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어깨까지 내려오는, 싱그러운 나뭇잎 같은 녹색 머리카락에 피부는 희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긴 귀.
누가 봐도 엘프의 특성을 갖고 있는 소녀, 레오나가 안내 데스크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안내원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대응하고 있었다. 안내원의 훌륭한 표본 그 자체 같다.
그러나 주변에서 감시의 눈을 부릅뜨고 있던 경비원들의 반응은 역시 안내원과 달랐다.
그들은 안내 데스크 쪽으로 접근한 후 상황을 주시했다. 조금만 더 소란이 커지면 개입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레오나는 경비원들을 눈치 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계속해서 언성을 높였다.
“지금 당장 저걸 돌려달라고!”
“죄송합니다만, 손님. 손님께서 말하시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의뢰인께서 저희의 경매장에 출품한 물품입니다. 저희 것이 아니므로 손님께 드린다든지 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그 의뢰인이란 자를 가르쳐 줘!”
“저희 경매장은 기본적으로 의뢰인의 신변을 철저하게 보장합니다. 특히 손님처럼 난폭한 분에게는 특히 말이죠.”
말이 통하지 않자 레오나가 다시 꽥 소리를 질렀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러면 저걸 어떻게 찾으라고! 저건 우리 일족의 보물이란 말이야!”
“증명할 수 있으신가요?”
“뭐?”
“기본적으로 장물은 취급하지 않는 저희 경매장입니다만, 그건 그 물건이 장물임이 밝혀진 다음에나 그렇죠. 그리고 그게 장물임을 밝히는 건 저희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모릅니다. 저희는 그저 경매장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일 뿐이니까요.”
영업용 미소를 지우지 않는 안내원. 말투도 태도도 친절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레오나를 업신여기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주변에서 사태를 흥미진진하게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오나에게 옹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옅은 비웃음 소리에 섞여 간간이 ‘촌뜨기’, ‘무식쟁이’ 같은 소리가 들린다.
귀 밝은 엘프인 그녀가 그걸 못 들을 리 없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적잖이 수치심이 든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데스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난 그걸 반드시 되찾아가야 해.”
“그러면 경매에 참가하는 건 어떠십니까? 저희 티리울 경매장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마치 경매장에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끌어들이려는 호객 행위 같다. 하지만 안내원은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손님께서 충분한 돈을 가지고 계시다면요.”
레오나의 옷차림은 딱 엘프의 전통 복장 수준.
그 위에 가벼운 경갑옷을 받쳐 입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돈이 많아 보이는 외견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이종족이 인간의 돈을 많이 갖고 있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특히 엘프는 더더욱.
즉, 안내원의 저 말은 조롱 이상이 아닌 것이다.
구경꾼들의 비웃음소리가 커졌고 레오나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데스크를 짚고 있는 그녀의 손은 이미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경비원이 더욱 접근했다. 하지만 다행히 불행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휙!
레오나가 등을 돌렸다. 성큼성큼 건물에서 나갔다.
로비에는 그녀를 비웃는 소리로 와글거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사람들은 곧 스스로의 일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쩔 거야?”
라일라가 레오나가 나간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도울 거야?”
“음.”
지크가 침음을 흘렸다. 애초에 만날 가능성도 낮다고 생각한 만큼 그녀를 만난 이후에 어떻게 할지 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돕지 그래? 그것도 착한 일이잖아.”
“전후사정을 모르는데 무슨 놈의 착한 일이야.”
“척 보니 알겠는데, 뭘.”
누군가 레오나가 소속되어 있는 일족의 보물을 훔쳐 경매장에 올렸다. 레오나는 그걸 되찾기 위해 왔다.
방금 장면만 봐도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었다.
“상대가 그 용사의 동료인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니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순 없고. 딱 보인 그대로의 상황 아니겠어?”
하지만 지크는 평소의 그와는 다르게 머뭇대며 움직이지 않았다. 라일라는 지크가 왜 그러는지 짐작했다.
“괜히 그녀와 인연을 맺었다가 브레이브 쪽으로 끌려갈까 봐 그러는 거지?”
“그러는 넌 내가 모어가 되지 않도록 그녀와 인연을 맺게 하려는 거고 말이야.”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한 번 쉬고 건물 출입구를 바라봤다.
“일단 따라 가볼까?”
“그러자.”
둘은 레오나를 따라 경매장을 나섰다.
* * *
지크가 계속 그녀의 기척을 탐지하고 있었기에 레오나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경매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돌벽을 걷어차며 씩씩대는 폼이 여간 화가 난 게 아닌 모양이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엘프라는 특이성과 엘프 특유의 높은 수준의 외모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게 보이는 터라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크 일행을 제외하고.
“이봐요.”
지크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레오나가 고개를 확 돌렸다.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그의 난폭한 눈초리가 그대로 지크에게 쏟아졌다.
‘무슨 들개를 다루는 기분인데.’
“뭐야?”
심기 불편한 목소리가 들린다. 불쾌한 기분에 경계심까지 섞여 지크를 향한 그녀의 반응은 절대 곱지 않았다.
혹시 지크의 더러운 성질머리가 발동하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든 라일라가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지 않나 싶어서요.”
라일라가 고개를 홱 젖혔다.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평안하고 잔잔한 목소리에 친절한 말투. 하나같이 지크와는 연이 없을 것 같은 것들이 지크의 목소리로 들리고 있었다.
