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143화 (143/628)

제143화

귀족인 알버스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수준의 야유. 하지만 알버스는 쉽사리 대꾸하지 못 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정말로 밸리드의 기술이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건 보통 큰일이 아니다. 카르위먼은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종교 세력이고, 밸리드라면 일단 덮어놓고 칼부터 들이댈 정도로 진저리를 치는 자들이다.

그들과 적대하는 건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한다 해도 자살행위 그 이하가 아니다.

물론 알버스는 카르위먼과 적대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상대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리란 법은 없다.

‘밸리드가 끼어들었다고 판단되면 저 녀석들은 진상을 집요하게 파고들 거야!’

어떻게든 잡아떼야 했다.

“누명이오! 설령 이블린이 남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해도 나도 피해자일 뿐이오! 오히려 최근 갑자기 나타나 이블린과 친해진 당신이 더 수상한 것 아니오!”

“그거 참 재미있는 발언이군요.”

핏대를 세운 채 소리친 알버스에게 누군가 말했다. 말의 내용과는 달리 목소리는 전혀 즐겁지 않은 목소리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 지크 님이 밸리드의 주구일지도 모른다. 지금 하신 얘기는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와이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알버스를 쳐다봤다. 와이그의 옆에 있는 루벨라도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버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명백한 실언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당황해서 말이 헛나갔을 뿐입니다.”

알버스가 급히 사과를 하자 둘도 일단 적의를 거뒀다. 하지만 못마땅한 시선은 여전했다.

여기서 잘 빠져나가도 카르위먼과의 관계에 적잖은 손해를 보게 될 것 같아 알버스는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그건 후일의 일이다. 지금은 이 상황을 넘기는 데 집중해야 했다.

“그럼 루즈 공녀가 저를 습격한 일은 정말로 누군가의 음모였단 말입니까?”

왕세자가 물었다. 아직 이블린의 곁에서 그녀를 요모조모 쳐다보며 한껏 조사하고 있던 루벨라가 대답했다.

“조금 더 살펴봐야 할 일입니다만, 이 일에 밸리드가 끼어있을 가능성은 높아졌네요.”

그리고 이블린에게 말했다.

“루즈 공녀님이라고 하셨죠? 이번 일 끝나고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아직 공녀님의 체내에 남아있는 더러운 밸르의 기운을 싹 몰아내드릴게요.”

그게 걸린 모양이었다.

“아, 네….”

이블린은 루벨라의 집착에 조금 질린 기색으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럼 이걸로 공녀님의 누명은 벗겨졌겠죠?”

지크가 국왕에게 말했다.

“그렇군. 카르위먼의 성녀께서 증명을 해주셨으니 이블린 루즈는 정말로 조종당한 것뿐이겠지.”

“그렇다면 공녀님의 발언에도 신빙성이 돌아왔겠군요.”

“그것도 옳다.”

“그럼 이제 공녀님의 말도 한번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공녀님도 이 사건의 억울한 피해자셨으니까요.”

“그래, 이블린 루즈. 자네가 겪은 일을 한번 말해 보게.”

국왕의 말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 많은 시선 중에서도 이블린은 몇 개의 시선을 강하게 느꼈다.

지크가 그녀에게 힘을 부여하려는 듯 강한 눈빛을 보낸다. 라일라는 그녀를 편안하게 하려는 듯 신뢰 깊은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알버스는 핏발이 선 눈으로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은 위기감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제가 겪은 이 사건은 이랬습니다.”

이블린은 왕세자를 찔렀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이야기했다.

연습한 덕분인지 자신을 응원하는 두 친구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는 타인을 넘어 원수로 전락한 알버스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의외로 그녀는 쉽게 쉽게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파티장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거짓말입니다!”

알버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전 정말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녀가 뭔가 오해를 했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의 주도권은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알버스의 필사적인 호소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러기엔 이블린을 감싸고 있는 카르위먼의 이름값이 너무도 컸다.

알버스가 그토록 열변하던 ‘권력’에 의해, 그는 철저하게 뭉개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장 알버스를 범인으로 몰 수도 없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이블린의 누명이 벗겨진 것. 직접적인 증거나 증인은 없다.

하지만 그런 건 찾으면 그만이다.

“그럼 윈플 후작가의 저택도 한번 조사를 하죠.”

지크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혹시 압니까? 명백한 증거가 있을지도요.”

“그런 게 있을 리…!”

발작적으로 부정하려던 알버스가 입을 다물었다.

증거는 없다. 아니, 없었다. 애초에 증거가 남을 일도 아니었고 몇 없는 증거도 철저하게 지웠다.

지금 작성하고 있는, 이블린을 ‘조정’한 일지를 제외하면….

‘게다가 거기엔 죽여줬으면 하는 인간들도 써놨는데…!’

만약 그게 넘어간다면…. 알버스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이블린처럼 나도 ‘조정’당했다고 주장하면…! 아니야, 그건 여기에 성녀가 있는 한 금방 들킬 거야!’

“왜 그러십니까?”

알버스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지크가 어느새 그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동그란 눈이 휘어지는 것이 마치 궁지에 몰린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 같다.

“혹시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예를 들어, 당신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저택에 있다든가 말입니다.”

“우, 웃기지 마! 그런 건 없다!”

“그러면 당신네 저택을 조사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겠죠?”

“…무, 물론이다.”

하지만 알버스의 눈은 한군데 고정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상황이 이대로 계속 진행되면 그는 분명 죽는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때였다.

“알버스 윈플.”

낮고 굵은,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크진 않았지만 알버스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알버스가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저건…!’

