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지크 일행을 태운 마차는 천천히 이동했다. 상당한 고급 마차임을 증명하듯 마차 안으로 전해지는 진동은 다른 마차보다 적었다.
마차 안에는 진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곳은 왕궁이고 이블린은 왕세자 살인 미수라는 누명을 쓰고 있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라고 혀를 끌끌 찰 상황이다. 누명을 쓰고 있는 이블린은 물론이고 라일라도 얼굴이 굳어있다.
하지만 마차에 흐르는 긴장감의 지분은 전부 그 둘이 갖고 있었다.
그녀들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지크의 모습은 태연하다 못해 느긋하게까지 보였다.
“긴장 풀어.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네.”
“다른 사람이 보면 충분히 죽으러 가는 줄 알걸?”
지크의 말에 라일라가 대꾸했다.
“그것 참 감 없는 ‘다른 사람’이네. 이 즐거운 길을 죽으러 가는 길로 본다니.”
“대체 뭐가 즐거운 건데.”
“알버스 윈플, 그놈이 창백해진 채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니까.”
이블린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하여간 성격 더럽다니까.”
“내 자랑스러운 개성이지.”
라일라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궤변으로 무장한 지크는 도저히 말로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마차 안의 긴장감이 조금은 옅어졌다.
“앞으로의 일은 다 잘 풀릴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러니까 대화도 하고 그러자고. 기껏 서로 잘 차려입었는데 칭찬도 좀 해가면서.”
세 명은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상태였다.
지크는 화려한 수트를 차려입고 라일라와 이블린도 아름다운 파티 드레스를 입었다.
셋 다 원판이 훌륭했기에 누가 봐도 어엿한 귀족가의 사람으로 보였다.
“난 이거 무지 불편한데.”
라일라가 드레스를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굳이 이걸 입어야 해? 솔직히 필요 없지 않아?”
“원래 파티에 갈 때는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는 거야.”
물론 그들은 파티를 즐기려는 게 아닌, 따지자면 파탄 내러 가는 쪽이었지만.
“그리고 잘 어울려.”
차려입은 이블린도 물론 아름다웠지만, 라일라는 정말로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모가 무엇인지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지크가 처음 봤을 때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그 미모가 꾸미니 한층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정말로 잘 어울려요. 제 옷이 라일라와 맞아서 다행이에요.”
“그, 그래요?”
둘이 입고 있는 옷은 후작가에 숨어들어 이블린의 옷을 갖고 온 것이다.
둘 다 그녀의 옷을 칭찬하자 라일라도 제법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이블린은 이번엔 지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크 씨도 잘 어울려요. 오라버니 옷이 맞아서 다행이에요.”
“칭찬 감사합니다, 공녀님.”
“몸가짐도 정말 귀족다우시고요. 혹시 귀족 출신이신가요?”
라일라도 제법 귀족 티가 나긴 했지만 처음엔 어딘가 어설펐었다.
하지만 지크는 옷을 갖춰 입었을 때부터 상당히 귀족다웠다. 옛날 기억을 되살려 다시 매너를 연습한 덕이었다.
“귀족 혈육이 있긴 합니다. 가족은 아니지만요.”
“아, 그렇군요.”
이블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가정사가 있다고만 짐작했다.
‘그 혈육, 오늘 볼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어차피 이제 남남이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마차는 계속해서 왕궁으로 나아갔다. 왕궁 앞에는 미리 도착한 마차들이 줄 서있었다. 그것들은 천천히 한 대씩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곧 지크 일행의 마차도 정문 앞에 도달했다.
“실례합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경비병이 마차를 모는 한스에게 말했다. 한스의 옆에 앉아 있던 스녹이 눈을 굴렸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한스는 태연했다.
“여기 있습니다.”
한스가 초대장을 경비병에게 건넸다. 경비병은 횃불에 초대장을 비춰봤다. 뚜렷한 왕가의 날인이 찍혀 있는 게 보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차 앞을 가로막고 있던 창날이 치워졌다.
한스는 천천히 마차를 몰아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통과했네.”
