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음! 그대들도 살펴 들어가게.”
알버스는 자신을 호위하던 왕실기사단에게 손을 흔들며 근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직 연기가 끝난 건 아니니 말투 속에 슬픔을 숨기는 걸 잊어버리진 않았다.
자신은 사랑하는 약혼녀에게 이용당하고 배반당한, 슬픈 사람인 것이다.
왕족을 호위하는 왕실기사단에게 호위를 받는 건 끝내주는 일이었다.
물론 윈플 후작가에는 후작의 가솔을 지키는 기사단이 있긴 하다.
하지만, 어쩌면 역할을 빼앗겼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들도 불만을 내비치진 않았다.
왕실기사단이 알버스를 호위하는 건 그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왕세자를 지킨 알버스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윈플 후작가의 기사들도 왕가의 성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직까지 슬픔에 휩싸인 채, 하지만 속으로는 마치 왕이라도 된 기분으로 알버스는 저택을 거닐었다.
‘순조롭군.’
루즈 후작가는 곤경에 처했다. 자그마치 딸이 왕세자를 습격한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고 가문에 최대한 피해가 오지 않도록 대응을 해야 하지만 후작가를 통솔할 사람은 저 멀리 영지에 있는 상태.
‘수도에 있다 해도 별 수는 쓰지 못하겠지. 이블린이 왕세자를 습격한 건 사실이니까.’
목격자는 많았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그 발언에 압도적인 신뢰를 가질 고위 귀족들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알버스가 왕세자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린 모습도 보았고 그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것 또한 보았다.
물론 알버스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게끔 이블린을 ‘조정’해 놓았었다.
“크큭!”
너무도 통쾌해 웃음이 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오늘 따라 잠자리가 더욱 아늑했다.
‘성공적으로 한 발을 내딛었어.’
이제 이걸 발판으로 조금씩 조금씩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 된다. 목표는 공작의 자리와 루즈 후작 영지의 흡수.
알버스는 장밋빛 꿈을 꾸며 잠을 청했다. 오늘은 무척이나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알버스 윈플.”
알버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는 목소리다. 잠을 방해받아 일순 짜증이 났다. 그러나 그는 꾹 참고 상체를 일으켰다.
어두운 방 안에 ‘로브를 입은 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알버스는 감탄했다. 그리고 위협을 느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저택은 왕국의 정예병이 지키고 있다.
게다가 경계병의 숫자도 평소의 배 이상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 경계를 유유히 뚫고 저택에 침입한 것이다.
“별일이군.”
그는 조금 움직여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푹신푹신한 융단이 발바닥에 닿았다.
“당신이 여길 왜 찾아오지? 우리의 거래는 끝나지 않았소?”
“…끝나?”
로봇 같은 무감정한 목소리에 살짝 불쾌감이 섞여 있다. 예전 봤을 때완 다르다.
‘오늘은 그냥 전달자로서 온 게 아닌가?’
뭔가 불길한 감정이 올라와, 알버스의 표정이 굳었다.
“말해봐라, 알버스 윈플. 우리가 맺은 계약이 뭐였지?”
“…당신들은 내가 이블린을 이용할 수 있도록 ‘조정’에 대한 방법과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고, 나는 쓸모없어진 이블린을 그년이 가장 좋아하던 호수로 바로 달려갈 수 있도록 조정한다였소.”
“우리가 계약을 어겼나?”
“아니. 당신들은 무척이나 잘해줬소.”
“그런데 넌 왜 계약을 어겼지?”
“…무슨 소리요.”
“우리는 이블린 루즈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제야 알버스는 상황이 무척이나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아차렸다.
“잠깐, 기다려 보시오! 이블린 그년이 호수로 가지 않았다고?”
‘로브를 입은 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넌 계약을 어겼다.”
“웃기지 마시오!”
알버스가 큰소리를 치다가 급히 숨을 죽였다. 그리고 주변 눈치를 봤다.
자기 방에서 수상한 자를 만나는 이런 상황을 들켜 좋을 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로브를 입은 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오로지 알버스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게 더 섬뜩해, 알버스는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다급하게 변명했다.
“난 계약을 어긴 적이 없소. 당신들이 말한 대로 모든 걸 했소! 호수로 가다가 그년에게 뭔 사고라도 일어 났나 본데, 내 책임은 그년이 도주할 때까지의 일일 뿐이요. 그 이후는 책임이 없소!”
“아니, 네 책임은 그녀가 무사히 호수에 도착하게 하는 것이다. 이건 네 책임이다.”
알버스는 이를 갈았다. 상대는 물러서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버스도 곱게 책임을 질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얻을 건 다 얻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알버스가 말을 놓았다.
“실패의 책임을 져라.”
“싫다면?”
‘로브를 입은 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알버스는 등으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우리가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 너도 네가 가지게 된 걸 토해내야지.”
알버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 날 죽이기라도 할 건가?”
“굳이 우리 손을 더럽힐 필요가 있는가. 왕가와 루즈 후작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네 목은 자동적으로 떨어지게 될 텐데.”
“그딴 게 가능할 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알버스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금껏 그들이 보여준 놀라운 능력과 제공된 정보들. 그것들을 생각한다면, 진실을 알리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 아닐까.
“즈, 증거도 없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나?”
