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대, 대화라니…. 무슨 대화….”
“물론 당신이 지금껏 한 짓들에 대해서죠.”
지크는 저벅저벅 걸어 기사와 병사들의 창칼 앞까지 걸어갔다. 기사와 병사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했다.
“일단 이것 좀 치워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크가 왕세자를 보고 말했다. 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워라.”
창칼이 일제히 거두어졌다. 기사와 병사들이 몇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든 다시 무기를 휘두를 준비를 한 채 지크를 경계했다.
‘효과 한번 대단하네.’
지크는 루벨라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가 올 거라고 지크는 예상하고 있었다.
이미 차세대 성녀로서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루벨라는 여러 왕국의 고위층들과 안면을 터야 한다.
그러기엔 국왕의 5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이번 파티가 제격일 터.
“…넌 대체 뭐냐.”
알버스가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지크를 향해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미흡했네요. 전 이런 사람입니다.”
지크는 품속을 뒤적여 브로치 하나를 꺼내 가슴에 달았다. 여기 모인 사람 중 그 브로치가 상징하는 바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누군가 침음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카르위먼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직위로, 만약 그 사람이 카르나에 대한 신앙심을 가져 카르위먼에 투신한다면 당장 고위 성기사로 취급까지 해주는 존재다.
카르위먼의 힘이 강한 왕국에서 명예만 따진다면 웬만한 고위 귀족 이상의 취급까지 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
“명예 성기사라니….”
지크와 의절했다며 선을 그은 스틸월 백작이 낮게 뇌까렸다. 그의 목소리엔 당혹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의 곁에 있던 백작 부인과 그레이그 또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집을 나간 미움 받던 장자가 설마 명예 성기사라는 명예로운 직위를 받았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때요. 이 정도면 당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 정도는 되지 않나요?”
알버스는 대꾸할 수 없었다.
권력이란 건 간단하게 말하자면 남을 자신의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그 근간은 지위가 될 수도 있고 명예, 카리스마, 금력, 언변 등등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근간의 종류에 따라 권력의 강함도 상대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법.
그리고 지금 지크가 내세운 ‘종교’는, 권력의 근간 중에서도 강력하기 짝이 없는 힘이다.
지크가 명예 성기사의 증표인 브로치를 차자 사람들은 루벨라와 와이그를 쳐다봤다. 그들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진짜다.’
카르위먼의 성녀와 카르위먼 최강의 성기사인 와이그의 암묵적 인정은 지크의 신분을 확고하게 증명하는 것이었고, 그건 곧 지크의 권력이 인정됐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 일단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 드리죠.”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도 했겠다, 지크가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잠깐!”
누군가 지크를 방해했다. 파티장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칼날 같은 기세를 품고 주변을 압도하는 기사 몇이 남성 한 명과 여성 한 명을 호위하고 있다.
둘 다 화려한 옷을 입고 기품 있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범상치 않은 신분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남성이 들고 있는 왕홀과 그의 머리에 얹혀있는 왕관이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왕세자가 그들을 보고 움직였다. 사람들이 일제히 왕과 왕비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됐네, 됐어.”
왕이 사람들을 향해 손짓을 해 예를 중지시켰다.
“왜 벌써 오셨습니까.”
왕세자가 말했다.
아직 왕과 왕비가 모습을 드러낼 시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파티가 굉장히 어수선한 상황.
성녀의 얼굴을 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일단 상황을 수습할 생각이었던 왕세자에게 왕과 왕비의 이른 등장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바마마. 지금 파티장에 작은 소란이 있으니, 제가 얼른 수습하고 다시 모시겠습니다.”
“괜찮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내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흥미로워서 일찍 온 것이니라.”
왕은 성큼성큼 현장을 향해 걸었다. 호위 기사들이 날선 기세로 왕을 따랐다.
왕은 인의 장막을 지나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탁!
왕홀로 바닥을 때린다.
“그래, 이블린 루즈. 오랜만에 보는구나.”
고위 귀족의 영애인 만큼 이블린은 왕과 안면이 있었다.
알버스를 음모의 주모자라 알리고 지크의 등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이블린이 당황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왕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폐하.”
“왕세자를 죽이려 했던 네 행위가 누명이라고 주장 한다 들었다만, 사실이냐?”
왕의 눈빛은 좋다 할 수 없었다. 그의 옆에 있는 왕비도 마찬가지.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한 용의자를, 그 어떤 부모가 좋게 생각할 수 있으랴.
하지만 이블린은 긴장감에 침을 삼키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허!”
저 소리는 감탄일까, 탄식일까. 이블린이 드레스를 꽉 쥐었다.
탁!
그녀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라일라였다. 아직 환각을 풀지 않아 낯선 얼굴을 한 그녀는 이블린에게 힘을 주듯 어깨를 두드렸다.
긴장감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제가 드리죠.”
거기에 지크가 끼어들자 이블린은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지크 스틸월. 오랜만에 보는군. 분명 자네가 내 허리춤만할 때 한 번 봤었지?”
“폐하께서 저를 기억해주시는 건 무척이나 황공합니다만, 스틸월이란 성은 버렸습니다. 이제는 그저 지크입니다.”
왕은 스틸월 백작을 흘끔 쳐다봤다.
백작의 표정은 정말로 걸작이었다. 저 거친 왕국의 강철벽이 저렇게 당혹 어린 표정을 짓는 걸 언제 본단 말인가.
국왕은 속으로 좋은 구경을 했다 생각하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다시 지크를 쳐다봤다.
“그래, 지크.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지크로 대해주면 되겠나.”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설명을 해보게.”
국왕은 팔짱을 낀 채 지크를 쳐다봤다.
“일단 이 모든 일의 주범은 전부 저기 있는 알버스 윈플입니다.”
