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깊은 밤이었다. 이미 대부분의 집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사라지고, 도시를 순찰 도는 경계병의 횃불만이 간간히 도시에서 빛난다.
하지만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고급 주택 지구는 아직 빛이 제법 남아있는 편이었다.
마당을 밝히는 불들이 여기저기 타 올랐고, 아직 잠들지 않은 자들이 있는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파티를 하는지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곳도 있었다.
윈플 후작의 저택은 마당에 최소한의 광원만 유지한 채 아늑한 밤의 침묵으로 덮인 쪽이었다.
하지만 몇몇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걸 보니,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크는 신전의 종탑 위에서 윈플 후작의 저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전에서 저택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지크에게 그런 거리는 별 의미 없었다.
‘…슬슬 다시 잠입해볼까.’
지크는 사흘 동안 윈플 후작가를 들락날락거렸다.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지크의 나쁘지 않은 잠입 실력과 라일라가 준 아티팩트 덕에 예상보다 수월했다.
하지만 잠입 성과가 만족스러웠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알아낸 게 별로 없어.’
그냥 평범한 귀족가의 저택의 모습이었다.
사용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귀족은 놀거나 업무를 보거나 밖으로 외유를 했다.
수상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알아낸 건 윈플 후작이 없다는 건데….’
지금 저택에 있는 귀족은 윈플 후작가의 후계자이자 이블린의 약혼자인 알버스 윈플뿐이었다.
‘윈플 후작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지만 알아낸 건 그뿐, 더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더 이상 잠입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고.’
이미 라일라가 준 아티팩트의 횟수도 기척을 줄이는 것 한 번과 모습을 숨기는 것 한 번만이 남았다.
‘저 녀석들이 이블린의 사건과 아무런 관련도 없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고작 며칠 관찰한 것으로 확답을 내릴 순 없다.
‘역시 조금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으려나.’
지크는 마음을 먹고 몸을 일으켰다.
종탑이 꽤 높아 주변은 바람이 거셌다. 입고 있는 로브가 펄럭인다. 그러나 지크의 몸은 흔들림이 없었다.
덜컥!
허리춤에 매어 놓은 검이 바람에 흔들렸다. 지크의 시선이 조용히 검으로 향했다.
‘윈두르.’
우연히 찾은 정체불명의 검. 나뭇가지 같은 기묘한 모양이 특징적인 검이다.
그러나 지금 지크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은 그 특징적인 외관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크기도 훨씬 작았다.
평소에 지크는 윈두르를 마치 방패처럼 등 뒤에 메고 다녔다.
‘그런데 이런 기능이 있었다니.’
살짝 억울할 정도였다.
지금 윈두르의 모습은 딱 특색 없는 단검이었다.
평범한 검으로 변한 상태에서, 지크가 잠입을 위해 조금 더 들기 편한 모습이 좋겠다고 중얼거리자 몸을 축소시킨 것이다.
‘다시 장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도 쉬웠고.’
단검으로 변한 윈두르를 들고 장검이 전투에는 더 편하다고 하자 다시 길이를 늘였다.
그 모습을 지크와 라일라 모두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봤었다.
‘뭐, 좋아. 내게 불편한 일은 아니니까.’
오히려 앞으로 윈두르를 들고 다니기 편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능 하나하나를 알아가다 보면 윈두르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지크는 종탑에서 뛰어내려 윈플 저택으로 향했다.
* * *
그는 능숙하게 저택 안으로 잠입했다. 건물의 구조는 요 사흘 간 전부 파악해둔 상태. 지크는 살금살금 저택을 거닐었다.
헤맬 필요는 없었다. 지크가 원하는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지크는 어떤 방 앞에 도착했다.
‘없군.’
아마도 업무를 보고 있을 터. 지크는 조용히 그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침실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방을 지크는 천천히 거닐었다.
‘어디가 좋을까?’
