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보통 이러면 이블린은 어느 정도 장난스럽게 말을 하다 곧 라일라를 배려해 자신의 약혼자 이야기로 넘어가곤 했다.
물론 배려만이 아니라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화제는 그렇게 흘러갈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평소 이블린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충실했던 라일라가 입을 연 것이다.
“공녀님.”
“네?”
이블린을 불러 놓고도 라일라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걸 보고 무엇을 오해한 것인지 이블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지크 씨와 뭔가 진전이라도 있나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런가요.”
라일라가 당황하며 부정하자 이블린이 실망했다.
“그럼 무슨 일인가요?”
“공녀님의 약혼자… 알버스 윈플 공자님 말인데요.”
“그이에 대해 궁금한 점이라도 있나요?”
목소리에서부터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요 근래에 나눈 이야기로 그녀가 얼마나 약혼자를 사랑하고 있는지 라일라는 알고 있었다.
지크는 지금도 ‘공녀 이블린 루즈’와 ‘서큐버스 이블린 루즈’와의 괴리감에 몸부림치고 있지만 라일라는 제법 익숙해졌다.
지크처럼 직접 경험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요 근래 계속 만나며 친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그자가 흑막이라고 했지.’
지크에게 들었다. 알버스가 ‘로브를 입은 자’들과 손을 잡고 이블린을 주축으로 한 음모를 짜고 있다고.
게다가 이블린이 저렇게 알버스를 사랑하게 된 것도 모두 알버스의 의도한 것이라고 했다.
한데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품에 안고 행복에 젖어있다.
“좋은 분이라고 하셨죠?”
“그럼요. 제 약혼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제게 잘 대해주는 분이세요.”
남성을 어려워하는 이블린을 저렇게까지 빠져들게 만들 정도면 정말로 보통 노력으로는 안 됐을 것이다.
‘그게 정말 사랑이나, 아니면 적어도 정략의 이유로서라면 괜찮았을 텐데….’
“만약 그분과 안 좋게 끝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무척이나 무례한 질문이다. 라일라는 긴장했다. 어쩌면 저 착한(지크라면 기겁을 할 만한 수식어지만) 이블린이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의외로 이블린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가 은은한 시선으로 라일라를 쳐다봤다. 그러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라일라 씨는 뭐랄까, 감정에 서투른 기미가 있었죠.”
“죄송해요. 대답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아뇨, 괜찮아요. 라일라 씨도 드디어 사랑에 호기심을 내비치는 것 같아 저는 기뻐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이블린이 예쁘게 웃었다. 하지만 곧 진지한 태도로 말을 하고 시작했다.
“무척 아프겠죠. 슬프겠죠. 하지만 이 사랑을 후회하지는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 그건 무척이나 아름다운 일이니까요.”
그녀는 상체를 숙여 라일라의 손등을 덮었다.
“지크 씨가 되도 좋고, 다른 사람이 되어도 좋아요. 사랑을 해 보세요, 라일라 씨.”
그러며 다시 웃어주는 그녀를 라일라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 * *
숙소로 돌아온 지크는 바로 그 날 루즈 저택에 침입하기 위해 움직였다.
같이 돌아온 라일라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기색이라 물어보지 않았다.
조언과 참견은 종이 한 장 차이고, 라일라의 상태를 보면 지금은 참견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라일라가 만들어 준 아티팩트는 마지막으로 윈플 저택에 침입할 때 남은 횟수를 모두 사용해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저택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닐 이유는 없어 난이도가 많이 낮으니 상관없었다.
스윽.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지크는 이블린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로 잠이 든 이블린이 보였다. 규칙적인 호흡 소리가 그녀가 잠에 푹 빠져 있는 걸 알렸다.
지크는 바로 화장대로 접근했다. 가장 큰 서랍을 뺐다. 이중 공간이 있는 곳이었다.
‘일단 화장품부터 빼내야지.’
지크는 마법 상자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서랍에 들어 있는 물품을 놓인 그대로 종이에 그려 넣기 시작했다.
