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아, 크흑…!”
알버스가 신음을 흘렸다. 땅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진 그의 모습은, 그가 그토록 부르짖던 권력과는 거리가 무척 멀어 보였다.
하지만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과가 나온 것 같군요.”
“그렇군요.”
루벨라와 와이그의 대화가 담담하게 오갔다.
왕세자가 급히 명령을 내려 알버스를 포박하게 했다.
지금껏 철석같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충신이라 생각했기에 그의 얼굴엔 씁쓸함이 감돌았다.
“마음이 안 좋은가 보구나.”
“…아바마마.”
“권력이란 이런 것이다. 네가 왕이 된다면 이런 일은 더욱 심해질 테지.”
십 년 이상 왕위에 앉아 온갖 인간군상을 봐온 자의 말에는 어떤 묵직함과 씁쓸함이 공존했다.
“앞으로도 네가 극복해야 할 것들이다.”
알버스가 끌려간다. 지크의 주먹이 어지간히 강했는지 그의 턱은 한껏 벌어져 덜렁거렸다. 뼈가 산산이 부서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분명 진실된 관계도 있으니 너무 실망하진 말거라. 그리고 종종 재미있는 녀석이 나타나기도 하고 말이다.”
국왕의 시선이 지크에게 머물렀다. 왕세자도 그를 쳐다봤다.
“끝났느냐?”
“네, 끝났습니다.”
지크가 대답하자 왕세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래. 지크 스틸월. 아니, 이제는 그냥 지크라고 했던가. 어렸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긴 하구나.”
스틸월 백작을 따라온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생각났다.
“그런데 그때는 지금 같은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만. 오히려 얌전한 축에 속하지 않았던가?”
“여러 일이 있었죠.”
지크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좋다. 어차피 사람이란 변하는 법이니까. 그것보다는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게 먼저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때 끌려가던 알버스가 고함을 질렀다.
“비, 빌어멱율 노오오옴!”
울분과 원한이 잔뜩 스며든 적의 그 감미로운 원망 소리에 지크가 밝은 안색으로 그를 돌아봤다.
“그, 그들을 흉내 냬 햐, 햠정을 퍄다니! 이 걔 걑은…!”
“입 다물어!”
퍽!
박살나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턱이라도 열심히 놀려 지크를 저주하려 했건만, 그것도 옆에서 끌고 가는 기사가 검 자루로 후려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러나 알버스는 그 본인을 위해서라도 그냥 끌려가는 편이 나았다.
“내가 그 로브 뒤집어쓴 놈들을 흉내 냈다고 화를 내는 거야 충분히 이해해. 네가 그토록 믿고 따르던 놈들이니까. 그런데 슬프게도 네가 화를 낼 타이밍은 한참 늦었어.”
지크는 가까이 다가온 한스에게서 로브 하나를 받았다. 그리고 뒤집어썼다.
얼굴까지 푹 가리자 알버스가 지금껏 보아온 ‘로브를 입은 자’들처럼 보였다.
“알버스 윈플.”
지크가 목소리를 억눌러 낮고 거친 목소리를 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기에 알버스는 눈을 크게 떴다.
“너는 계약을 지키지 못했다. 계약을 지켜라, 알버스 윈플.”
“!!!”
“새로운 계획을 짜왔다. 이번엔 실패하지 말아야 할 거야, 알버스 윈플.”
“!!!!!”
“네가 ‘이블린 루즈’를 조정한 일지를 작성해라. 상으로 네가 원하는 다섯 명을 죽여주마, 알버스 윈플.”
“!!!!!!!”
지크는 로브를 벗고, 눈을 크게 뜨고 절망적인 얼굴을 한 알버스에게 아주 밝게 말했다.
“실제로 그놈들은 내가 호수에서 다 쳐 죽였어. 루즈 공녀님이 도망친 이후에 네가 만난 네 공범은 전부 변장한 나야.”
알버스를 마지막 함정으로 몰아넣기 위해 이블린은 지크의 뜻대로 호수에서 적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자신의 공범들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은, 알버스로선 처음 듣는 말이었다.
“으, 으아아아아아!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인간과 짐승의 그 어디쯤에 있는 괴성을, 알버스는 부르짖었다.
당장이라도 지크에게 달려들려 몸부림을 치지만 양쪽에서 그를 옥죄고 있는 기사의 팔이 그를 강하게 구속했다.
그러나 방금처럼 검 자루로 맞진 않았다. 기사와 병사들도 알버스를 손가락질하며 깔깔대고 웃고 있는 지크를 아연실색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성녀님.”
