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부스럭!
가도 옆의 수풀이 움찔거린다.
처음엔 미풍에 휘날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만큼 작은 움직임을 보였던 사람 키보다 높은 수풀의 움직임이 점점 커져갔다.
턱!
수풀에서 사람이 나왔다. 머리카락에 붙은 풀줄기가 상당히 멍청해 보이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겉모습엔 아랑곳 않고 가도를 보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숲속에서 상당히 고생을 한 것 같았다.
그의 뒤를 이어 사람들이 줄줄이 나왔다. 그 수는 총 네 명.
지크 일행이었다.
지크를 제외한 일행은 드디어 발견한 문명의 흔적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지크의 지옥훈련이 겸행된 산행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하면, 한동안은 문명의 혜택을 만끽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일행의 뒤를 따라 지크도 천천히 가도로 나왔다.
‘잘 도착한 것 같군.’
저 멀리 높은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방향감각이 맞다면 저 도시가 바로 이번 도시의 목적지일 터다.
“저기가 목적지가 맞습니까?”
한스도 멀리 보이는 도시를 목격한 모양이었다. 제발 저기가 목적지였으면 좋겠다는 내심을 숨기지 못하고 지크에게 물었다.
“아마 그러지 않을까?”
확정적인 답변이 돌아오진 않았지만 저 정도만으로도 안심을 할 정도는 된다.
‘만약 목적지가 아니라도 저 정도 도시라면 조금쯤은 쉬어가실 테니까.’
한스와 스녹의 발걸음이 상당히 가벼워졌다.
“어떤 도시야?”
라일라가 지크의 곁에 서며 물었다.
“툰겔. 상업도시다.”
그 말을 들은 한스는 포르티를 떠올렸다.
루벨라를 처음 만났던 도시로 밸리드의 음모에 의해 도시 전체가 통째로 제물로 변할 뻔했던 곳.
하지만 툰겔은 포르티와는 조금 달랐다. 다른 상업도시와 차별되는 특징이 하나 있었다.
“아, 경매장.”
툰겔의 정보는 기억에 있는 듯 라일라가 중얼거렸다.
툰겔은 세계 최대 규모의 경매장이 있는 장소였다. 온갖 비싼 것, 희귀한 것, 귀한 것들과 함께 막대한 돈이 몰리는 도시.
‘그게 어떤 물건이든 세계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툰겔로 가라.’라는 말은 대륙에서도 유명한 말이었다.
‘여기서 엘프 일족의 보물이 거래됐다고 하지?’
그리고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가 그 보물을 찾겠답시고 난리를 피웠다고 했다.
‘시기가 맞을지는 모르겠네.’
지크도 완벽한 정보를 아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용사 파티의 일. 그들의 과거가 어떤지 지크가 알 게 뭔가.
그저 그렌 제너드의 파티란 것이 워낙에 튀는 놈들이었기에 한두 구절 귀에 들어온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솔직히 내가 그 녀석을 찾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
고작해야 꿈에서 봤다고 그녀를 찾아 툰겔까지 온 자신이 어이가 없는 지크였다.
‘됐어. 어차피 당분간은 할 일도 없었는데.’
지크가 아는 마인 출현 시기도 한동안은 없다. 그냥 툰겔의 경매장이나 구경할 겸 겸사겸사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발견 못하면 그만인 거고.’
지크는 일행을 이끌고 툰겔로 향했다.
지크의 등에 매여 있는 윈두르가 조금 흔들려 지크의 등에 부딪쳤다. 마치 그의 등을 토닥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 * *
지크 일행은 숙소를 잡았다.
웨스틸버드에서 라일라가 아티팩트를 만들 때 사용하는 등 커다란 금전 지출이 있었지만, 알버스 윈플을 때려잡고 음모를 밝혀낸 공을 세우며 받은 포상은 그 지출을 우습게 메워버리고 오히려 그들의 재산을 몇 배나 풍족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그들은 상당히 비싼 숙소에서 머물 수 있었다.
“당분간은 놀아라.”
한스와 스녹이 그토록 기다리던 명령이 떨어졌다.
