간의 숙소는 호기심에 몇 번 가본 게 다야.”
엘프다운 일이다. 이상할 건 없다. 그저 20일 만에 팍 줄어든 돈만 아니라면.
“먹을 걸 화려하게 먹었습니까?”
“화려하게 먹었다는 표현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숲에 있는 과일을 먹거나 인간들의 시장에서 과일이나 채소 같은 걸 샀어. 아, 인간들이 만든 군것질거리들 중에 몇 개를 호기심에 먹은 적은 있어.”
“뭐를 얼마에 샀습니까?”
레오나의 설명에 지크와 라일라는 또 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 그래도 그것들은 어느 정도 깎아 달라…고… 해서… 산 건…데….”
레오나의 귀에 이어 이번엔 어깨가 내려갔다.
지크는 한숨을 쉬었다.
“뭐, 어쩌겠습니까. 나간 돈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레오나 씨가 인간 세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더러운지 알게 된 교육료로 생각할 수밖에요.”
“보석을 팔 때 손해 본 금화 약 400여 개와 물건들을 살 때 쓴 바가지 80여 개. 그것도 20일 남짓 만에 사라진 돈이라면 너무 많이 크긴 하지만 말이야.”
라일라도 거들었다.
그녀는 경험이 없을 뿐이지 시세 같은 지식은 꽤 정확하게 알고 있는 터라 레오나가 얼마나 사기를 당하고 바가지를 썼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레오나 씨.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금화 480개는 잊어 버려요.”
하지만 레오나는 기운을 내기는커녕 이젠 고개마저 떨궜다. 그리고 마치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480개… 아니야. 보석 두 개 팔았어.”
“…….”
“…….”
지크와 라일라는 다시 한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머리에 공통된 생각이 스쳤다.
이 엘프는 호구, 그것도 개호구라고.
* * *
툰겔의 성벽 저 너머로 해가 지며 붉은빛을 사방으로 사정없이 뿌려댄다.
슬슬 주변의 점포가 문을 닫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노을 지는 시간.
지크와 라일라 그리고 레오나는 그런 붉은 노을을 등지고 길을 걷고 있었다.
“기분 좋습니까, 레오나 씨?”
지크가 물었다. 두툼한 꾸러미를 손에 얹고는 반 쯤 넋 나간 채 듣고 있던 레오나가 흠칫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했어?”
“기분이 좋냐고 물었습니다.”
레오나는 다시 자신이 든 꾸러미를 쳐다봤다.
“나쁜 기분은 아니야. 하지만 잘 모르겠어. 허탈하기도 하고, 뭔가 복잡한 기분이야.”
하긴, 그도 그럴 것이다. 자신이 팔 땐 하나 당 금화 85개, 두 개 팔아서 170개를 받은 그 보석과 비슷한 것이, 여기 경매장에서 팔자 단 하나가 금화 700개로 팔려버렸다.
그녀가 들고 있는 꾸러미는 그 보석의 대금이었다.
“여기가 경매의 도시라서 생각보다 가격이 많이 나온 것도 있습니다.”
그들이 보석을 판 곳은 툰겔에 존재하는 많은 소규모 경매장 중 하나였다.
나름 품질이 나쁘지 않은 그녀의 보석이 지크의 예상보다 금화 200개는 높은 금액으로 팔린 것이다.
그 외에도 지크는 레오나에게 물건의 시세라든가, 상인과 흥정하는 법이라든가를 가르쳤다.
물론 인간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레오나가 바로 인간처럼 거래를 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때보다는 분명 나아졌다.
“내일은 같이 경매장에 가봅시다. 레오나 씨가 찾는 물건이 언제, 몇 번 경매장에 올라올지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응!”
희망이 보인다는 생각에서일까. 레오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엘프의 미소. 주변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그녀에게 쏠린다.
하지만 지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의 미소를 사정없이 박살냈다.
“물론 레오나 씨가 가진 재산으로 보물을 되찾기에는 무리일 겁니다.”
“…금화가 이렇게 많은데?”
레오나가 꾸러미를 들어보였다.
“그 정도의 금화를 하루아침 한 끼만으로 소비하는 인간들이 주 고객층인 곳이 그 경매장입니다.”
“…….”
레오나가 꾸러미를 잡아먹을 듯 내려다 봤다.
그녀의 희망을 산산이 짓밟은 지크를 라일라가 팔꿈치로 퍽 쳤다.
정확하게 명치로 날아든 그녀의 공격을, 지크는 멀쩡한 얼굴로 받아냈다.
“뭐, 그래도 희망을 잃진 마세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방법이 있어?”
레오나가 다시 밝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휙휙 바뀌는 표정이 재미있었다.
“네.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고 내일 ‘호수의 눈물’의 경매 정보를 얻으러 갑시다.”