대략적인 위치와 거리, 놓여 있는 방향과 방식 등등. 나중에 그려 놓은 걸 토대로 서랍 속 물건을 고스란히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림을 전부 그린 후 지크는 물건들을 빼냈다.
‘이건 어떤 방식으로 열어야 할까.’
단순하게 바닥 위에 바닥 하나를 더 덮어 놓아 이중 바닥을 만든 건지, 그도 아니면 더 특별한 장치가 있는 건지 알아야 했다.
지크는 이번엔 서랍 바닥의 전체에 마력을 쏘아 보내봤다.
‘기계 장치 같은 건 안 달렸군.’
지크는 서랍 바닥을 쓸어내렸다. 틈이 없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 서랍 아래에 손을 넣어 서랍 뒤쪽을 만져봤다.
‘여기군.’
손잡이 같은 것이 있었다. 지크는 그것을 천천히 뒤로 당겼다.
스으으윽.
서랍 바닥이 슬슬 뒤로 밀려나고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공간 안에는 책 한 권이 있었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표지가 인상적인 책이었다.
지크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이게 증거인가?’
책을 펴 봤다. 예쁜 글씨체가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내용은 절대 예쁘다고 할 수 없었다.
‘일기장이군.’
아마도 이블린의 일기장인 모양이었다.
숨겨둔 서랍에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그런 깜찍한 행위가 아니었다.
페이지를 넘기던 지크가 피식 웃었다.
‘뭔 놈의 일기장이 미래의 일까지 미리 쓰여 있는 거야?’
자신과 라일라처럼 이블린도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건 아니지.’
그렇다면 그녀가 지크를 모를 리 없다. 무엇보다 그 남자 밝히는 서큐버스가 이렇게 얌전하게 살고 있을 리도 없다.
지크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이블린을 쳐다봤다.
증거라는 게 방에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하기엔 이 책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니까….’
지크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블린을 왕세자 살해범으로 몰겠다는 거군.’
일기장에는, 왕세자를 살해하기 위한 이블린(?)의 계획이 일기 형태로 쓰여 있었다. 동기로 보이는 이 나라에 대한 섬뜩한 저주와 함께.
* * *
지크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의 방에는 라일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알아냈어?”
밑도 끝도 없는 말. 그러나 알아듣기엔 어렵지 않다.
“그래.”
“뭐였어?”
“이블린에게 왕세자 암살 누명을 씌우려는 것 같아.”
라일라의 표정이 굳었다. 지크는 의자로 다가가 털썩 앉았다.
“어떤 식으로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데?”
“그것까지는 몰라.”
라일라가 지크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생각해 봐야지.”
지크는 테이블 위에 있던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라일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할 말이라도 있어?”
“차라리 알버스 윈플을 당장이라도 암살하는 건 어때?”
“어째서?”
“굳이 어렵게 갈 필요 없잖아.”
지크는 라일라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자신의 기억을 그의 눈동자가 헤집는 것 같아, 라일라는 눈을 돌렸다.
“…정이 들었군.”
“…착한 아이야.”
라일라가 말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서큐버스와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착해.”
“요하임 녀석도 그랬어. 자기를 그토록 싫어하는 형을 위해 가문을 나와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싫은 소리를 못하는 놈이었지.”
“대체 그런 애들이 어떻게 그런 잔혹한 인물이 된 거지?”
“오히려 그런 녀석들이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변했을 수도 있어. 검은색으로 가장 물들기 쉬운 색은 하얀색이라고 하니까.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나도 그랬어. 가문의 냉대에도 상관없이 그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던 놈이었지.”
지크는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오른 팔을 팔걸이에 올리고 삐딱하게 몸을 기울였다.
“네 질문에 답해주자면, 안 돼.”
“…알버스를 죽이면 음모를 방지할 수 있어. 약혼자를 잃은 슬픔에 잠기겠지만 그래도 누명을 쓰지도 않을 거고 서큐버스가 되지도 않을 거야.”