지크에게 용돈도 두둑하게 받았겠다, 그들은 바로 툰겔의 명소를 관광하러 흩어졌다.
“너는 안 가냐?”
한스, 스녹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금액을 쥐어준 라일라가 움직이지 않자 지크가 물었다.
“너는 뭘 할 거야?”
“경매장에 가볼 거다.”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를 만나는 것에 별 큰 기대는 하진 않고 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안 가보는 것도 이상하다.
“미래의 기억 때문이야?”
“뭐, 그렇지.”
“어떤 건데?”
“그렌 제너드의 동료 중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라고 알아?”
“아, 그 엘프.”
라일라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어? 분명 그 엘프는 지크 브레이브의 동료…이기도 하지 않았나?”
라일라가 머리를 잡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저 흐릿한 기억속의 단편 하나를 꺼내는 것 같은 행위. 하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을 지크는 가볍게 넘기지 못 했다.
“지금 뭐라고 그랬냐?”
“어? 왜, 왜 그래?”
지크가 얼굴을 굳히고 물어보자 라일라가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가 막히다는 눈초리로 지크를 쳐다봤다.
“설마 용사 파티인 그 엘프가 미래의 네 동료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진 거야? 넌 얼마나 용사란 존재를 싫어하는 거야?”
지크가 심각해진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었지만 생각해보니 그것도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기분 나쁜 건 나쁜 거고 확인해야 할 건 확인해야 한다.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가 지크 브레이브의 동료였다고?”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라고 여기면서도 지크는 철저하게 지크 브레이브를 타인 취급했다.
라일라도 그걸 느끼고 한층 더 기막혀했지만 순순히 긍정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아마도는 또 뭐야?”
“알잖아. 내 기억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거. 지금의 기억도 갑자기 떠오른 것뿐이야.”
지크는 자신이 꿨던 꿈을 떠올렸다. 그저 라일라가 말한 지크 브레이브란 가능성을 듣고 무의식중에 멋대로 만들어낸 거지같은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그런데 그저 꿈이라고 생각한 것이 미래의 가능성과 일부뿐이긴 하지만 일치했다.
‘생각해보면 묘하게 현실감 있는 꿈이었어.’
“혹시 지크 브레이브의 다른 동료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
성녀라든가 괴팍한 마법사 노인라든가 수줍음 많은 거한이라든가 말이다. 하지만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겠어.”
“그래.”
그렇다면 아직 확신할 건 아니다. 하지만 지크는 지금의 의심을 가슴 속 한켠에 놓았다.
‘내가 꾼 꿈이 그저 개꿈이 아닐 수도 있다.’
미래의 정보를 아는 라일라와는 달리 지크 자신은 회귀를 한 자다. 라일라처럼 다른 미래를 알고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자신이 꾼 꿈이 정말로 자신이 도달하지 않은 미래의 모습이라면….
지크의 눈빛이 깊어졌다.
* * *
지크는 툰겔의 경매장으로 향했다. 라일라도 지크를 따라나섰다. 그녀도 유명한 툰겔의 경매장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경매장의 도시라는 인식답게 툰겔에는 많은 중소규모의 경매장이 있다. 그러나 보통 툰겔의 경매장으로 일컬어지는 곳은 한 곳이다.
티리울 경매장.
시에서 직접 운영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경매장이었다.
“…굉장히 크네.”
라일라가 경매장 건물을 보고 감탄했다.
경매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고급스러운 극장, 혹은 경기장 같다. 라일라가 목을 한참을 꺾어야 겨우 꼭대기가 보이는 그런 건물이었다.
“건물 안에 경매를 하는 공간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거든. 게다가 손님들을 위한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소도 많으니까.”
물론 전부 유료였고, 게다가 비쌌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곳은 역시 저 건물에서도 가장 중앙에 위치한 중앙 경매장이야.”
저 거대한 건물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중앙 경매장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열렸다 하면 그만큼 귀한 물건들이 줄줄이 나왔다.
오죽하면, 세상에 만약 드래곤을 파는 곳이 나타난다면 그건 바로 티리울 중앙 경매장이라는 말이 나올까.
