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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146화 (146/628)

제146화

찻잔에서 올라오는 다향이 향긋하다. 무척 비싼 찻잎을 쓴 것이 분명했다.

찻잔도 아름다운 무늬가 하얀 바탕을 배경으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이 굉장히 고급스럽다.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치고 찻잔을 들어올린다. 그대로 다향을 한번 머금고 차를 한 모금 넘긴다. 이어지는 작은 감탄사.

“역시 왕궁은 차도 고급스럽군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지크가 말했다. 그 태연한 모습을 마주 앉아있던 왕세자가 떨떠름하게 쳐다봤다.

“…정말 태연하군. 자넨 위기감이라든가 그런 건 못 느끼나?”

“못 느끼다뇨. 저도 인간이니 위기감을 느낄 때는 느낍니다. 하지만 지금은 위기감을 느낄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릇, 사람은 자기가 떳떳하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법이죠.”

저게 지금 왕세자 암살 미수라는 사건부터 시작된, 왕국의 일련의 음모에 연관된 - 물론 지크는 음모를 해결하는 쪽이었지만 - 녀석이 보일 수 있는 태도일까.

게다가 대접을 좋게 해주고 있다 해도 지크는 엄연히 왕궁에 감금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저 태도다.

‘배짱이 좋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그가 보여준 능력과 공을 생각하면 전자가 확실하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혀가 내둘러질 정도의 뻔뻔함이다.

“일단 자네가 저지른 범죄는 모두 없던 것으로 하기로 했네. 자네의 공이 워낙에 커야 말이지.”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긴 하지만 당연한 걸 받는다는 투다. 조금 약이 올라 꼬투리를 잡을까도 생각했지만 왕세자는 그 기분을 억눌렀다.

“포상도 내리려 하는데, 원하는 거라도 있는가? 웬만하면 다 맞춰주지.”

“현금이면 좋겠군요.”

“그 외에는?”

“글쎄요. 그다지 생각나는 게 없어서요.”

현금도 그나마 필요한 게 그것이라는 뉘앙스지,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니다.

‘역시 이 녀석은 돈이나 권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자가 아니야.’

왕세자는 지크를 끌어들이는 걸 단념했다.

“사로잡은 녀석에게서 뭔가 얻어낸 것은 있습니까?”

지크의 질문에 왕세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놈들은 그런 법이죠.”

결과가 빤히 보였기에 지크도 고문으로 정보를 캐내는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이다.

“알버스 윈플에게서는요?”

왕세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원래 신뢰하던 자가 하는 배신이 더 타격이 큰 법. 지금 왕세자에게 알버스 윈플이란 이름은 가장 증오하는 이름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자연스레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그놈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더군. 어느 날 갑자기 정체모를 무리가 접근해 계획을 알려주고 간간이 도움을 줬다. 딱, 그 정도밖에 몰라. 그런 놈들을 믿고 음모를 진행시키다니. 대범한 건지 멍청한 건지.”

“당연히 후자죠. 그러니 제가 놈들 흉내를 내는 것도 몰랐지 않겠습니까.”

“아니, 얘기를 들어보면 그건 자네의 전략과 배짱이 훌륭한 거야.”

아무리 알버스가 ‘로브를 입은 자’들의 정체를 모른다고 해도 그들을 흉내 내어 알버스를 원하는 대로 다루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알버스를 부추긴 놈들과 왕궁에 숨어들었던 놈들이 동일 조직일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크가 대답했다.

“사로잡힌 습격자가 최후로 저항할 때의 모습, 기억하고 계시죠?”

“그거 말인가.”

습격자가 최후에 마치 괴물 같은 흉측한 모습으로 변했던 걸 왕세자는 떠올렸다. 그 모습은 꿈에 나올까 생각할 정도로 끔찍했다.

“알버스의 공범 놈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버린 대가로 강대한 힘을 얻죠.”

“그래서 자네가 그리 서둘러 처리한 거군.”