파티장으로 통하는 커다란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로브를 푹 뒤집어 쓴 사람들 몇이 보였다.

“누구냐!”

대번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 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알버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그들이다!’

그의 협력자인 ‘로브를 입은 자’들. 안 그래도 궁지에 몰려있던 터라 그들의 등장이 알버스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하지만 의문도 들었다.

‘대체 여긴 왜?’

그들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손짓을 했다. 그 손짓은 분명 알버스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피해라.”

그리고 검을 뽑아든다.

‘날 구하러 온 건가!’

잠깐의 갈등. 하지만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다. 최대한 빨리 선택을 해야 했다.

‘여기 있다간 죽을 확률이 높다! 감옥에라도 갇힌다면 도망치기도 힘들다!’

사람들의 시선이 ‘로브를 입은 자’들에게 몰린 그 짧은 시간. 그 찰나의 순간을 알버스는 놓치지 않았다.

쾅!

마력을 최대한 온몸에 돌려 육체의 능력을 끌어올린다. 둥글게 모여 있는 사람들의 벽 중에서도 성긴 곳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순식간에 지크를 지나치고 다른 사람들도 지나쳤다. 다행히 허를 찌른 게 먹힌 것인지 그 누구도 알버스를 방해하지 못했다.

탁!

알버스가 파티장 구석에 내려섰다.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다시 한번 변한 상황에 사람들이 놀랐다. 기사와 병사들이 급히 ‘로브를 입은 자’들과 알버스를 견제했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지크는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굳이 증거를 찾을 필요도 없겠군요. 본인이 저렇게 음모를 꾸민 자라고 자기주장을 하지 않습니까.”

그의 말대로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등장하자마자 도망친 알버스는 누가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알버스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그가 지크를 노려봤다. 더 이상 양의 탈을 쓸 필요가 없어, 그는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지크 스틸월 아니, 그냥 지크라고 했던가.”

“그래.”

지크도 반말로 대꾸했다. 알버스는 이를 갈았다.

“네놈만 없었으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갔을 것을.”

“그건 인정하지. 내가 없었으면 넌 모든 음모를 성공시켰을 거다.”

하지만 결국 자신한테 막혔다는 것을 상기시키듯 지크가 가슴을 쭉 펴 으스댔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를 때려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알버스가 고개를 돌려 ‘로브를 입은 자’들에게 외쳤다.

“어서 여기를 빠져 나갑시다! 탈출 방법은 뭡니까!”

“지금 당장 저것들을 잡…!”

“아, 괜찮습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기사가 내리는 명령을 지크가 끊었다.

“뭐? 지금 왕궁에 침입자가 들어 왔는데 무슨 소린가!”

“침입자…라고 하기 뭐한 녀석들이니까요.”

지크는 ‘로브를 입은 자’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됐다! 괜히 더 오해받지 말고 로브 벗어라!”

‘로브를 입은 자’들 중 둘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다. 그리고 로브를 벗었다.

“하, 한스?”

스틸월 백작 옆에 있던 백작 부인이 눈을 크게 떴다. 백작과 그레이그도 크게 놀랐다.

백작 내외를 발견한 것인지 한스가 살짝 목례를 한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해 그 이상의 예는 하지 않았다.

로브를 벗은 한스와 스녹은 다른 ‘로브를 입은 자’들의 로브도 벗기기 시작했다.

한스와 스녹이 정체를 드러냈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사람들은, 다른 ‘로브를 입은 자’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탄성을 냈다.

그것들은 사람이 아닌, 그저 두툼한 허수아비에 로브를 씌운 것뿐이었다.

물론 와이그 같은, 기척에 민감한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허수아비를 한쪽에 몰아세운 채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한스와 스녹을 보고 왕이 물었다.

“…저들은 누구인가?”

“제 종들입니다.”

지크가 대답했다.

“그럼 이것도 자네가 꾸민 게로군.”

“알버스 윈플이 제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면 이게 제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크는 알버스를 쳐다봤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파티장의 문 너머, 한스와 스녹과 허수아비를 계속 쳐다봤다.

지크는 그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제는 무슨 핑계를 댈 거지? 방금 전의 모습도 루즈 공녀님과 똑같이 조종당했다고 할 건가? 아니면 이번에도 무슨 오해가 있는 거야?”

“으….”

알버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핏줄기가 턱을 가로지른다. 마치 악마가 들린 듯, 소름 끼치는 모습이다.

하지만 지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히죽 웃었다.

“네 공범들이 나타났을 때는 살았다 생각했지? 암흑 속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내려왔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쟤들은 네 편이 아니었는데.”

꿈꾸던 장밋빛 미래가 날아가고 이젠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 구원이라고 생각한 동료의 등장은 적대자의 처절한 농락이었다.

부들부들 떠는 알버스에게 지크가 상쾌하게 말했다.

“어때. 잠깐의 희망은 달콤했어?”

“으, 으아아아아아!”

알버스가 눈이 뒤집혀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무기도 없이 그저 분노에 빠져 멍청하게 주먹만 붕붕 휘두르는 그 모습을 보고 지크는 콧방귀를 뀌었다.

알버스가 앞에 도착할 때까지 지크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알버스가 사정권 안에 들어 온 순간, 지크의 주먹이 날아갔다.

콰지직!

턱을 후려치는 지크의 기술은 무척이나 깨끗하고 깔끔했다.

알버스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파티장 구석에 구겨졌다.

지크는 보란 듯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널 후려쳤던 루즈 공녀님의 주먹질도 내가 가르친 거야, 이 등신아.”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