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너….”
“눈빛이 바뀌었네? 진정하라고. 네 무서운 눈빛 때문에 루즈 공녀님이 네 정체를 알아챌 수도 있잖아.”
그녀의 머릿속에 온갖 상념들이 오고가는 걸 지크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고민하는 그녀가 참 한심했다.
어차피 결과는 나와 있거늘.
“뭘 그렇게 고민을 해. 너희들이 가장 싫어하는 변수가 여기 있잖아. 마인 한 명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당장 확보해야지.”
지크의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딱!
여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스윽! 스윽!
숲 속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는 총 여덟. 온통 검은 로브를 쓰고 있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 같다.
그들을 보고 지크는 야유했다.
“여행 중이라고 하지 않으셨나? 아, 동료들이구나. 그런데 여행 동료들 치고 너무 칙칙하지 않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동료는 가리는 게 좋아. 사람 사이란 게 이 사람 저 사람 다 친하게 지내려면 그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
“잡아!”
여성, ‘로브를 입은 자’들의 우두머리가 지크의 말을 끊고 명령을 내렸다.
그녀는 더 이상 연극을 하지 않기로 정한 모양이었다.
아까의 인자한 표정과 친절한 말투는 모조리 사라지고 싸늘한 얼굴과 서릿발 같은 목소리만이 남았다.
그에 맞춰 지크도 검을 꺼내들었다.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작은 단검.
하지만 뽑아든 단검의 검신이 길어지더니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자기 본연의 잔가지 같은 여러 개의 칼날을 펼쳤다.
숲속에서 나온 ‘로브를 입은 자’들이 포위망을 천천히 좁혀 왔다.
“조용히 우리를 따라와라.”
우두머리가 같잖은 말을 한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조롱하려고 웃은 게 아니다. 너무 가소로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크는 윈두르를 들어 올렸다.
“싫어.”
우두머리가 검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로브를 입은 자’들도 지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꺄아아악!”
갑자기 벌어진 전투에 이블린이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지크는 우두머리의 검을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그리고 몇 걸음 움직였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검들을 피하고 쳐내며 그 사이를 돌파하는 지크의 움직임은 말 그대로 예술적이었다.
턱!
지크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이블린의 앞이었다.
“라일라!”
지크가 소리쳤다.
숲 안에서 강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깜짝 놀라 숲을 쳐다봤다.
콰아아앙!
불기둥이 전장을 휩쓸었다. 지면을 구워가며 날아온 불기둥은 지크와 이블린 그리고 ‘로브를 입은 자’들 절반을 집어삼킨 후 호수에 직격했다.
퍼엉!
불기둥이 직격한 호수 주변이 끓어오르고 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엄청난 위력.
불기둥의 위력은 그것이 휩쓴 전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크으윽!”
“아악! 아아악!”
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로브를 입은 자’ 둘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척 봐도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자들은 그 둘만이 아니었다.
새까맣게 탄 시체 세 구가 검게 그슬린 호숫가에 연기를 내며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크와 그가 지키던 이블린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불덩이가 그들을 빗겨간 건 아니다. 지크가 마법을 막은 것이다.
‘하여간 무지막지한 녀석 같으니라고.’
아직도 남아 주변의 형체를 이지러지게 하는 열기가 이블린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부지런히 검을 휘둘러 주변 대기를 조절하던 지크가 투덜거렸다.
“이, 이건 뭐….”
간신히 살아남은 우두머리가 말을 잇지 못했다.
멀쩡한 수하는 세 명뿐. 단 한 번의 공격에 절반이 넘는 숫자가 죽은 것이다.
그녀를 보고 지크가 비웃었다.
“너만 일행을 데리고 온 게 아냐.”
숲속에서 라일라와 한스, 스녹이 걸어 나왔다.
지크가 종탑 위에서 고급 저택들을 감시하고 있을 때, 한스와 스녹도 거리를 두고 중요하다 싶은 곳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시야가 미치는 곳에 있었고, 서로의 움직임을 바로 알아채도록 신경을 기울였다.
