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그건 정말로 깔끔하고 깨끗한 펀치였다. 무술에 문외한인 라일라조차 무의식적으로 탄성을 내지를 만한 그런 펀치.
“네가 가르친 거야?”
“당연하지. 이블린의 성격상 아무리 열 받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따귀 때리는 정도로 끝날 텐데. 그러면 너무 아쉽잖아. 그렇다고 계속 밟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한 대밖에 못 때릴 거면 화끈하고 속 시원하게 해야지.”
“확실히 응어리 같은 게 풀리는 것 같긴 하네.”
라일라는 바닥에서 꿈틀대는 알버스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블린은 뭘 배운 적이 없잖아. 어떻게 지금 같은 펀치를 날릴 수 있는 거야? 흘끗 봐도 꽤 제대로 된 펀치 같은데.”
“알버스 녀석이 한 ‘조정’ 때문에 육체 강도가 올랐어. 게다가 재능도 상당히 있더라고. 무엇보다 이 천재의 뛰어난 가르침이 빛을 발했으니 저 정도는 당연하지.”
결국은 자기 자랑이다. 이제부터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시작될 게 뻔해 라일라는 지크에게 신경을 껐다.
이블린은 주먹을 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특수 과외를 받고 ‘조정’으로 육체 능력이 올랐다지만 그녀는 원래 싸움을 모르던 사람인 것이다.
“크윽!”
알버스가 신음을 흘렸다. 이블린은 알버스를 잠시 복잡한 눈빛으로 내려다 봤다. 하지만 곧 등을 돌렸다.
“어쩔래? 죽일까?”
지크가 묻는다. 하지만 이블린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이 사람과 관련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이블린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지크는 뚜벅뚜벅 알버스에게 걸어갔다.
“더럽게 운이 좋구나. 전 약혼녀가 마음씨가 고와서. 대체 저런 약혼녀가 뭐가 불만이어서 이용해 먹고 버린 거냐?”
“…….”
알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한 건 아니다.
그저 허튼말을 했다가 지크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한 것이다.
“걱정 말고 말을 해봐. 네가 한 짓이 얼만데 고작 여기서 말 좀 함부로 한다고 죽이겠어. 죽이려면 진작에 죽였지.”
“…아까 전부 말했을 텐데.”
입가에 고인 피를 뱉어내고 알버스가 낮게 말했다.
“지금보다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 필요했다고.”
“권력이 그렇게 좋냐?”
알버스가 낮게 웃었다.
“권력을 얕보는 자들은 멍청이 아니면 권력을 가져보지 못한 자들뿐이지. 실제로 너희는 해명을 위해 왕이나 왕세자 근처까지 가지도 못 해. 설령 간다고 해도 뜨내기인 너희의 증언을 믿어줄까, 아니면 일국의 후작가 후계자인 내 말을 믿어줄까? 그것 또한 권력이다.”
“정말로 그럴까?”
지크가 웃었다. 알버스도 같이 웃었다.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봐라. 꼭.”
그렇게 된다면 이 굴욕을 전부 갚아줄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블린이 루즈 후작의 도움을 받는다면 알버스로서는 조금 골치 아플 수도 있겠지만 고작 그걸로 사태가 바뀌진 않는다.
그녀가 ‘조정’을 받았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후작이 이블린을 쳐낼 확률이 높다.
‘하지만 후작에게 가지도 못할 거야.’
이블린은 ‘로브를 입은 자’들에게 포착된 상태다. 아마 그들의 음모의 제물이 되어 희생될 터.
‘어쨌든 난 거래를 지켰다.’
진실을 알고 절망한 이블린의 얼굴을 되새기며 알버스는 히죽 웃었다.
퍼억!
“커억!”
지크가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웃지 마. 기분 나쁘게.”
그리고 지크는 몸을 돌렸다. 알버스를 한껏 노려본 라일라도 지크를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알버스는 그들이 떠난 자리를 노려봤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미친 듯이 웃었다.
뭔가 예상과는 많이 다른 상황이 됐지만 결국 그는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혹시 이 자리에서 죽는 게 아닐까 생각도 됐지만, 이블린의 연약한 성향 때문에 그것도 넘겼다.
‘그러니까 네가 안 된다는 거다!’
이제 다시 자신의 장밋빛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알버스는 한동안 계속 웃어댔다.
* * *
산을 내려오는 길. 대차게 알버스를 후려갈겨 조금은 분을 푼 이블린이지만 그렇다 해도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다.
연신 흔들리는 어깨를 라일라가 감쌌다. 지크는 둘의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그들이 다시 수도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뜰 준비를 주춤주춤 하고 있을 때였다.
이블린과 라일라의 육체 능력을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일이지만 라일라의 순간이동이 무척 도움이 됐다.
단, 사람이 한 명이 더 포함되면 소모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는 것 때문에 지크는 부지런히 뛰어야 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의자에 앉은 라일라가 물었다.
“그놈을 이대로 용서할 생각은 아니지?”
그놈이란 당연히 알버스 윈플을 가리킨다. 옆에 앉은 이블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직 복잡한 기색을 떨쳐내지 못한 듯했다.
“당연하지.”
“그럼 왜 이블린에게 그런 요구를 한 거야?”
이블린이 알버스를 죽이지 말라고 한 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미리 지크에게 들었던 말을 실행한 것뿐이었다.
“그전에….”
지크는 이블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음의 준비는 얼추 끝났습니까?”
“…아직이요.”
“뭐, 이해합니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그만큼 깊이 사랑했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만큼 배신감도 클 겁니다.”
