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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130화 (130/628)

제130화

그 기억은 예전 피 웅덩이에서 목욕하는 요하임의 대화 이후의 모습이다.

요하임의 화려하고 뻔뻔한 궤변에 휘말려 그가 인상적인 피 목욕을 하는 걸 지크가 보고만 있을 때, 그 목소리는 들렸다.

“거기서 뭐 하세요, 보스?”

지크는 목소리가 들려 온 뒤편을 쳐다봤다.

그를 보스라고 부르는 부하는 한 명뿐이었다.

적갈색 머리가 요란하게 흔들린다.

착용한 옷은 급소만 겨우 가리는, 입는다기보다는 걸쳐놨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천 쪼가리뿐.

선정성만 더한다.

청초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두른, 눈 돌아갈 정도의 미인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뭐에요. 요하임이랑 둘이서 데이트라도 하고 있었던 건가요?”

“농담으로라도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마라.”

지크가 손사래를 쳤다. 요하임은 피를 듬뿍 떠 어깨 위로 뿌렸다.

그녀, 이블린은 그런 요하임을 보고 질려했다.

“기가 막혀! 대체 저런 게 뭐가 좋다고.”

“내 말이 그 말이다!”

드디어 말이 통하는 상대와 만났다. 지크는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도 절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을, 그의 부하 중 그를 포함해 정상적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을 -지크 본인은 자신이 정상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지크는 잊고 있었다.

“아앗!”

그녀가 놀라 소리를 지르더니 시체 한 구를 집어들었다.

용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 시체는 생전에 굉장히 잘 생겼다는 소리를 들었을 게 분명할 정도로 좋은 용모를 하고 있었다.

“야, 내가 남자 중 괜찮은 놈들은 죽이지 말고 빼놓으라고 했잖아!”

“나는 승낙한 적 없어.”

자세를 달리하며 요하임이 대꾸했다.

“어차피 너는 피만 필요한 거 아냐! 내가 다른 놈들 사냥해 준다니까!”

“필요 없어.”

“아, 진짜! 피의 주인을 가리는 것도 아니잖아!”

그녀가 지크를 돌아봤다.

“보스! 보스도 저 녀석에게 뭐라고 한마디 해봐요!”

하지만 지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머리를 짚을 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이블린이 입을 삐죽댔다.

“쳇! 목이나 챙겨야지.”

허벅지에 메고 있던 단검을 뽑아 목을 잘라낸 그녀는 사내의 목을 한 팔에 끼고 마치 쇼핑하듯 시체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또 다른 미남 발견!”

이블린은 그 미남을 죽인 요하임을 다시 한번 흘겨보고 또다시 목을 잘랐다.

마치 야만인들이 자기가 죽인 수급을 전리품으로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는 그런 행위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의 행위는 그저 자신의 방의 인테리어(?)를 추가하기 위한 재료 찾기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사람을 많이 죽인 업보인가.’

지나치게 개성 넘치는 부하들을 보며 지크는 때아닌 자신의 죄를 마주 보는 시간을 가졌다.

* * *

‘그게 이블린 루즈였는데….’

지크는 눈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이블린을 쳐다봤다.

그녀의 모습은 미래와 너무 달랐다.

물론 겉모습은 비슷하다. 여전히 청초한 얼굴에 보기 드문 미모를 지닌 여인이다.

아니, 회귀 전과는 달리 젊음이라는 압도적인 이점으로 인해 그 미모는 더욱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서큐버스 특유의 요사스러운 분위기와 야릇한 눈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지크에게는 너무나 어색했다.

“두 분은 여행 중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공녀님.”

이미 그녀에게서 물에 빠졌을 때의 꾀죄죄한 모습은 없었다. 그저 머리카락이 조금 덜 마른 정도. 물기는 다 닦아냈고 옷도 새로 갈아입었다.

지크와 라일라 그리고 이블린은 같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장소는 호숫가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

호수에 빠진 이블린이 호수 옆에 머무르기를 싫어해 조금 더 안쪽으로 야영지를 옮기길 요구한 것이다.

하인들과 하녀들 그리고 기사들까지 합세해 야영지는 눈 깜짝할 새에 숲 안으로 옮겨졌다.

야영지를 새로 옮긴 후, 이블린은 지크와 라일라를 초대했다. 자신을 구해준 자들을 대접하기 위함이었다.

이블린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지크는 힐끔 기사 무리를 쳐다봤다.

잠시 보이지 않던 기사 한 명이 돌아와 리키에게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흔적을 조사했군.’

일단 지크에게 고마움은 표했지만 그렇다고 지크 일행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 순 없는 법. 저 정도 조사는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블린의 뒤에는 두 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이블린이 불편한 듯 보였지만 필요성은 아는 듯 뭐라 그러진 않았다.

하지만 지크도 만만한 자가 아니다.

‘조사해 봤자지.’

이미 흔적 위장은 충분히 해놓은 상태다.

