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작게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사와 병사들의 경계도가 더욱 올라갔다. 살기까지 옅게 분출했다.
지금 왕국에서도 가장 중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궁정의 파티장에 나타난 것이다.
이블린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수많은 경악, 경멸, 살의를 묵묵히 버텼다.
“…이거 놀랍군.”
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그대가 올 곳이던가?”
왕세자의 목소리에 노여움이 선명하다. 자신을 죽이려 한 자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블린은 침을 한번 삼켰다. 여기 오기 전 지크의 말을 되새겼다.
‘당신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나쁜 건 알버스 윈플과 그를 도운 무리죠. 다른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 오해를 풀러가죠. 당당히 행동하세요. 당신이 움츠러들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블린이 힐끗 지크를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블린도 작게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제가 쓴 누명을 벗기에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으니까요.”
“누명?”
왕세자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그대가 몰래 숨겨온 칼을 가지고 나를 찌르려 했고, 그걸 그대의 전약혼자인 알버스가 몸을 날려 막았지. 그런데 누명이라….”
“저하,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알버스가 끼어들었다.
“국왕 폐하의 50번째 탄생제라는 기쁜 날입니다. 파티를 망치면서까지 여기서 저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단 저들을 포박하시죠. 심문은 오늘의 일을 끝마치고 해도 충분합니다.”
썩어도 음모의 주체답다고 해야 할까. 어느새 그는 침착성을 되찾고 있었다.
흘끗흘끗 이블린을 보며 가슴 아픈 표정을 짓는 것이 연기도 괜찮다.
그의 연기에 사람들이 그를 동정하듯 쳐다봤다.
‘괜찮네.’
지크도 알버스를 고평가했다. 하지만 알버스에게는 단 하나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었다.
운.
지크와 적대하게 된 그 운 하나가 그의 미래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아뇨, 저하. 죄송하지만 이번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이블린의 앞으로 끼어들어 말을 하는 지크에게 왕세자가 물었다.
“지크라고 합니다. 이블린 루즈 공녀님의 친구죠.”
“얼마 전 조사에서 이블린이 가까이했다는 두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들도 저하 암살 미수의 공범이 아닐까 의심이 됩니다. 하필 사건 전에 불현듯 나타나 이블린과 만남을 자주 가졌죠.”
계획된 것이든, 아니면 순발력을 발휘한 것이든 알버스는 순식간에 지크를 공범으로 몰아붙였다.
지크를 보는 왕세자의 눈빛이 험해졌다. 그에 비해 알버스는 지크를 보며 득의양양한 눈빛을 보냈다.
단, 표정은 여전히 심각한 채 굳어 있었다.
왕세자가 물었다.
“그대도 이블린이 누명을 썼다고 주장하려는 건가?”
“물론입니다. 공녀님을 설득해 이 상황을 만든 것이 저니까요.”
“좋아, 그럼 한번 들어보지. 루즈 공녀가 누명을 쓴 거라면, 누가 그녀에게 누명을 씌웠는가.”
“그건 공녀님께서 말씀해주실 겁니다.”
지크가 이블린의 앞에서 조금 빗겨 섰다.
이블린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분노, 슬픔, 배신감, 온갖 감정이 울컥 솟는다. 하지만 그녀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한군데에 틀어박혔다. 손가락을 들어 올려 시선의 끝을 가리켰다.
“제 전 약혼자, 알버스 윈플 공자가 이 음모의 주범입니다.”
장내에 충격이 감돌았다. 설마 그녀가 알버스를 범인이라고 선언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지크 일행에게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킨 충격이였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어처구니없는 모함으로 받아들였다.
“이블린. 대체 왜….”
알버스가 비통하게 중얼거리는 걸 들은 후에는 더욱 그랬다.
“더 이상 들을 것도 없군.”
왕세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라? 믿지 않으시는군요.”
지크가 물었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유가 가득하다. 왕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하지. 나를 찌르려 했던 자와 그녀의 공범으로 의심되는 자. 그리고 나를 목숨을 걸고 지킨 자. 어느 쪽이 더 믿음직하겠나. 게다가 너 같이 뚜렷한 신분조차 모르는 것을.”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왕세자가 스틸월 백작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백작은 저 사람을 알고 계신 듯 보였습니다만, 아시는 자입니까?”
“…제 장자입니다.”
사람들이 경악했다. 이블린도 놀라 지크를 쳐다봤다.
귀족 출신인 것은 마차에서 들은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스틸월 백작가의 장자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특히 지크를 고소하다는 듯 쳐다보던 알버스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지크가 스틸월 백작가의 장자라면, 그의 말에 대한 신뢰성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의 지크를 보는 시선이 완전히 변했다.
그러나 알버스에게는 다행히도 스틸월 백작이 지크에 대해 선을 그었다.
“하지만 가문에서 사건을 일으켜 절연당한 녀석입니다. 예전에 폐하게도 말씀을 드렸죠. 우리 스틸월 백작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된 녀석이니, 오해는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젠 귀족도 아닙니다.”
“하나 정정할 게 있지 않습니까, 백작님.”
지크는 웃는 낯으로 태연하게 비꼬았다.
“절연당한 게 아닙니다. 백작가의 한심한 꼬락서니를 견디지 못해 제가 가문을 박차고 나온 거죠.”
“…그 무례한 말투는 여전하구나.”
“어쩌겠습니까. 백작가에서 배운 게 이런 것밖에 없는데 말이죠.”
백작이 거세게 콧김을 뿜었다. 그의 불쾌한 기분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백작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몇 걸음 물러섰다. 남은 건 그의 친구 및 그 가족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크를 보고 있는 백작의 가족뿐이었다.