지크가 이블린의 움직임을 알고 움직이자 한스와 스녹도 바로 반응했다.
그들은 가까운 곳에 대기하고 있던 라일라를 데리고 지크를 쫓아 달렸다.
지크가 전력으로 움직였다면 그들이 쫓아올 수 없었겠지만 다행히 지크가 쫓는 이블린의 속도는 그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지크는 종종 자신의 흔적을 남겨 추적을 더욱 쉽게 해주기도 했다.
마법사인 라일라를 업고 오는 게 조금 힘들긴 했지만 한스와 스녹 둘이 번갈아 업고 온 터라 그렇게 무리가 가진 않았다.
오히려 라일라가 종종 공간 이동 마법을 써서 추격이 더 쉬운 감도 있었다.
그들은 지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에서 대기하란 뜻을 읽어 숨어 있었고, 지크의 신호로 전장에 끼어든 것이다.
지크는 남은 적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한스와 스녹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스! 스녹!”
“네!”
“넵!”
“처리해.”
적들을 윈두르로 한 번 가리킨 후 지크는 등을 돌렸다.
윈두르를 등에 메고 이블린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열기가 없는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너무도 무방비한 그 모습에 당연히 ‘로브를 입은 자’들은 지크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솟아난 대지가 지크를 그들과 떨어뜨렸다.
‘로브를 입은 자’들은 뒤를 돌아봤다. 한스와 스녹이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 명은 우두머리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나머지를 맡자.”
“좋아요.”
“내가 우두머리를 맡을까?”
“제가 한 번 맡아볼게요. 아마도 오스프린에서 제가 처치한 사람과 비슷한 실력자 같은데, 그때는 제가 유리한 지하에서 싸워 겨우 이겼잖아요? 그래서 지크 님도 인정해주시지 않으셨고. 이번에 한번 제대로 싸워볼래요. 그때보다 저도 실력이 많이 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한스가 검을 빼들었다. 에스텔레이드의 유려한 검신이 호숫가에 반짝였다.
“너무 긴장하진 말고. 혹시 위험하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넵!”
둘은 ‘로브를 입은 자’들과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그에 비해 라일라는 처음에 마법 공격을 한 이후로 ‘로브를 입은 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바로 지크에게, 정확히 말해서 이블린에게 달려왔다.
전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 이블린을 눕힌 지크가 그녀에게 포션을 먹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블린의 손을 잡으며 라일라가 지크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육체가 손상된 거야. 단련되지 않은 육체로 그렇게 움직였으니 당연한 일이지.”
“…….”
라일라는 이블린을 내려다봤다.
원래의 곱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예쁜 파티 드레스는 여기저기 찢기고 더러워졌다. 팔에는 누구 건지 모를 피가 말라붙어 있고 안색은 창백했다.
“…라일라?”
이블린이 라일라를 불렀다.
“응! 응! 나 여기 있어요!”
라일라가 이블린의 손을 들어 올려 꼭 쥐었다.
“나…오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어떤 일이 일어났든 당신 탓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푹 쉬어요. 우리가 어떻게든 도와줄게요.”
이블린이 잠시 라일라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윽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라일라를 믿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 별다른 선택권이 없기도 했다.
“그럼… 조금만… 잘게요.”
포션의 효능 때문인지 육체의 고통이 사라지며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와 이블린은 그대로 의식을 잃듯 잠이 들었다.
* * *
지크는 이제는 아예 자신의 자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종탑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보는 것은 여느 때와 같이 루즈 저택이다.
그러나 저택은 평소와 달랐다. 저택을 지키고 있던 후작가의 병력은 사라지고 척 봐도 왕국의 정예병인 듯한 자들이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 봉쇄하고 감시하고 있는 거겠지.’
지크는 종탑에서 뛰어내려 수도를 거닐었다.