“헛소리를…!”
알버스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려다 황급히 입을 닫았다.
지금 지크는 국왕의 명령으로 설명을 하는 중이다. 그걸 끊는다는 건 국왕의 명예를 무시하는 것과 진배없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 특히 왕세자와 왕의 호위 기사들의 표정이 특히 좋지 않다.
그는 바로 고개를 숙여 무례함을 사죄했다. 다행히 국왕은 순순히 그의 사죄를 받아들였다.
“설명을 계속하겠습니다. 알버스 윈플은 루즈 공녀의 약혼자라는 명분으로 루즈 공녀님을 자신의 꼭두각시처럼 만들었죠. 공녀님을 ‘조정’했습니다. 목적은 루즈 공녀님이 왕세자 전하를 공격하게 만들고, 자신은 그것을 막는 ‘연기’를 해 왕세자님의 신뢰를 얻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따라오는 권력이었죠.”
“흠….”
국왕이 턱에 손을 갖다 대 생각에 빠졌다.
“알버스 윈플. 그대는 저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전부 헛소리입니다. 상황을 그럴 듯하게 끼워 맞춘 억지에 지나지 않죠. 이블린이 왕세자 전하를 어떻게 시해하려 했는지, 동기는 뭐였는지 이미 그녀의 집에서 전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또한 윈플 공자가 루즈 공녀님께 만들게 한 겁니다.”
“전부 거짓말입니다.”
양측의 발언이 팽팽하게 맞선다.
국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의 의견은 잘 알겠네, 지크. 하지만 아무래도 자네의 일방적인 말만 믿고 자네를 믿기엔 증거가 없지 않나? 어쨌든 알버스 윈플이 우리 왕세자를 구해준 건 분명하고 말이야.”
알버스는 국왕이 자신의 편을 드는 것 같자 미소를 지었다.
국왕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하는 걸 잊지 않았다. 누가 봐도 예의 바른 귀족 청년 그 자체다. 무척이나 가증스러운 모습이었다.
지크가 대답했다.
“그리고 루즈 공녀님의 공격을 받은 윈플 공자는 죽지 않았죠. 우연찮게도 딱 치료를 받으면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상처를 입었으니까요.”
그건 사실이었다. 급히 포션을 가져와 알버스를 살리긴 했지만 그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정도의 시간은 칼이 급소를 찔렀으면 살 수 없는 기간이긴 했다.
하지만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증거라고 할 수는 없지.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다고 범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
지크가 알버스를 쳐다봤다. 지크가 구체적인 증거를 제대로 내놓지 못 하자 알버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편안해져 있었다.
얼굴의 표정이 ‘어디 한번 발버둥 칠 만큼 쳐봐라’ 같은 표정이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알버스의 자신감이 너무 가소로웠다.
‘저 녀석은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 파악이 안 된 모양이야.’
그렇다면 그걸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친절하고 배려심 있게.
“제가 아까 말씀드렸을 겁니다. 윈플 공자가 루즈 공녀님을 ‘조정’했다고.”
“그래. 그랬지.”
지크는 알버스를 쳐다봤다.
“이봐요, 윈플 공자. 당신은 그 ‘조정’ 방법을 이상한 로브를 뒤집어 쓴 놈들에게 배웠을 겁니다.”
“그런 적 없소.”
알버스는 태연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저놈, 상당히 자세하게 알고 있다!’
자신의 계획을 전부 파악한 것부터 자신과 연결된 정체불명의 무리까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위기감이 들었다.
알버스는 긴장을 바짝 끌어 올렸다. 상대가 진상을 거의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조금 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당신은 부정하겠죠. 그런데 당신은 대체 그런 놈들의 뭘 믿고 그놈들이 가르친 걸 고스란히 공녀님에게 사용한 겁니까?”
지크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니까 증거가 남는 겁니다.”
“…증거라고?”
알버스의 태연한 얼굴에 미묘하게 금이 갔다.
“루벨라 님.”
“네.”
“제가 계속 말씀드렸을 겁니다. 루즈 공녀님은 ‘조정’당했다고요. 세뇌, 암시, 조종 등 타인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여러 표현이 있지만 저는 계속해서 ‘조정’이라고 표현했죠. 익숙하지 않나요? 타인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조정’이라는 표현이요.”
지크가 턱에 손을 얹고 과장스럽게 고개를 갸웃하다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쳤다. 그리고 마치 지금 깨달았다는 양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에서 들었던 것도 같네요.”
지크가 하는 양을 조용히 바라보던 루벨라도 그녀의 옆에서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던 와이그도 일순 표정이 굳었다.
루벨라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이블린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만, 루즈 공녀님. 혹시 제가 공녀님의 몸을 조금 조사해도 괜찮을까요?”
“네, 네? 그, 그러세요.”
이블린은 루벨라가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감사드려요.”
루벨라는 성력을 일으켜 이블린의 몸을 훑었다.
그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성력이 이블린의 몸에 아직 미세하게 남아 있는 더러운 기운을 포착한 것이다.
루벨라가 이블린의 손을 놓았다. 와이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땠습니까, 루벨라 님.”
“지크 님의 말이 맞아요.”
루벨라는 얼굴을 찌푸리고 불쾌함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말했다.
“더러운 밸르의 기운이에요.”
그건 상황을 의심스럽게 지켜보던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왕과 왕비, 왕세자도 놀랐고, 특히 알버스는 태연함을 가장하는 것도 잊은 채 경악했다.
“이걸로 공녀님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종당했다는 건 증명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지크가 알버스를 보고 비꼬았다.
“당신이 사용한 기술이 밸리드의 것인지도 몰랐죠? 어렸을 때 엄마가 낯선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는 얘기는 안 했습니까? 그러니까 댁이 멍청이라는 겁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