“…그럼 저자는 백작님과 상관이 없는 자인 것으로 알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윈플 공자.”
알버스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설마 스틸월 백작가 출신일 줄이야.’
하지만 문제없다. 스틸월 백작도 그가 더 이상 가문의 일원이 아님을 확실히 했다.
오히려 알버스는 지크가 우스웠다.
‘가문에서도 버림받은 작자라니. 완전히 패배자였군.’
그러니 예전 산에서 만났을 때 ‘권력이 그렇게 좋냐’ 운운했던 것이리라. 본인이 얻지 못한 것이니까.
‘권력에 초연하면 자신이 우월한 줄 착각하는 어리석은 놈 같으니.’
그리고 지크란 작자는, 그 자신이 그토록 우습게 여기던 권력 때문에 죽을 것이다.
‘일단 이놈들을 감옥으로 끌어내야지.’
어떻게 이블린이 여기까지 멀쩡히 올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미 승패는 났다.
그저 알버스 자신이 조금 더 골치 아프게 됐을 뿐이다.
“왕세자 저하. 스틸월 백작님도 저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자의 태도나 스틸월 백작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문제가 많은 작자인 것 같으니, 더 이상 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일단 전부 감옥에 가둬 두도록 하시죠.”
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기사와 병사들이 슬슬 그들을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어, 어떡하죠?”
이블린이 당황해 말했다. 지크는 괜찮다고 손짓해 그녀를 안심시키고 왕세자를 향해 말했다.
“저하께서는 제 말을 믿지 못하시니, 그것 참 서운하군요.”
“대체 자네의 뭘 보고 자네 말을 믿어야 한다는 건가. 오히려 아직까지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게 신기할 따름이야.”
“아아, 진실을 말해도 믿는 사람이 없으니 이 얼마나 애통하단 말인가. 여기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정녕 없단 말인가.”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지크가 천장을 보며 한탄을 하더니,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한, 꼭 성녀 같은 아가씨라든가 말이야.”
저 무슨 미친 짓을 하는가 하고 현장을 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웃음을 터뜨린 사람에게 쏠렸다.
“그만 웃으세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요”
“큭! 아, 아뇨. 저도 참으려 하고 있긴 합니다…만…! 큭! 크큭!”
입을 막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려는 사람과 그를 뚱한 눈으로 쳐다보는 여인.
지금 같은 심각한 분위기에 웃음을 터뜨린 행위는 절대 좋은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을 질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여기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왕세자보다도 더 고귀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일행이 웃음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한숨을 한번 쉰 여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일행은 히죽히죽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움직인 그녀는 현장에 도착했다.
기사와 병사들은 그녀의 일행이 웃음을 터뜨렸을 때부터 움직임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끼어든 상황에 왕세자가 놀라 쳐다봤다.
그녀는 왕세자에게 고개를 숙여 잠시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지크의 앞에 도착했다. 그녀의 일행도 그녀의 뒤에 착 붙어 움직였다.
지크와 여인이 마주서자 사람들은 둘을 주시했다.
“정말로 나타나셨군요.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한, 성녀 같은 분이요.”
“하여간 당신을 만날 땐 정말 사건 사고가 터지지 않을 때가 없네요.”
“인생 재미있게 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두 번만 재미있으면 피 말려서 죽을 것 같지만요.”
지크가 낄낄댔다. 그에 비해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지크 님. 그런데 발언 중에 수정하실 게 있습니다.”
여전히 실실 웃고 있던 그녀의 일행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한’까지는 맞지만, ‘성녀 같은’은 아닙니다.”
눈치 빠른 지크는 그 말의 뜻을 바로 알아챘다.
“그렇군요. 이제 진짜 성녀가 되신 것이군요. 축하드리겠습니다, 루벨라 님.”
그녀, 루벨라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드려요, 지크 님.”
“그럼 이제 ‘아이네 프리멜 루벨라’ 님이 되시는 겁니까?”
“맞아요.”
지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루벨라와 친해진 뒤로 트라우마가 사라졌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녀에게 ‘프리멜’이란 미들네임이 붙는 순간 또 잠시 등허리가 오싹했다.
‘진정하자고. 이제 루벨라와 적대할 일은 없을 테니까.’
루벨라의 뒤에서 웃으며 상황을 보고 있던 와이그가 두 사람을 일깨웠다.
“축하도 좋지만 일단 이 사건부터 해결을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희도 사적으로 온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도 그렇네요.”
루벨라는 다시 왕세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죄송합니다만, 저하. 지크 님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는 건 어떠신지요. 저분의 신분과 언행은 제가 보증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이…?”
카르위먼 성녀의 보증. 그것은 절대 가벼운 게 아니다. 대체 오늘 몇 번을 놀라는 것일까.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자가 그토록 믿을 수 있는 자란 말입니까?”
“전 분명 저분을 믿습니다만, 그저 믿기만 해서 이런 말을 하진 않습니다. 지금 저분의 말이 거짓말이어서 저희 카르위먼의 명예와 신뢰가 떨어진다고 해도, 이미 그 이상의 일을 해주신 분이니 한번쯤은 그 어떤 언행도 믿어줄 가치가 있다. 이게 더 가까운 의미일 것 같군요.”
왕세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의 말은 단순히 믿는다는 것보다 더 엄청난 발언인 것이다.
하지만 루벨라는 그걸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는 듯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뒤에서 와이그가 흥미진진한 눈길로 현장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되는 상황이 갖춰진 것 같군요.”
잿빛 같은 안색을 한 알버스에게 지크는 낭랑하게 말했다.
“윈플 공자. 이제 우리 차분히 대화를 해보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