“라일라의 마법을 맞은 후가 아니었다면 서둘러 처리하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아직 마비 기운이 남아있어 쉽게 제압한 감이 있으니까요. 다른 놈들은 아예 변신 전에 처리가 가능했고요.”

“다른 놈들도 변신이 가능했을까?”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왜 처음부터 쓰지 않았지?”

“파티장에 와이그 님을 비롯해 왕국의 쟁쟁한 실력자들이 득실거리지 않았습니까. 호위 대상도 있고 저희가 잘 버티고 있으니 두고 보자는 식으로 전투에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저희가 많이 밀렸다면 바로 끼어드셨겠죠. 그들의 최우선 목표는 그 곳에서의 탈출이었으니 심각하게 눈치를 봤을 겁니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도 그 눈치의 일환이었겠죠.”

“그러다 변신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거군.”

납득이 됐는지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집단이 같은 조직일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고 이야기를 풀어가야겠군.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알고 있는 걸 말해줘야겠어. 모두.”

왕세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지금까지의 가벼움은 사라지고 사람의 위에 서는 강렬한 카리스마가 풍겨 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기세에 눌려 자기가 아는 사실을 더듬더듬 전부 토해낼 것 같다.

물론 지크에겐 토끼가 노려보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나, 그렇다고 어깃장을 놓을 생각도 없었다.

“원하신다면 그래 드리죠. 다른 손님도 오신 것 같으니 같이 얘기를 하면 되겠군요.”

“저하!”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르위먼의 성녀 아이네 프리멜 루벨라 님과 성기사 벨리 와이그 님께서 오셨습니다.”

왕세자는 지크를 쳐다봤다.

“알고 있었나?”

“고작 문 앞의 기척을 느끼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죠.”

“하긴.”

얼마 전에 본 지크의 놀라운 실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모르는 게 더 이상한 법이다.

“들라 하라!”

왕세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귀족은 몰라도 카르위먼의 성녀는 그가 앉아서 맞을 신분이 아니었다.

“벌써 와계셨군요, 저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먼저 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을 뿐입니다.”

둘은 의자에 앉았다. 와이그는 언제나 그렇듯 루벨라의 뒤에 섰다.

“잘 지내셨나요, 지크 님?”

“물론입니다. 자유만 없다뿐이지 대우는 최고로 받았거든요. 한 한 달 정도 더 지내고 싶을 정도입니다.”

“다행이네요. 오늘 제가 온 건 지크 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예요.”

“이번 음모의 흑막에 대한 설명. 특히 루벨라 님은 놈들이 얼마나 밸리드 놈들과 관련이 있나 궁금하신 거겠죠.”

“역시 지크 님과 얘기를 하면 편하네요.”

이제는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루벨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일단 루벨라 님이 오시기 전에 저하와 나눈 얘기를 먼저 들려드리겠습니다.”

지크는 방금 전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해서 들려줬다.

“그러니까 알버스 윈플을 꼬드긴 집단과 왕궁에 침입한 집단이 같은 조직인 것 같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어떤 조직이죠?”

“안 그래도 얘기해 드리려 했습니다. 저하께서도 궁금해 하신 참이니까요.”

지크는 자신이 아는 그 조직에 대해 설명을 했다.

“사람을 타락시켜 악인으로 만드는 조직이라니….”

루벨라가 한탄했다. 왕세자의 표정도 좋지 않았고 와이그는 숫제 그 조직이 앞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베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 목적이 뭐죠?”

“저도 잘 모릅니다. 그 조직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라서요. 단, 좋은 목적으로 그딴 일을 하진 않을 겁니다.”

“그건 그렇죠.”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드는 일이 좋은 일이겠는가. 게다가 놈들은 밸리드와 연관이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루벨라와 와이그에게 있어서는 몇 만 번을 계속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었다.

“이번 음모의 목표는 루즈 공녀였습니다. 만약 음모가 성공했다면 루즈 공녀는 연인의 배신으로 자신의 목숨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겠죠.”