냉정한 목소리가 알버스의 목을 조여 온다. 알버스가 발악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나를 건드린다면 너희의 정보도 모두 퍼뜨릴 거다! 증거를 모은 건 너희뿐이 아냐! 나 혼자 죽지 않는다고!”
“하도록 해라. 허락하지.”
마치 할 수 있다면 하라는 태도다. 알버스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투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리고 환장하게도 알버스의 협박은 허세가 맞았다.
‘젠장!’
알버스는 초조해졌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얻은 게 전부 날아갈 것 같았다.
아니, 날아가는 걸 넘어 그의 가문이 흔들리고 그의 목마저 날아갈 것이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알버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말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난 그대들의 뜻대로 열심히 움직이지 않았소. 이제 와서 이러면 난 어떻게 하란 말이오!”
그는 인정에 호소했다. 하지만 말을 하는 알버스도 자신의 호소가 먹힐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미약한 희망으로 발버둥을 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로브를 입은 자'는 역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블린 루즈를 데려 와라.”
“나, 나도 어디 있는지 모르오!”
“이틀 주겠다. 그때 다시 오도록 하지. 그때까지 적어도 이블린 루즈의 행방 정도는 알아 놓도록.”
“잠깐! 그렇게 일방적으로…!”
하지만 알버스의 말은 ‘로브를 입은 자’에게 닿지 않았다.
‘로브를 입은 자’는 알버스가 두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데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유령 같았다.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알버스는 격렬한 두려움에 잠겼다.
‘로브를 입은 자’의 말투를 보건데 자신이 이블린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정말로 자신의 파멸을 위해 움직일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이블린을 찾아야 해!’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의 만족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의 몸을 감싸는 건 불안과 초조뿐이었다.
* * *
오늘도 ‘로브를 입은 자’를 흉내 낸 지크는 숙소로 돌아왔다. 그들은 다시 수도에 숙소를 잡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사건 현장과 가까이 있어야 대비하기 쉬워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지금껏 고급스러운 생활을 해왔던 이블린이 산중의 거친 생활을 힘들어하는 이유도 있었다.
물론 이블린은 일절 불만을 내비치진 않았지만 그녀를 염려한 라일라가 의견을 냈고 지크는 받아들였다.
수도의 삼엄한 감시도 그들이 이블린을 데려 오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지크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라일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
지크가 라일라에게 목걸이를 던졌다.
“그거 성능 좋더라.”
“내가 제일 아끼는 거야.”
그건 바로 공간 이동을 쓸 수 있게 하는 아티팩트였다. 윈플 저택에 잠입하는 지크를 위해 라일라가 잠시 빌려준 것이다.
경매에 붙인다면 아무리 적게 따져도 커다란 영지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는 귀중품.
그것을 지크에게 빌려 준 걸 보면 라일라가 이번 일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땠어? 생각대로 됐어?”
“쉬웠지.”
지크는 근처 의자에 앉아보란 듯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놈은 앞으로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릴 거야. 고생고생해서 행한 음모로 얻은 것들이 전부 날아가고, 자기 목까지 달랑달랑 한다는 생각에 밥도 제대로 못 넘길걸?”
“쌤통이다.”
라일라가 코웃음 쳤다.
“이블린은 어때?”
지크가 물었다.
“많이 안정됐어. 하지만 아직까지 알버스 윈플에 대한 믿음은 저버리지 못한 것 같아.”
“사람 감정이란 건 쉬운 게 아니니까.”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뭔가 어색하네.”
“뭔 소리야? 나처럼 자기감정에 솔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하긴.”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지?”
“그래.”
라일라는 이블린이 있을 자신의 방을 안타깝게 쳐다봤다.
“상처를 많이 받지 않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지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조금 후련할 수 있도록 연습이나 시켜야지.”
“무슨 연습?”
이 녀석이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할까 같은 눈빛으로 라일라가 지크를 쳐다봤다.
“있어, 그런 게.”
지크가 장난기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 * *
알버스는 요 이틀간 지옥을 맛봤다. 오랫동안 짠 음모가 마지막에 뒤엉켜버렸고 협력자가 그것을 근거로 협박을 하고 있다.
‘젠장! 젠장! 젠장!’
초조하게 손을 떨어댄다. ‘로브를 입은 자’가 통보한 기한은 오늘. 곧 그가 올 것이다.
‘반항을 해봐?’
하지만 조직으로 움직이는 자들이다. 고작해야 한 명 해치운다고 일이 해결될 리 없다.
‘오히려 바로 내 약점을 까발리겠지.’
결국 어떻게든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떨었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이 바늘처럼 몸을 찌르는 것 같다.
끼익!
문이 열렸다. 알버스는 무겁게 고개를 들었다. 문에 그가 서 있었다. 알버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달칵!
문이 닫혔다. ‘로브를 입은 자’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알버스와 일정 거리를 두고 섰다.
“기다리고 있었소.”
알버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미안하지만 이블린을 찾을 수 없었소. 하지만 당신들에게 내가 도움이 될 일이 분명 있을 거요! 당신들도 내가 좋은 직위로 올라가야…!”
“알버스 윈플.”
‘로브를 입은 자’가 알버스의 말을 끊었다.
“이블린 루즈를 찾았다.”
“…이블린을 찾았다고?”
“그래. 그러니 새로운 계획을 알려 주마.”
‘로브를 입은 자’는 살기가 가득 담김 음성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아야 할 거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