잔뜩 긴장을 했던 라일라가 안도하며 말했다. 이블린도 말을 안 했다 뿐이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정말 이래도 괜찮아? 왕세자 암살 미수 사건이 바로 얼마 전이잖아. 너무 쉽게 침입을 허용한 거 아냐?”
“그래서 초대장으로 한 번 거르고 경비 병력을 몇 배로 확충했겠지. 그리고 우리가 마차에서 내릴 때 한 번 더 확인할 거고.”
지크는 살짝 밖을 쳐다봤다. 아무리 왕궁이라고 해도 분명 병사들의 숫자는 많았다.
“뭐, 괜찮아. 우리가 저 병력과 싸울 일은 없을 테니까.”
“제발 그러길 바라.”
아무리 라일라라도 왕궁 안에서 왕궁의 정예병과 맞붙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기, 그런데….”
물을까 말까 고민을 하던 이블린이 결국 참지 못 하겠는지 입을 열었다.
“초대장은 어디서 나셨나요?”
“아, 그거요?”
지크는 생긋 웃었다.
“빌렸습니다. 꼴 보기 싫은 곳에서요.”
* * *
비슷한 시각.
“하여간에 초대장 하나 간수 못 하고 뭘 하는 건가? 안 그래도 뒤숭숭한 이때에.”
“끙! 면목이 없네. 분명히 내가 책상 서랍 안에 잘 뒀는데 말이야.”
“하여간 친구라고 있는 녀석이 벌써부터 노망 끼가 있어가지고는. 왕국의 강철벽이라는 별명이 이제는 옛말이 됐어.”
“으음….”
그건 왕궁으로 향하는 또 하나의 마차 안에서 이루어진 대화였다.
* * *
지크 일행의 마차가 왕궁 앞에 도착했다. 마차가 서서히 멈춘다.
“손 내밀어.”
라일라가 말하자 지크와 이블린의 일제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의 손가락에는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라일라가 반지에 손을 얹었다.
우웅!
그녀의 손에서 마력이 흘러나와 보석에 새어들었다.
라일라가 지크와 이블린을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들의 얼굴은 다른 사람같이 변화되어 있었다.
“환각과 마력 은폐를 싸구려 보석에 처박은 물건이라 오래 버티진 못해.”
“괜찮아. 어차피 무대의 인물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버티면 그만인 일이야.”
지크가 변화된 모습으로 씨익 웃었다.
“그럼 가자고. 왕세자를 구한 공으로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알버스 윈플을 땅에 거꾸로 처박아버리러.”
지크의 말처럼 왕궁 곳곳에는 기사와 병사들이 배치되어 감시의 눈을 희번뜩이고 있었다.
그러나 라일라의 마법은 무척이나 잘 통해, 이블린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라일라의 외모 때문에 눈길이 모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크를 아는 몇 사람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거 효과 좋네.’
지크는 무척 만족해하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역시 왕세자가 있군.’
파티장 중앙으로 왕세자가 인사를 받고 있었다.
보통 왕세자는 국왕과 함께 가장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아버지의 생일이니만큼 아들 된 도리로서 가장 먼저 나와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건재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겠지.’
그의 곁에는 알버스 윈플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왕세자가 총애하는 최측근 같았다.
‘목숨을 구해줬으니 당연히 신임 받겠지.’
그리고 알버스는 그걸 노리고 이블린을 이용한 것일 터. 차기 최고 권력자의 오른팔이 됐으니 아마 지금쯤 굉장히 기분 좋지 않을까.
‘녀석이 기분 좋을 걸 생각하니 나도 기분이 좋네.’
그만큼 나락으로 떨어질 때의 절망이 더 클 테니.
지금 왕세자에게 접근할까, 아니면 녀석이 조금 더 기분 좋게 내버려둘까 하던 그때였다.
파티장의 문이 열렸다.
지크는 힐끔 문을 쳐다봤다.
‘아, 시간 됐네.’
애석하게도 알버스의 행복한 시간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하녀 한 명이 귀족 몇과 기사, 병사들과 함께 파티장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녀의 얼굴이 낯익다. 그녀는 분명 지크 일행을 안내했던 하녀였다.
지크는 라일라와 이블린에게 손짓으로 신호했다.
근처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기다리던 그녀들이 지크의 곁으로 붙었다.