“응!”
레오나가 다시 환하게 웃었다.
* * *
“뭐, 쉽지.”
지크는 숙소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뻗어 탁자 위에 걸쳐두고 와인 한 잔을 든 채 콧대를 세웠다.
“이제 막 숲에서 나온, 경험도 없는 촌뜨기 엘프 하나 구슬리는 일 따위가 얼마나 어렵겠어?”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와인잔을 기울인다. 그 모습이 마치 사냥감 포획에 성공한 사기꾼 같아 라일라는 좋은 시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대체 뭐야? 오늘 그 행동은.”
“뭐가?”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잖아. 그러니까…. 그, 뭐냐….”
“친절하고 선량하며 정의감 넘치는 그런 인간처럼 보였다고?”
라일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온몸에 흘러넘치는 닭살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그러지 마라. 나도 좋아서 한 게 아니니까”
지크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자세히 보니 그의 표정도 어느새 썩 좋지 않게 변해있었다.
“지금의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의 일에 끼어들려면 이 방법이 가장 좋아.”
지크는 탁자에서 다리를 내렸다.
“혼자서 처음으로 숲에서 나온 어린 엘프. 그것도 일족의 보물을 찾는다는 사명까지 갖고 있지. 게다가 엘프니만큼 온갖 차별도 받았을 거야.”
그녀가 당한 사기나 바가지가 대표적인 것이다. 만약 그녀가 인간이었다면 그 정도로까지 심각하게 후려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 같은 친절한 사람이 등장한 거야. 물론 머리론 알고 있겠지. 갑자기 친절하게 대하는 수상한 사람은 의심해야 된다고. 그런데 감성은 그게 아니걸랑.”
종족을 막론하고 이성 있는 자들이 오직 이성적으로만 행동을 할 수 있다면 전 세계의 사기꾼은 아무리 많아봤자 1/10까지 줄어들 것이다. 지크는 확신했다.
“이미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는 날 일정 수준 이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어. 이러면 내가 그녀의 일에 끼어들 만한 최소한의 인연이 만들어진 셈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넌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사람을 등쳐먹는 사기꾼 같아.”
지크가 크게 웃었다.
“목적이 다를 뿐, 하고 있는 행동은 비슷할걸?”
라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우리가 간섭하지 않았을 때의 레오나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는 행동을 보니까 우리가 말리지 않았다면 진짜 경매장에서 날뛰었을 것 같은데. 그런데 내 기억으로도 험한 꼴은 당하지 않은 것 같거든?”
“아, 그거? 간단해.”
지크는 예전 일을 떠올렸다. 최후의 전투 때 그렌 제너드의 동료로서 지크를 사정없이 물어뜯은 그녀의 날카로운 화살과 실력을.
“그 그렌 제너드의 동료가 됐을 정도로 더럽게 강하거든. 아마 지금도 강할 거다. 적어도 경매장에서 날 뛴 다음에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는 말이야.”
세상물정을 아는 것과 그저 순수하게 강한 것은 확실히 다른 법이다.
* * *
다음 날.
지크와 라일라는 레오나와 함께 다시 경매장을 찾았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들과 경비원들은 레오나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쫓아내거나 특별한 행동을 하진 않았다.
그저 경비원들이 무기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넣었을 뿐이다.
그러나 레오나도 그들과 드잡이질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묵묵히 외면하고 지크와 라일라를 따랐다.
“저기가 경매 물품들을 미리 게재해두는 곳입니다.”
지크가 로비 한쪽에 있는 나무판들을 가리켰다.
나무판은 컸다. 정정한 성인 남성 키의 한 배 반은 되는 것 같았다. 그 곳에 경매로 나올 물품들을 정리해둔 종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일단 저곳의 나무판부터 확인하죠.”
지크가 가리킨 곳은 이 건물에서 가장 가치가 낮은 물건들이 경매되는 경매장의 물품들이 게재되는 곳이었다.
만약 ‘호수의 눈물’이 이곳에 있다면, 그나마 저렴하게 그것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나무판에는 ‘호수의 눈물’이 없었다.
“자, 그럼 다음 나무판으로 갑시다.”
지크 일행은 하나하나 나무판을 살피며 ‘호수의 눈물’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 봐도 ‘호수의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레오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나무판을 옮겨가면 옮겨갈수록 점점 더 가치 있는 물품들을 경매하는 경매장의 물품이었고, 그 말은 더더욱 많은 돈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크가 방법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호수의 눈물’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건 저 나무판뿐이군요.”
지크의 말에 레오나도 하나 남은 나무판을 바라봤다.
그건 이 경매장의 하이라이트. 티리울 중앙 경매장의 물품이 게재되어 있는 나무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