“으음.”

왕세자가 침음을 흘렸다. 알버스의 계략에 휘말려 이블린과 루즈 후작가를 압박한 게 그인 터라 죄책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혹시 밸리드 놈들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와이그가 물었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밸리드 놈들과 분명 연관은 있겠죠.”

“밸리드의 ‘조정’을 알고 있었으니 당연하겠죠.”

루벨라가 말했다.

“놈들이 ‘조정’을 쓰는 건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처음엔 그저 의심했을 뿐이죠. 놈들을 흉내 내 알버스 윈플과 만났을 때, 놈이 루즈 공녀를 ‘조정’했다고 했으니까요. 루벨라 님과 와이그 님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세계는 자신들의 것이니, 사람들을 자신들의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건 엄연히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이고 꼭두각시의 모습은 밸리드가 아닌 자들의 올바른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걸 ‘조정’한다고 하죠.”

루벨라의 목소리가 점점 불쾌해져 갔다. 결국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개 같은 소리죠.”

와이그도 낮게 이를 갈아댔다. 왕세자도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보통 사람을 ‘조정’했다는 표현은 거의 밸리드 놈들만이 사용하죠. 그걸 듣고 알버스 윈플이 사용한 것이 밸리드의 기술인 것을 의심했습니다만, 저는 이미 그 조직이 밸리드와 관련이 있다는 걸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지크는 마법 상자를 꺼냈다. 감금 전에는 잠시 압수당했던 물건이지만, 이번에 왕세자가 같이 가지고 온 것이다.

지크는 무언가를 꺼내 탁상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루벨라를 향해 말했다.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분명 ‘사각뿔의 원혼’이라고 했었죠.”

밸리드 북북 총지부에서 만들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지크 님의 손에 있죠? 그 때 부쉈잖아요.”

“그때와는 다른 겁니다. 얼마 전에 비올루윈에서 큰 일이 있었던 건 알고 계십니까?”

왕세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대륙 곳곳에 신전을 가지고 있는 카르위먼은 정보가 한층 더 빨랐다.

“몬스터들의 대규모 습격이 있다고 했었죠. 아, 설마!”

예전 지크가 설명해준 ‘사각뿔의 원혼’의 성능을 떠올린 루벨라가 놀랐다.

“맞습니다. 당시 전 비올루윈에 있어서 그 일에 휘말렸었죠. 그때 몬스터와 같이 쳐들어 온 놈들이 갖고 있던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놈들도 조직의 놈들이라고 확신하고 있고요.”

“그게 뭐지?”

왕세자가 물었다.

“밸리드 놈들이 만드는 아티팩트입니다.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죠.”

왕세자가 놀라 ‘사각뿔의 원혼’을 쳐다봤다. 그것을 노려보던 루벨라가 입을 열었다.

“…지크 님. 이걸 우리에게 양보해주지 않으시겠어요? 예전에는 혹여나 그 더러운 밸리드 놈들에게 다시 탈취당할 가능성 때문에 부숴달라 했지만, 한번쯤 신전에서 연구를 해보고 싶어요.”

“다른 분들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만, 카르위먼 성녀님의 요청이라면 다르죠. 아무쪼록 무언가를 발견하시길 빌겠습니다.”

지크가 ‘사각뿔의 원혼’을 루벨라에게 내밀었다.

“감사해요. 절대 나쁜 일에 사용하진 않을 게요.”

루벨라가 ‘사각뿔의 원혼’을 조용히 챙겼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아티팩트라기에 왕세자는 일순 욕심이 나긴 했지만 조용히 그 욕심을 접었다.

밸리드와 관련있는 물건에 욕심을 낸다면 바로 카르위먼과 적대 관계에 들어갈 테니 마음을 접어야 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이게 끝입니다. 더 질문할 게 있습니까?”

왕세자와 루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지크는 짧은, 호화롭고도 편한 감금 생활을 마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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