이런 건 구도를 잘 잡아야 한다. 지크는 방을 요모조모 살펴보기 시작했다.
‘음, 여기가 괜찮을 것 같아.’
교묘한 사각에 위치해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진 않을 것이고 혹시나 하는 상황에 도주할 창문도 가까이 있다.
‘좋아, 여기로 하자.’
그렇게 정한 지크는 천천히 방을 구경했다. 이 방의 주인이 언제 올 지 모르니, 그 때까지는 자유시간인 것이다.
방 안은 전체적으로 화려했다. 여기가 후작 저택이라는 걸 생각하고 봐도 그랬다.
‘방 주인의 성향이 대충 보이는군.’
사치가 심한 편. 그리고 보통 그런 자들은 과시욕도 심한 자들이 많다.
하지만 지크는 딱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사치가 심한 거야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없고 과시욕도 그저 주변인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을 뿐, 나쁜 일이라고 하기 뭐하다.
무엇보다 그런 성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선한 자들도 있었고 애초에 이 방이 방 주인의 의도대로 꾸며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사람은 대하고 봐야지.’
하지만 주변 흔적들로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지크는 더욱 자세히 방을 살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주인을 짐작할 만한 흔적은 없었다.
그때 지크의 기감에 누군가 방으로 접근하는 것이 걸렸다.
지크는 급히 자신이 봐놨던 곳으로 걸어갔다.
혹시나 어색한 곳이 없는지 몸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고 로브를 푹 눌러 썼다. 그리고 조그맣게 목소리를 내봤다.
힘을 주고 내리눌러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준비는 끝났다. 지크는 입을 딱 다물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대기했다.
* * *
알버스 윈플은 오늘도 바쁜 일정을 끝내고 돌아 왔다.
국왕 탄생제를 맞아 수도로 올라온 다른 귀족들과 정신없이 만나고 탐색하고 거래하니 시간이 금방금방 갔다. 게다가 돌아와서는 가문의 일을 봐야 했다.
평소 단련한 덕에 육체적 피로는 없었지만 정신적 피로는 꽤 컸다.
“후~!”
한숨을 한번 내쉬고 방문을 열었다. 지금은 침대가 그리웠다.
그는 촛불도 켜지 않고 바로 침대에 스며들려 했다.
“알버스 윈플.”
방 안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흠칫!
피곤에 흐릿했던 알버스의 눈이 급격하게 초점을 맞췄다. 바람처럼 몸을 돌려 주먹을 내밀었다.
어둠 속으로 무언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온통 검은색 일색의, 주변 어둠으로 바로 스며들 것 같은 그런 차림을 한 자가 서 있었다.
누군가 침입을 한 것이다. 당연히 알버스는 바로 움직여야 했다.
커다랗게 소리를 쳐 경비를 부르며 도망치든가 적어도 주변에 무기로 쓸 만한 걸 찾아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알버스는 오히려 마음을 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누군가 했더니.”
적지 않게 놀랐는지 알버스는 가슴을 한번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는 침입자를 한 번 노려보더니 방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초에 불을 붙였다.
방 안에 불빛이 맴돌자 침입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온통 검은색의 로브를 입은 수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 하지만 그 모습을 확인하고 알버스는 더욱 마음을 놓았다.
“어쩐 일이요. 계획이 어긋나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접촉을 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설마 계획이 어긋난 거요?”
“아니. 아직은.”
거칠게 침대에 앉던 알버스의 눈이 일그러졌다. 그가 슬그머니 침대에서 엉덩이를 뗐다.
“…너 누구냐.”
그와 거래를 나눈 자와 목소리가 달랐다.
처음 자기 이름을 부를 땐 너무 놀라 제대로 인식하지 못 했지만, 자세히 들으니 낯선 목소리다.
거기에 마치 인위적으로 목소리를 숨기듯 거칠고 억눌린 목소리는 그의 수상함을 배가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명령을 받고 왔다. 계획의 진행 상황을 듣고 오라고 하셨다.”