파티장의 시선이 전부 방금 들어온 사람들에게 집중됐다.
왕세자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방금 들어 온 귀족 중 한 명이 왕세자에게 귓속말로 상황을 전달했다.
그 와중에 하녀는 참석자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그녀의 시선이 지크에게 머물렀을 때, 그녀의 동공이 확장됐다.
“저 사람! 저 사람들입니다!”
하녀가 지크 일행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지크 일행에게 쏠렸다.
그 많은 시선에 라일라와 이블린이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지크는 무척이나 당당했다.
“저자들이 스틸월가에 보내진 초대장을 사용했습니다!”
그녀의 뒤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움직여 지크 일행을 포위하고 일제히 검과 창을 겨눴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그 움직임에 지크는 감탄했다.
“잠시 비켜주게.”
누군가 기사들을 밀치고 포위망 안으로 들어 왔다.
기분이 나쁠 법하기도 하건만 기사들은 별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순순히 그가 들어갈 수 있도록 포위망에 구멍을 내어주었다.
사내는 그래도 되는 인물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지크는 자신의 앞에 선 인물을 바라봤다. 철사 같은 수염과 형형한 눈, 고집스런 입술이 마지막 헤어질 때와 꼭 같다.
“네놈이 스틸월가의 초대장을 사용한 놈이냐?”
그, 스틸월 백작이 거친 어조로 말을 했다.
“그렇습니다.”
스틸월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적놈이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할까.
“그 초대장이 네깟 놈이 사용해도 되는 물건이 아닌 건 알고 있겠지?”
“초대장의 정당한 사용자를 묻고 계신 거라면, 인정하죠. 적어도 전 지금 그 권한이 없습니다.”
“…지금 권한이 없다?”
묘한 말이다. 감히 자신이 잃어버린 초대장을 사용해 궁전에 침입한 맹랑한 도적놈이 어떤 놈일까 싶어 직접 와봤는데, 생각보다 더 알 수 없는 놈이다.
“누구냐, 네놈.”
지크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방지를 손가락에서 뺐다.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마력들이 사라졌다.
지크의 얼굴이 바뀌는 걸 보고 사람들은 놀랐다. 하지만 이중, 가장 놀란 건 당연히 백작과 그의 가족이었다.
“너… 너…!”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백작을 보고 지크는 과장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지크는 시선을 돌려, 백작만큼이나 경악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자를 바라봤다.
“오랜만…은 아니지? 알버스 윈플.”
지크의 웃음이 바뀌었다. 조롱조로 과장된 선량한 미소에서 적을 보며 짓는 사나운 웃음으로.
“네 말대로 여기까지 와봤다.”
* * *
파티는 어수선해졌다. 정체가 드러난 침입자를 귀족들 중 일부는 두려운 얼굴로, 일부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일부는 분노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러나 사건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들은 다른 귀족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쓸 여유가 없었다.
“네, 네가 어떻게….”
스틸월 백작은 볼을 부들부들 떨었다. 의절하고 집을 나간 장남과의 재회는 너무나 충격적인 장소에서 충격적인 상황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크는 지금 백작과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게 기쁨이든 분노든 우리끼리 재회의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죠, 백작님. 전 백작님을 뵈러 온 게 아니라서요.”
“뭐….”
지크는 입을 뻐끔거리는 백작을 무시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사와 병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왕세자를 쳐다봤다.
“처음… 뵙는 건 아니죠. 하지만 아마 기억 못하실 테니 처음 뵙는다고 인사 올리죠, 왕세자 전하.”
“그대는 누구인가.”
제법 의젓한 목소리로 왕세자가 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는다. 지크는 왕세자가 제법 걸출하다고 느꼈다.
“전하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지크는 이블린에게 손짓했다. 이블린이 앞으로 나섰다.
기사와 병사들이 긴장했다. 이블린은 위협을 할 의도가 없다는 듯, 기사, 병사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에 멈췄다. 그리고 지크 처럼 반지를 뺐다.
이블린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경악했다. 특히 알버스의 눈은 당장이라도 눈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블린은 드레스를 쥐고 무척 예의바르고 고풍스럽게 인사했다.
“루즈 후작가의 이블린 루즈가 왕세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