왕세자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카르위먼 명예 성기사를 지정하는 것에 대한 기준점이라든가를 묻고 싶으신 거죠?”
“말씀드립니다만, 절대 카르위먼의 위신을 실추시키기 위해서라거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괜찮아요. 저 꼴을 눈앞에서 본다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갖게 될 테니까요.”
루벨라는 머리를 짚고 설명을 시작했다.
“분명 지크 님은 사디스트에 더러운 성질을 가진 성격파탄자이지만 말이죠.”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습니다만.”
요새 카르위먼의 소속된 사람들은 모두 이럴까.
왕세자는 성녀의 거친 말투와 그녀의 옆에서 크게 웃고 있는 와이그를 보며 슬며시 걱정이 들었다.
“적어도 그 인성을 선량한 사람에게 향하진 않거든요. 저 인성이 향하는 건 악인들뿐이에요. 그리고 나름 착한 일을 하고 싶어 하시고 또 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 카르위먼을 위해 큰 공을 세우셨고 개인적으로는 목숨의 은인이기까지 하죠.”
그러나 그렇게 지크를 옹호하던 루벨라도 조용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저 사람 괴롭히는 성미는 조금 줄여주셨으면 하기도 해요.”
왕세자는 지크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잘 봐두거라.”
왕세자에게 국왕이 말했다.
“세상에 간간이 저런 녀석들이 등장하는데, 보통 저런 놈들과 관계를 맺는다면 둘 중 하나를 해야 한다. 절대 적대하지 말든가, 아니면 기필코 죽이든가.”
“…죽여요?”
“저놈이 알버스 윈플을 어떻게 작살내는지 보지 않았느냐. 적대자에게는 정말로 피를 말리게 하는 놈들이 저런 녀석들이다.”
“그것참 심하시군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지크가 국왕을 돌아봤다.
“저는 그저 순수하게 알버스 윈플을 잡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와중에 많은 죄를 지었지. 스틸월 백작의 초대장 절도라든가, 신분 사칭이라든가, 왕궁 침입이라든가 말이다.”
“그리고 그건 전부 작게는 왕세자 전하, 크게는 왕국에 기생하고 루즈 후작가를 몰락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알버스 윈플을 제거한다는 공을 세우기 위해서였죠. 그럼 이제 공과를 적절하게 비교해봐야겠습니다.”
“맹랑한 놈.”
하지만 국왕도 웃는 낯인 걸 보니 덮어놓고 지크에게 책임을 씌우려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때 지크에게 라일라가 다가왔다.
“왜 그래?”
“뭔가 이상해.”
그녀는 뭔가 꺼림칙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단순한 기분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크는 그녀의 감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나는 느끼지 못하겠는데.’
기척 탐지는 지크가 월등하다. 하지만 이번 건 오로지 라일라만이 느꼈다.
라일라가 지크보다 아니, 이 자리의 어떤 사람보다 뛰어난 것은 한 가지다.
‘마법.’
“루벨라 님.”
“왜 그러시나요?”
지크가 자신에게 작게 속삭이자 루벨라가 의문스럽게 말했다.
“이 주변에 마법적 장치를 해제하는 성법을 펼쳐주세요. 일순간이라도 좋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알았어요.”
루벨라는 두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에 빛나더니 곧 주변을 삭 휩쓸었다.
강대하고 깨끗한 성력에 지크는 감탄했다. 그 사이 그녀의 실력이 더 는 것이다.
사람들이 놀라 루벨라를 쳐다봤지만 지크는 반응을 무시하고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효과가 있는지 라일라의 환각 마법이 풀려있다.
주변 사람들이 라일라의 모습이 변한 것에 한 번, 그녀의 미모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러나 지크는 질리도록 본 라일라의 얼굴에는 관심이 없었다.
“너, 너흰 누구냐!”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알버스를 끌고 가던 기사와 병사들이 있는 곳이다.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놈들!’
기사와 병사 절반 이상이 적어도 원래 그 얼굴을 한 작자들이 아니었다.
신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기사나 병사들 모두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지 않아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환각 마법!’
라일라의 그것과 같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도 당혹감에 잠시 움직임이 멈췄다.
정체가 드러날 거라곤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기사와 병사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정신을 차린 건 그들이 더 빨랐다.
챙! 챙!
옆에서 당황하던 기사, 병사의 무장을 빼앗은 그들은 그대로 무기를 원래 주인이었던 자들에게 휘둘렀다.
푸욱!
서걱!
“크악!”
“커헉!”
습격자들은 정확히 급소를 노렸다. 왕국을 지키는 정예병인 만큼 기사와 병사들도 상당한 실력을 갖춘 자들이었지만 상대가 기습을 한 데다 무엇보다도 습격자들의 실력이 높았다.