“누가?”
“너와 이야기를 나누던 분.”
알버스가 눈을 찡그렸다.
“왜 본인이 직접 오지 않았지?”
“바쁘시다. 계획은 너만 진행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고 갑자기 처음 보는 놈을 보낸다고?”
수상하다. 알버스의 눈에 의심이 가득 담겼다.
“내가 말하지 않겠다면?”
“상관없다.”
“…명령을 받고 왔는데 상관이 없다고?”
“나는 전달자일 뿐. 네가 말하기를 거절했다 보고하면 된다.”
“내가 곱게 돌아가게 둘 것 같나?”
“상관없다.”
“…내가 거짓으로 말을 한다면?”
“상관없다.”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정말로 알버스의 계획만을 듣고 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다.
‘완전 인형이군.’
하지만 단순한 전달자라면 오히려 저런 자가 더 믿음직한 법이다.
스스로 그 어떤 가치 판단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말만을 전할 테니까.
알버스는 고민에 빠졌다. 수상하기 이를 데 없지만 차림새는 그자와 똑같다. 게다가 계획의 존재도 알고 있다.
“…아까 ‘아직은’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계획이 어긋날 낌새가 있다는 뜻 아닌가? 그걸 알려준다면 나도 댁을 믿지.”
“…이블린 루즈에게 이상한 것들이 붙었다.”
“아, 그거 말이군.”
여기까지 정보를 알고 있다면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신뢰감이 싹 텄다.
“그런데 고작 그 정도로 날 찾아 온 거야? 계획에 지장이 있을 까봐?”
“우리는 변수를 싫어한다.”
“젠장, 댁에게 명령 내린 사람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변수, 변수. 알버스가 만났던 사내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다.
그는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다시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래, 뭐부터 듣고 싶소?”
알버스가 태도를 조금 바꿔 하대를 반존대로 올렸다.
“모른다. 그저 듣고 오라고 했을 뿐.”
“아, 젠장! 아무리 전달만 하는 인형이라도 기본적인 정보는 줘야할 거 아냐.”
알버스가 뒷머리를 벅벅 긁어 성질을 냈다.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침입자는 묵묵히 알버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도 조금 부럽긴 한데.’
능력 있는 도구. 그것도 본인이 도구라고 인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충성심을 잃지 않는 도구는 희귀했다.
“좋아, 그럼 일단 이블린에 대해서부터 말하겠소.”
이블린에 대한 변수 때문에 왔으니 그녀에 대해서 말하는 게 좋다고 여겼다.
“솔직히 아직 찾아가보진 않았소. 호숫가에 만난 어떤 이들을 가까이 한단 얘기는 듣긴 했소.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녀석이 뭔가 변화를 하거나 하진 않을 거요.”
알버스가 씨익 웃었다. 무척이나 비열하고 사악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당신들이 준 정보로 철저하게 나한테 빠지게 만들어 놨으니까.”
마치 거대한 음모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그가 우쭐거렸다. 하지만 침입자는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알버스는 김이 빠졌다. 혀를 한번 차고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소. 아마 호기심에 천한 것들을 몇 번 만나고 다니는 모양인데 고작 그 정도로 사람이 변하진 않을 테니까. 그래도 한 번쯤 봐야 되는 건 사실이니, 곧 만나보리다.”
그러면서 만족스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말했던 것처럼 그 빌어먹을 호수에서 빨리 돌아왔으니, 만날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오.”
그리고 한숨을 쉰다.
“하여간 그놈의 호수가 뭐라고 수도에 올 때마다 꼬박꼬박 들리는지. 만약 당신들이 수를 쓰지 않았더라면 한참을 거기서 놀고 있었겠지. 뭐, 어쨌든 다시 제 저택에 틀어박혔으니 그 녀석은 내가 언제든 조종할 수 있소. 그러니 걱정 마시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