라일라가 조심스럽게 지크의 얼굴을 살폈다. 그곳엔 마치 이 세상 모든 선한 일에 앞장설 것 같은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춤!
라일라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지크는 아랑곳없이 그 선의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경매장 로비에서의 소란을 봤거든요. 하여간 불쾌한 사람들이 많다니까요. 모르면 잘 설명해주면 될 것을.”
지크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레오나는 아직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저런 사람들이 인간의 표준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불쾌해서 말을 걸게 됐습니다. 사정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아, 전 지크. 지크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크는 웃는 낯으로 레오나를 쳐다봤다.
레오나의 눈이 힐끗힐끗 지크를 쳐다본다. 믿을지 말지 고민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곧 결심을 굳혔는지 입을 열었다.
“레오나.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
“그렇군요. 레오나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엘프의 성은 그들이 사는 숲의 이름이다. 때문에 그들은 남을 부를 때 보통 이름을 부르지 성을 부르지 않는다. 인간과 다른 점이었다.
“그래.”
“그럼 레오나 씨. 가까운 식당으로 가시죠. 제가 내겠습니다. 거기서 사정을 들어보죠.”
레오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뒤에서 전부 지켜보던 라일라는, 가지고 있는 지식에서 지크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이미지를 끄집어냈다.
‘사기꾼.’
시골에서 상경한 순박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놈. 딱 그런 모습이었다.
* * *
지크와 라일라, 레오나는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가격이 나가는 식당으로 독립된 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독실도 갖추어진 그런 가게였다.
지크는 일행을 독실로 이끌었다.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레오나 씨는 뭘 드시겠습니까?”
“그, 글쎄….”
레오나가 어색하게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하지만 누가 봐도 제대로 가게에서 주문을 해 본 경험이 없어 보였다.
“제가 도와드리죠.”
이번에도 지크가 나섰다. 그는 메뉴판을 읽고 그게 어떤 요리인지 설명을 했다.
“레오나 님은 엘프시니 육식을 하지 않으시겠죠?”
“으, 응.”
“그럼 이게 어떨까요.”
“그럼 그걸로.”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아마 지크의 말을 반도 알아먹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온 곳에 대한 긴장감에 잔뜩 굳어진 게 보였다.
하지만 지크는 계속해서 친절하게 굴었다. 레오나의 경계도가 서서히 줄어드는 게 보였다.
먹이를 주고 친절하게 대해지자 경계를 푸는 들개. 라일라가 보기에 레오나의 지금 이미지는 딱 그것이었다.
음식이 나오고 식사를 한다. 곡물과 채소로만 이루어진 특이한 식단이 꽤 마음에 드는지 레오나는 상당히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럼 레오나 씨. 얘기를 한번 들어봐도 될까요?”
우물우물 음식을 씹던 레오나가 음식을 꿀꺽 삼켰다.
“알았어.”
레오나는 조용히 얘기를 시작했다.
레오나의 일족은 여느 엘프들이 그러듯 숲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들의 일족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생겼다.
일족의 보물이 없어진 것이다.
“어떤 보물이죠?”
“보석이야. ‘호수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척 들어봐도 귀한 물건 같군요. 어떻게 없어진 거죠?”
“인간 상인이 왔었어.”
보통 엘프들은 숲속에 처박혀 아무런 교류도 없이 자기들끼리만 살아가는 이미지가 있지만 그들도 최소한의 교역은 한다.
특히 상당한 신뢰를 쌓은 상인들은 자기들이 사는 곳까지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평소처럼 우리와 물품을 거래하고 그 상인은 떠났어. 그런데 얼마 후에 일족의 보물이 사라진 걸 알게 된 거야.”
당연히 의심은 상인에게 쏠렸다. 엘프들은 조사대를 꾸려 인간 세계에 내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거래하던 상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그 상인이 운영하던 상점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려있었고 그 상인의 행방은 묘연했다.
“작정하고 일을 벌였군요.”
“맞아.”
그녀가 이를 갈았다. 원한이 깊은 듯 언뜻 살기까지 드러냈다.
“한데, 그 보물이 저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인간세계에 이 경매장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 이 세상의 온갖 귀한 것들이 모인다고 했으니 잘하면 그놈이 이 경매장에 우리 보물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레오나 씨의 예감이 맞았단 소린가요?”
“맞아. ‘호수의 눈물’은 분명 저 경매장 안에 있어.”
“어떻게 아십니까?”
“난 느낄 수 있거든.”
“그래요.”
지크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줬다.
“하지만 경매장에서는 쉽게 레오나 씨의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그 ‘호수의 눈물’이란 걸 고이 주진 않겠죠.”
“그럼 다시 빼앗기라도 해야지! 우리도 도둑맞았으니, 다시 훔쳐도 상관없잖아!”
‘이 녀석, 상당히 위험한 생각을 하는군.’
아마 회귀 전 레오나가 친 난리라는 것이 이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 겁니다. 경매장은 시에서 관리하니까요. 레오나 씨가 빼앗으려 들면 도시의 병력이 우르르 몰려 들 겁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으음.”
레오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 어떡하지?”
“아까 직원이 말한 대로 경매로 다시 구입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죠. 그래서 말인데요, 레오나 씨.”
지크가 스테이크 한 점을 입 안에 넣으며 레오나에게 물었다.
“지금 갖고 계신 돈이 얼마나 있으신가요?”
다시 한번 사기꾼을 보는 듯한 라일라의 시선이 지크에게 쏘아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