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아, 그전에 줄 게 있어.”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 알버스가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받아둬. 너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그건 반지였다. 새빨간 보석 세 개가 가지런히 박혀 아름답게 빛나는 그건 척 보기에도 귀해 보였다.
이블린이 그걸 홀린 듯 쳐다봤다.
“예뻐요.”
“한번 껴 보겠어?”
“네.”
이블린이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왼손 약지는 아니었다. 그곳엔 일찌감치 알버스가 약혼 증표로 준 다른 반지가 표표히 빛나고 있었다.
“역시 잘 어울려.”
알버스는 반지와 함께 이블린의 손을 슥 쓸어내렸다.
“갈까? 공작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실례니까.”
“네.”
이블린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알버스의 팔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에 새로 끼워진 붉은색의 반지가, 한순간 요사스럽게 빛났다.
* * *
파티는 순조로웠다. 초대된 사람이 얼마 없어 인사를 다니는 시간은 짧았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고위급 인사였기에 평소보다 언행을 더욱 조심해야 했다.
거기에 사방을 휘어 감는 파티의 열기, 사람들을 지나칠 때마다 올라오는 향수의 향. 게다가 요새 많은 파티에 참여를 해 쌓인 피로감까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약간 어지러움증을 느끼는 것은.
“괜찮아?”
“네, 버틸 만해요.”
이블린은 알버스가 걱정하지 않도록 애써 웃어보였다.
“조금만 더 버티자. 이제 곧 왕세자님이 오실 거야. 그분에게 인사만 드리고 쉬자.”
“네.”
이블린은 알버스의 에스코트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움직였다.
드디어 왕세자가 도착했다. 공작 내외와 함께 등장한 왕세자를 향해 사람들이 하나둘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블린이 왕세자를 쳐다봤다. 어지럼증이 더 심해졌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엄청나게 대단한 걸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왕세자와 인사를 하고 약간의 덕담을 나눈 다음 물러나면 된다.
덕담도 알버스가 대부분 알아서 해 줄 것이다. 이블린이 조용히 있다고 해도 몸이 아파서 그렇다고 하면 상대도 뭐라 하지 않는다.
드디어 왕세자와 대면할 시간이 왔다. 둘은 왕세자 앞으로 나갔다.
왕세자가 웃으며 둘을 반긴다.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가 뭐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지럼증이 더 심해졌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지금 물러나지 않는다면 더 심한 추태를 보일 것 같다. 그녀는 왕세자에게 양해를 구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알버스를 쳐다봤다.
알버스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마음이 통한 것일까. 그러나 평소와 달리 알버스의 눈동자가 무척 차가운 것같이 느껴졌다.
의식이 아득해졌다. 주변의 소리가 웅웅 울린다. 무언가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나는 것 같다. 몸에 뜨거운 액체 같은 것이 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기도 전, 이블린의 의식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 * *
지크는 여느 때와 같이 그 종탑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급 주택가 근처에 있는 이 신전은 귀족들의 저택을 감시하기에 너무나 수월한 장소였다.
이블린과 알버스가 탄 마차가 어느 저택으로 들어가는 걸 지크는 주시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왕가의 문장이 박힌 마차가 저택에 들어서자 몸을 일으켰다.
‘오늘일 수도 있겠어.’
알버스가 음모를 실행하는 날을 지크는 국왕의 생일 당일로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도 알버스와 이블린 그리고 왕세자라는 카드가 모두 모였다.
실행 날이 오늘이어도 이상하지 않다. 지크는 조금 더 집중해서 저택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저택에서 소란이 일었다.
쿵!
바깥으로 누군가 뛰어내렸다. 그 인영이 누구인지 지크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블린!’
하지만 정말로 그녀인지 의심이 들었다.
지크가 알기로 그녀의 육체 능력은 딱 그 나이 대의 귀족 아가씨였다. 그러나 저택에서 뛰어내린 그녀의 몸놀림은 웬만한 숙련된 기사 못지않았다.
지크는 종탑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집들의 지붕 위를 건너뛰며 그녀를 추적했다.
순식간에 도시 외곽에 도착한 그녀는 성벽을 타고 넘었다. 지크도 뒤를 쫓아 성벽을 넘었다.
도시를 벗어난 후에도 이블린은 멈추지 않았다. 가도를 벗어나더니 바로 숲으로 들어갔다.
‘이 방향은….’
지크는 이블린이 어디로 가는지 대충 눈치 챘다.
‘호수 방향이군.’
호수가 수도의 바로 옆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왕국 전체를 생각할 때나 그럴 뿐, 실제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다.
지크 일행이나 이블린 일행도 호수로 갈 때 상당한 시간을 쓰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녀는 그 먼 거리를 한 번에 주파하기라도 하려는 듯 계속 달렸다.
‘저러면 몸이 엉망진창이 될 텐데.’
어떤 힘으로 저런 초인적인 힘을 내는지 몰라도 일단 육체적 능력의 기본은 당연히 육체다.
단련되지 않은 이블린의 육체로는 나중에 후유증이 심할 게 보였다.
둘은 상당한 시간 동안 달렸다. 지크가 예상한 대로 이블린이 도착한 곳은 그 호수였다.
턱!
그녀가 호숫가에 섰다. 지크는 조용히 근처 수풀 속으로 숨어들었다.
호숫가에 침묵이 감돈다. 숨어 있는 지크는 물론이고 열심히 달려온 이블린도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 같아.’
이상이 있는 건 분명했다. 지크는 조금 더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 * *
“어?”
이블린은 정신을 차렸다.
‘뭐가 어떻게 된….’
“악!”
그녀가 쓰러졌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다리가 타는 것 같고 팔은 떨어질 것 같다. 숨이 턱턱 막혔고 내장은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온몸이 아팠다. 그것도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아아아악!”