그토록 사랑한 연인의 배신에 배신감이 들지 않을 리 없다.
오히려 사랑의 감정이 큰 만큼 배신감도 크리라.
‘그러니까 서큐버스의 첫발을 뗀 사건이 됐겠지.’
“무엇보다 이건 그저 연인 간에 있을 수 있는 배신이 아닙니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 그리고 당신의 가문을 노린 음모죠.”
이블린의 선한 눈가에 분노의 기색이 올라 왔다. 아무리 사랑에 빠진 영애라고 해도 그녀도 가족의, 그리고 가문의 애정도 충분히 큰 것이다.
지크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오늘의 당신은 멋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날린 펀치는 제 속까지 뻥 뚫어버릴 정도였죠.”
라일라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어떻습니까. 저 배신자에게 뜨거운 일격 한 방을 더 날리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번 건 당신이 때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펀치가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걸린 누명도 깨끗하게 씻겨 나가겠죠.”
이블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건 더 이상 연인 간의 다툼이 아닌, 귀족가 간의 암투다.
“제가 뭘 하면 되죠?”
지크가 빙긋 웃었다.
“어려운 걸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 테니까요. 그저 저를 조금, 아주 조금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후일 라일라가 말하길, 이때 지크가 지은 미소는 정말로 소름끼쳤다고 했다.
* * *
알버스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사용인들이 그의 갑작스러운 외출에 조금 의문을 표했지만 굳이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귀족에게 그런 걸 묻는 간 큰 인간은 없었고, 무엇보다 알버스는 성질이 더러웠다.
알버스는 방에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창을 바라봤다.
‘잘됐겠지?’
이블린과 정체불명의 인간 둘이 떠날 때는 어쨌든 목적을 이뤘다고 좋아했었다. 하지만 정작 방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뭔가 불안했다.
혹시 또 이상한 변수로 인해 계획이 어그러지진 않을까.
혹, 자신의 일처리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들이 다시 올 때를 기다릴 수밖에.’
그때부터 알버스의 초조한 기다림이 시작됐다.
낮에는 평소와 같이 일을 보며 지냈지만 집중하기 힘들었고 밤에는 그가 찾아오길 조마조마 기다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알버스의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알버스 윈플.”
드디어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저택을 지키는 경계병들 따위는 쉽게 무시하고 들어 온 ‘로브를 입은 자’는 여전히 무뚝뚝한 음성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과연 무슨 얘기를 꺼낼까. 알버스는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하지만 ‘로브를 입은 자’가 꺼낸 얘기는, 그의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울리는 천국의 종소리나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이블린 루즈를 확보했다.”
“좋았어!”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다 멈칫했다.
자신의 모습에 무안했고, 혹 소리를 듣고 사용인들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으려나 걱정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문 바깥에서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고 유일한 목격자인 ‘로브를 입은 자’는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큼! 크흠!”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면 우리 사이의 계약은 끝난 거요?”
“그래.”
“혹시 이블린이 돌아오거나 하진 않겠소?”
“돌아오지 못한다.”
혹여나 있을 골치 아픈 일까지 모두 처리가 됐단 소리다.
알버스는 안도했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지금껏 그를 눌러 왔던 모든 압박이 일거에 풀렸다.
“다행이군.”
압박감이 사라지자 다시 여유가 돌아왔다.
“그럼 당신과 이렇게 보는 것도 이제 끝이군.”
“아니.”
“…뭔가 또 볼일이 있소?”
‘로브를 입은 자’가 무언가를 던졌다. 알버스는 허공에서 그것을 낚아챘다.
그건 책이었다.
표지가 꽤 고급스럽다. 알버스는 책을 펴봤다. 페이지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백지였다.
“이게 뭐요?”
“네가 지금껏 이블린 루즈에게 한 조정, 그리고 그에 대한 이블린 루즈에 대한 반응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라.”
알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요?”
“계획이 어그러진 건 이블린 루즈와 함께 있던 두 변수도 한몫을 했지만, 애초에 이블린 루즈에게 암시가 제대로 먹히지 않은 이유가 크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아야 한다.”
“아, 그도 그렇군.”
일리 있는 말이기에 알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로브를 입은 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건 우리의 계약 조건에 포함되지 않는 것 같소만.”
꽤나 여유롭게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알버스는 긴장했다.
만약 상대가 다시 협박을 한다면 그도 뭔가 수를 내야 했다. 알버스도 영원히 그들에게 끌려 다닐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알버스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책의 맨 끝 페이지를 펴도록.”
알버스가 페이지를 펄럭펄럭 넘겼다. 새하얀 여백만을 드러내고 있는 다른 페이지와는 달리 그 페이지에는 몇 글자가 적혀 있었다.
- 죽여야 할 자들
알버스가 놀란 눈으로 ‘로브를 입은 자’를 쳐다봤다.
“다섯이다.”
그가 말했다.
“이름과 직위, 사는 곳 등, 정확한 인상착의를 써놓도록. 그게 누구든 다섯을 죽여주마.”
알버스가 책을 탁 덮었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새로운 계약 성립이오.”
* * *
국왕의 탄생제를 앞두고 크고 작은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난 웨스틸버드.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 드디어 국왕의 탄생제 날이 찾아왔다.
왕국민들은 성대한 축제에 잔을 들어 국왕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고, 귀족들은 국왕이 직접 주최한 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마차가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는 됐어?”
말쑥하게 차려입은 지크가 묻는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라일라와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가 마차의 벽을 탕 쳤다.
“출발해라!”
“네!”
마부석에 앉아 있던 한스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들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다른 귀족들과 같은 왕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