왕세자 암살 미수라는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수도는 여전히 활기찼다. 탄생제가 미뤄질 기미도 없었다.
‘강행할 생각이군.’
왕세자 암살 미수는 분명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일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대응 방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일단 왕세자가 피해를 입진 않았고, 목격자도 고위 귀족으로 한정됐어. 게다가 국왕의 50번째 생일이 코앞인 데다가 그 때문에 외교사절들도 많이 와 있으니, 왕세자 암살미수 때문에 축제가 중단된다면 그런 망신도 없겠지.’
물론 완전히 소문을 막을 순 없어 위신 실추를 피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강행한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으면, 사건이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다는 뉘앙스를 줄 순 있을 것이다.
‘아니면 빠르게 사건을 해결했다고 주장할 수 있거나.’
어느 쪽이든 떨어진 위신의 일부는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수도의 분위기를 대충 파악한 지크는 수도를 나왔다.
그는 가도를 걷다가 옆으로 빠졌다.
길도 제대로 없는 산을 걸어 올라가길 얼마. 웬 통나무집이 나왔다.
아마도 사냥꾼들이 잠시 휴식처로 사용하는 그런 집인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외부에서 망을 보고 있던 한스와 스녹이 지크를 반겼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허름했다. 세간살이는 없다시피 했다. 더러운 침대와 테이블 하나, 의자 몇 개가 전부다.
침대에 이블린이 누워 있었고 옆에서 라일라가 그녀를 간호하고 있었다.
“상태는 어때?”
“많이 괜찮아졌어.”
지크가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 수도와 루즈 저택의 현 상황에 대해 말해줬다.
“왕세자나 알버스 윈플은?”
“몰라. 그런 정보들은 시중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윈플 저택도 조금 북적거리긴 하더라. 분위기는 루즈 저택과 완전히 달랐지만.”
“그래.”
그때, 이블린이 신음소리를 냈다.
“깨어나려나 보군.”
“그러게.”
이블린의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서서히 뜨였다.
“정신이 들어요?”
라일라가 물었다.
“여긴….”
“안전한 곳이에요.”
라일라가 말했다. 지크가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뭣 좀 먹고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의 이블린에게 가장 필요한 건 충분한 휴식과 영양의 보충이었다.
바깥에 있는 종들에게 잡일을 시키기 위해 지크는 집을 나섰다. 이블린이 친한 라일라와 둘만 있게 해주려는 배려이기도 했다.
* * *
하루를 푹 쉬고 충분한 영양섭취를 한 이블린은 안색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물론 평소에 먹는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닌 일반적인 음식을 먹느라 상당히 고생하긴 했다.
그래도 이블린은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꾸역꾸역 음식을 씹어 삼켰다.
이블린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지크는 자신이 알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말이 계속될수록 그녀의 낯빛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자신을 둘러싼 음모가 공포스러웠고, 무엇보다 그토록 믿었던 알버스가 음모의 주체라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믿을 수 없어요!”
그녀는 지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덜덜 떨며 머리를 감싸 안고 연신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조금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지크가 일어서며 라일라에게 눈짓했다. 둘은 집 밖으로 나갔다.
“역시 믿지 않는군.”
예상했던 일이라 지크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라일라는 힐끔힐끔 방문을 곁눈질했다.
“혼자 둬도 되는 거야?”
지금 상태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이상하지 않다.
“기척은 확실히 느끼고 있으니까 걱정마.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돌입할 거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근데 이젠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두진 않을 거지?”
“당연하지. 일단 이블린이 이 사태를 믿게 만들 거야. 계획은 이미 세워뒀어. 이블린이 알버스 윈플이 배신자라는 걸 믿게 만들고, 그리고 겸사겸사….”
지크가 웃었다. 그건 지크가 상대를 괴롭힐 때 짓는, 시리도록 지독한 웃음이었다.
“알버스 윈플도 가볍게 괴롭힐 그런 계획 말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