“로브 놈들이 있어. 알버스가 사라진다고 로브 놈들이 포기할 것 같진 않아. 오히려 변수를 찾겠답시고 이블린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지. 그것까지 막으려면 한동안, 어쩌면 평생 이블린의 곁에서 호위를 하고 있어야 할 거야. 할 수 있겠어?”
“…….”
라일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적어도 로브 놈들은 죽여야 해. 그러려면 녀석들이 이블린에게 접근할 순간을 기다려야 하고.”
“사태를 두고 보겠다는 거지?”
“그래.”
“…구할 자신은 있어?”
“물론.”
지크는 태연스레 대답했다. 그건 실패를 전혀 예상하지 않는 자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알버스 윈풀이란 놈을 무척 괴롭게 할 자신도 있어.”
지크가 웃는다.
심각한 분위기에 빠져있는 라일라도 한순간 움찔 할 정도로, 지크의 웃음엔 사람의 공포를 유발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 * *
국왕의 탄생제라는 커다란 행사가 눈앞에 닥쳤지만, 그렇다고 귀족가의 사교계가 문을 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평상시에는 영지에 처박혀 있을 귀족들이 하나같이 수도로 올라오기에 서로간의 연을 쌓거나 고위 귀족에게 면식을 만들거나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거나, 아니면 그냥 즐기기 위해서 등등 온갖 이유로 파티가 열렸다.
후작가의 영애인 이블린에게도 많은 초대장이 왔다.
평소라면 호수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을 시기지만 몬스터의 출현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나중에 올라온다던 아버지와 오빠의 상경도 계속 늦어지는 상황.
때문에 이블린도 후작가의 얼굴로서 파티에 참석을 했다.
피곤하기도 한 일정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파티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피앙세가 그녀를 에스코트했기 때문이다.
“안녕, 이블린. 오늘도 아름답네.”
입에 버터를 바른 듯한 느끼한 말투. 하지만 콩깍지가 확 씌워진 이블린은 얼굴을 붉히며 미소 지었다.
“당신도 여전히 멋있어요, 알버스.”
“이블린의 옆에 서려면 이 정도 수준은 갖춰야지. 그래야 부끄럽지 않으니까.”
그리고 손을 내민다. 이블린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알버스는 이블린을 에스코트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오늘 갈 곳은 이 나라의 공작인 소너스 공작가가 주최한 파티였다.
커다란 파티는 아니다. 돌려진 초대장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초대받은 자들은 백작급 이상의 고위 귀족들뿐. 말 그대로 국가 권력의 중추만이 참여하는 그런 파티였다.
게다가 이 파티엔 귀빈이 참석할 예정이기도 했다.
“왕세자님이 참석하신다고 하셨죠?”
“그렇지. 왕세자님은 공작님의 외손자이시기도 하니까.”
“그분도 오랜만에 뵙네요.”
“어라? 왕세자님께 관심이 생긴 거야? 이거 질투 나는데.”
“장난 그만하세요.”
이블린이 샐쭉한 표정으로 말하자 알버스는 웃으며 사과했다. 이블린도 곧 다시 웃으며 알버스와 담소를 나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은 언제나 행복하다. 시간가는 줄을 모를 정도로.
그 때문일 것이다.
“도착했어, 이블린.”
‘어라?’
마차가 도착한 줄도 몰랐던 것은.
“벌써 도착했어요?”
“그래. 저기 공작가가 보이잖아.”
마차의 창문 밖으로 웅장한 공작 저택이 보였다. 이블린은 고개를 저었다.
“대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잠깐 주변 상황을 잊었나 봐요.”
“나와의 대화가 그만큼 재미있었다니. 이거 기쁘군.”
알버스는 마차의 문을 열고 이블린이 잘 내릴 수 있도록 에스코트했다.
마차에서 내린 이블린은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했다.
그래서 자신을 보고 불길한 웃음을 짓는 알버스의 모습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