몸을 끌어안고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 줄줄 났다. 하지만 그녀의 처량한 비명에도 누군가 달려오는 사람은 없었다.
“누, 누가 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잔뜩 흐려진 시야가 간신히 주변 환경을 담았다.
‘여긴…!’
익숙한 곳이다. 그녀가 자주 놀러 오던, 그녀만의 작은 비밀 장소.
‘내가 여기에 왜….’
그녀는 분명 공작가의 파티에 초대되어 약혼자인 알버스와 같이 갔었다.
‘그리고….’
흐릿한 기억이 점점 선명해졌다. 왕세자에게 인사를 하던 중 어지럼증이 너무 심해 실례를 무릅쓰고 물러나려 했다.
그 순간, 의식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는 대체 어디에서 난 건지 모를 날카로운 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블린 자신도 놀랄 정도의 움직임으로 왕세자를 찔렀다.
“아…!”
절망적인 기억. 하지만 더더욱 절망적인 건, 그때 칼을 맞은 건 왕세자가 아니었다.
왕세자를 지키기 위해 몸으로 막아선 알버스였다.
“아아아…!”
몸의 아픔이 일순 사라졌다. 강한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 내가 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그녀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의 무게가 그녀의 심신을 억눌렀다.
저벅!
호숫가에서 절규하고 있던 그녀의 앞에 낯선 발이 나타난 것은 그 때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로브를 입은 자’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낯선 이에 그녀가 겁을 먹었다. 하지만 ‘로브를 입은 자’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괜찮나요?”
여성의 목소리. ‘로브를 입은 자’가 로브를 벗었다. 30대 중반 정도의, 인자한 모습의 여성이었다.
“누…누구….”
“여행자예요. 평소에 이 호수를 좋아해서 종종 들리는데 아가씨가 쓰러져 있더군요.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일어설 순 있겠어요?”
이블린은 고개를 저었다. 온몸이 아파 기어 다니지도 못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군요. 업혀요.”
“네?”
“업히라고요. 수도 인근이라 정말로 위험한 몬스터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맹수나 약한 몬스터들은 존재하니까요. 다친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에요.”
여성이 한 걸음 다가오자 이블린이 움찔했다. 여성은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전 당신 편에요.”
낯선 이의 친절. 어떻게 보면 수상해보일 수도 있지만, 방금 전 너무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던 터라 이블린은 그 친절에 가슴이 먹먹했다.
또르르 흘러내리는 감동의 눈물을 머금은 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갑자기 들려온 또 다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이야, 가슴 찡한 장면이네. 이번 시나리오는 이런 거였어?”
이블린도 여성도 흠칫 놀랐다. 이블린이 고개를 돌렸다. 여성은 아예 크게 물러났다.
조금 전의 인자한 웃음은 어디로 갔는지 날카로운 눈초리로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지크 님?”
“네, 지크입니다. 잘 지냈냐고 물어보기에는 조금 어려운 상황 같네요, 루즈 공녀님.”
“여, 여긴 어떻게….”
“공녀님을 쫓아왔습니다.”
“네?”
이블린의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자신을 쫓아왔다. 이블린은 그걸 지크가 자신의 죄를 묻기 위해 쫓아왔다고 알아들었다.
지크의 신분이나 여타 이런저런 상황들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블린은 그런 걸 냉정하게 생각할 상태가 아니었다.
“아, 아니에요!”
이블린이 소리쳤다.
“내가… 내가 한 게 아니에요!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저, 전 절대 왕세자 전하를 찌르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거기에 알버스가 찔리게 되…!”
새삼 약혼자를 찌른 감촉이 기억나 이블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방울이 생겨났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저택 내의 상황을 파악한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시죠, 공녀님. 전 공녀님의 무죄를 알고 있습니다. 공녀님은 죄가 없어요. 그저 음모에 휘말린 것뿐입니다.”
“으, 음모?”
이블린이 놀라 물었다.
“네, 음모. 아주 더럽고 비열한 음모죠.”
지크가 여성을 손가락질했다.
“바로 저놈들의 음모요.”
이블린이 놀라 여성을 쳐다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여성이 시치미를 뗐다. 여전히 지크를 경계하고는 있었지만, 아까의 날카로움은 없었다.
“저는 그저 우연히 이분을 도우려던 것뿐이에요. 음모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로브의 두건을 스스로 벗은 건 네가 처음이야. 하긴, 네놈들도 꽤 여러 종류의 놈들이 있는 모양인데 너같이 적극적으로 관계되려는 놈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지.”
지크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 무례한 사람과 아는 사이인가요?”
“조, 조금….”
이블린의 눈이 이리저리 헤엄쳤다. 머리와 몸은 아프고 상황은 따라가질 못 하겠다.
“갑자기 저를 몰아붙이는 걸 보면 당신이 휘말린 음모라는 건 어쩌면 저 작자가 계획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지. 이런 때는 남 탓을 하는 게 최고지. 솔직히 여기서 공녀님에게 내 무죄를 주장할 근거도 없으니까.”
“역시 당신이….”
“하지만 네가 본색을 드러내게 만들 수는 있어.”
지크는 씨익 웃었다.
“전 세계에서 사람들을 타락시켜서, 이른바 ‘마인’이란 걸 만들어내려는 놈들. 그게 너희들이지.”
“……!”
“그리고 난 꽤 여러 번 너희의 계획을 방해했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
“조금 더 말해볼까? 어디 보자. 분명 너희는 그 귀한 아티팩트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고, 우두머리 놈들은 이상한 괴물로 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지크는 여봐란 듯 턱을 들었다.
“어때. 나 정도면 너희가 ‘서큐버스’를 무시하고 먼저 확보해야 할 정도의 인재라고 생각하지 않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