지크의 설명을 들은 라일라가 눈을 빛냈다.
“언제 열리는데?”
“글쎄. 그건 확인을 해봐야지. 하지만 날짜를 안다 해도 참가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해.”
“뭔가 신분 같은 게 필요한 거야?”
“아니. 티리울, 그것도 중앙 경매장에 들어가려면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이것만 있으면 돼.”
지크는 검지와 엄지를 구부려 동그란 모양을 만들었다.
“…돈?”
“경매장에서 그 이외의 뭐가 필요하겠어.”
무척이나 느슨한, 하지만 엄격한 규칙이었다.
“우리도 구경할 수 있을까?”
“지금 있는 돈으로 입장은 가능할 거다. 너랑 나 둘이라면. 그런데 만약 한스나 스녹이 낀다면 금액은 더더욱 올라가겠지.”
“…입장료?”
“내가 말했잖아. 들어가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일단 경매장에 들어갈 때 입장료가 있는데, 그 금액이 상상을 초월해. 평민들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금액이 말이야.”
“그런데 장사가 돼?”
“보시다시피.”
지크가 과장되게 두 팔을 쫙 펴 경매장을 가리켰다. 경매장에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워낙에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보니까 희귀한 물건들은 대부분 높은 값을 받기 위해 이 경매장으로 오고, 그 희귀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 전 세계에서 돈 많다는 사람들이 모이며, 그로 인해 명성이 높아지고, 또 그 명성으로 인해 희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온다는 끝내주는 선순환이 성립된 거지.”
그리고 그 선순환은 계속해서 티리울 경매장을 세계 최고의 경매장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라일라가 다시 경매장을 쳐다봤다. 하지만 아까의 감탄 섞인 눈빛이 많이 사라진 건 그녀의 탓이 아닐 것이다.
“한번 들어가 볼까?”
“입장료가 비싸다며?”
“그거야 경매장에 참여하려 하는 사람들의 얘기고. 로비까지는 무료로 개방하고 있을 거야.”
라일라의 눈에 다시 호기심이 차올랐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야?”
자신에게 묻는 라일라에게 지크는 웃음으로 답변했다.
미래에 대한 기억이 없더라도 라일라는 바로 그 웃음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지크 모어가 깽판 쳤구나?”
“돈이 없다고 나를 무시하더라고.”
그래서 지크는 경매장에 돈을 한아름 안겨줬다. 경매장에 있던 모든 금전을 강탈해서.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눈빛을 한 라일라에게 지크가 다시 한번 물었다.
“갈 거야, 말 거야?”
“갈래.”
지크의 행위는 행위고 호기심은 호기심이다.
지크와 라일라는 경매장의 입구로 들어갔다.
지크의 말이 사실인 듯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로비는 넓었다. 그리고 화려했다.
새하얀 대리석을 깐 바닥은 어찌나 관리를 잘 했는지 자칫 잘못 내디뎠다간 그 광택에 베일 것만 같았다.
천장은 둥근 돔 형태로 아름다운 무늬가 색색이 칠해져 있다.
로비 한 곳에는 안내 데스크가 있어 직원들이 사람들의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커다란 나무판이었다.
“저건 뭐야?”
로브의 벽 한쪽을 전부 차지한 나무판에는 커다란 종이 몇 개가 붙어 있었다.
“이번에 나올 경매 물품의 목록이지. 저기서 물품을 확인한 이후에 경매에 참가하는 거야. 봐 볼래?”
“볼래.”
라일라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와 라일라는 로비를 가로 질러 경매 목록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그때였다.
“그러니까 저건 도둑맞은 물건이라니까!”
갑작스럽게 난 큰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지크와 라일라도 그쪽을 바라봤다. 지크의 시선이 묘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설마….’
분명 그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진짜 만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지크는 정말로 운 좋게도 시기를 잘 맞춘 것 같았다.
안내 데스크에서 큰 소리를 치는 사람 아니, 엘프가 한 명 보인다.
‘태양의 용사 그렌 제너드’의 동료, ‘바람의 화살,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가 거기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