주변의 기사와 병사를 도륙한 습격자들이 알버스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 했다.
콰앙!
“크윽!”
갑자기 날아온 무언가가 습격자들을 덮쳤다. 조금만 늦게 반응했더라면 정체도 모르고 머리가 꿰뚫릴 뻔했다.
툭!
두꺼운 카펫에 떨어진 그것을 습격자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식기 나이프?’
습격자들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지크가 식기 나이프를 휘두르고 있었다.
고작해야 식기 나이프.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얕볼 수 없다.
습격자들이 알버스를 내팽개치고 급히 물러났다.
콰아아앙!
식기 나이프에 담긴 거력이 바닥을 부쉈다.
“아악!”
충격파가 퍼지면서 알버스가 데굴데굴 굴렀다. 지크는 알버스를 뒤로 걷어찼다.
“커억!”
그의 몸이 붕 떠 국왕과 그 가족을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에게로 날아갔다. 포박이야 그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녀석을 걷어찰 때 녀석의 뼈 어느 곳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건 지크가 알 바 아니다.
“한스!”
“넵!”
한스가 무언가를 지크에게 던졌다. 그건 작은 단검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초라하게까지 보이는 검. 하지만 그 검은 지크의 손에 잡히는 순간 변형을 시작했다.
검신이 늘어나고 마치 꽃봉오리가 열리듯 여러 개의 칼날이 펴진다. 윈두르는 순식간에 그 본모습을 드러냈다.
지크가 습격자들을 보고 씩 웃었다.
“파티에 와서 뭘 몰래 가려고 그래. 어울릴 친구가 없어? 하긴, 너네 하는 꼬라지 보면 그럴 것도 같다. 그래도 부끄럼 타고 돌아가진 마. 나도 댄스 파트너가 필요한 참이었는데.”
척!
그가 윈두르를 습격자들게 겨눴다.
“우리 어울려서 춤이나 추자고.”
콰앙!
방금과는 전혀 다른 막대한 검기가 쏟아졌다. 더욱이 놀라운 건 주변 파괴는 아까보다 적다는 것이다.
극도로 응축된 힘의 결과였다.
“칫!”
습격자들이 일제히 출입문으로 달렸다.
콰앙!
하지만 바닥에서 갑자기 솟은 두터운 돌벽이 그들을 막아섰다. 습격자들이 돌벽을 두드려 깨뜨리려는 짧은 순간 지크가 짓쳐들었다.
콰아아아앙!
횡으로 터져나간 힘이 습격자들을 휘감는다. 파티장 벽이 크게 터져 나갔다.
‘막았네?’
지크는 조금 얼얼한 손에 힘을 줬다. 예상보다 더 수준 높은 놈들인 모양이다.
지크의 공격을 막아낸 습격자들이 터져나간 벽을 향해 달렸다. 밖은 잘 정돈된 돌바닥과 잘 관리된 잔디와 수목, 깨끗한 분수가 뿜어지고 있는 정원이었다.
“스녹!”
“넵!”
지크의 명령에 스녹이 정원으로 손을 뻗었다.
콰아앙!
커다란 동그라미 형태로 돌벽이 솟구쳐 올랐다.
정원을 완전히 휘감은 그것 때문에 내려앉은 습격자들은 흡사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되었다.
“부숴라!”
습격자들이 돌 벽을 부수려 달려들었다. 돌벽이 퍽퍽 깎여 나간다. 조금만 있으면 벽이 뚫릴 것 같았다.
하지만 습격자들은 돌벽을 부수는 걸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뒤로 지크와 한스, 스녹이 뛰어내렸다.
“그렇게 파티가 싫었구나.”
자신을 돌아보는 습격자들을 상대로 지크가 말한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난 정말로 너희가 친구가 없어서 그냥 가려고 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이제 보니 친구도 꽤 많네?”
습격자들의 숫자는 어느새 늘어 있었다. 아마도 다른 곳에 숨어 있던 자들까지 루벨라의 성력에 정체가 드러난 것이리라.
“하지만 명색이 국왕 폐하의 생일이잖냐. 그냥 가면 폐하에 대한 실례거든. 그래서 내가 너희들도 할 수 있는 쇼를 준비했어. 바로 검투장이야.”
지크가 윈두르를 곧추세웠다. 한스도 에스텔레이드를 들었고 스녹도 노웸이 몸을 꼭 붙들게 했다.
“이번에는 도망치면 안 된다. 알았지?”
그리고 지크는 습격자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