둘이서 천천히 이동한 흔적을 어느 정도 선까지 쭉 남겨놨고, 이블린이 위기에 빠지길 기다리며 대기하느라 조금 더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던 덤불도 호숫가로 뛰어들기 전 추진력을 얻을 겸 발을 크게 굴러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다.

그 때문에 옆에 있던 라일라의 몰골이 조금 엉망이 됐고, 호수에서 나온 지크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어쨌든 흔적을 지운다는 목적은 달성했다.

‘정말로 전문가가 조사를 한다면 또 모르지만 이런 소규모 집단에 흔적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스킬을 가진 인간이 끼어 있을 리가.’

후일 다시 조사대를 보낸다 해도 그때는 시간이란 절대 마법이 그 흔적을 덮어줄 것이다. 여러모로 긴장 탈 건 없었다.

역시 지크의 작은 음모를 알아내진 못한 듯 보고를 받은 리키는 기사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고 다시 본래의 임무로 돌아갔다.

“국왕 전하의 탄생제를 한다고 해서 관광차 왔습니다. 아직 탄생제까지 시일이 남아 수도 근처에 있는 호수에 놀러 갔습니다만, 설마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수도에 올라올 때마다 놀러 갔던 곳인데 설마 거기에 몬스터가 똬리를 틀고 있었을 줄은….”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이블린은 고개를 저었다.

“안 좋은 이야기는 잊도록 하죠.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가문에만 있다 보니 세상을 여행하는 분들의 이야기엔 흥미가 많답니다.”

“공녀님이 만족하실만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번 이야기해 보죠.”

그리고 지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회귀 전의 경험이 경험인지라 지크는 무척이나 이야기를 흥미 있게 잘 풀어갔다.

라일라도 생각나는 미래의 지식을 사용해 이야기를 거들었다.

이블린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자세에서 이미 온실 속 화초라는 이미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말을 하던 지크가 목이 말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차와 같이 나온 쿠키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

마침 다과로 손을 뻗던 이블린과 살짝 손이 스쳤다.

그녀가 움찔하며 슬그머니 손을 뺐다. 그녀의 볼이 조금 상기되었다.

정말로 남자에 대해 면역이 없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며 지크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악몽이군.’

입안에 넣은 쿠키의 맛을 전혀 모르겠다.

살짝 옆을 보니 미소를 짓고 있는 라일라의 얼굴 근육도 묘하게 굳어 있었다.

‘하긴, 저 녀석도 미래의 이블린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직접 보고 겪은 지크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어떤 사이신가요?”

이블린이 급히 말을 돌렸다.

“여행 동료라고 해도 이런 숲 깊은 곳에 함께 놀러 올 정도면 뭔가 좀 더 깊은 사이가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고 있다.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소녀 그 자체의 모습이다.

“그냥 동료일 뿐이에요.”

라일라가 딱 잡아 선을 그었다.

이블린은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지크의 말이 그녀의 기대감을 충족시켰다.

“아직은 말이죠.”

라일라가 지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크는 라일라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뻔뻔하게 앞만 바라봤다.

“…어머.”

둘 사이에 보이는 미묘한 분위기를 이블린이 흥미진진하게 쳐다봤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도 되겠습니까, 공녀님?”

“아, 물론이죠.”

그녀가 웃으며 물러났다. 그리고 지크를 향해 작게 두 주먹을 쥐고 가볍게 응원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사랑이란 좋은 거죠. 저도 약혼자가 있답니다.”

“호오, 공녀님이 약혼녀라니.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한 행운을 잡으신 분인 건 확실하군요.”

“과찬이세요.”

다시 한번 이블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기분은 좋은 듯했다.

“저에겐 과분한 분이에요. 정략혼이라 처음엔 어색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만나 사랑을 키워갔죠. 소설 같은 데서 본, 만나는 순간 확 불타오르는 사랑에 동경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저처럼 조금씩 조금씩 데워가는 사랑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며 이블린은 쑥스럽게 웃었다. 지크도 마주 웃어줬다. 그리고 생각했다.

‘대체 누구냐고, 너. 괴리감이 장난 아니잖아!’

요하임의 혈액 공포증이야 주변에 피가 없으면 티가 나지 않기에 그렇게 계속 괴리감을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이블린은 대사 하나하나가 사랑에 관심 있는 소녀라 괴리감이 계속해서 피어났다.

‘솔직히 이 녀석, 벨리 와이그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무서워.’

그건 새로운 공포였다.

* * *

지크와 라일라는 이블린이 내어준 저녁까지 먹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들은 이블린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 천막을 쳤다.

천막은 상당히 커다랬다. 마법 상자라는 편리한 아이템 덕에 충분히 부피가 큰 천막을 들고 다닐 수 있었고, 지크의 뛰어난 육체 능력은 그 천막을 혼자서도 쉽게 펼 수 있게 해 줬다.

넓은 침상에 누운 채 지크는 천장을 바라봤다.

‘이거 괜찮네.’

피크닉을 온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준비한 것들이다. 원래 지크 일행은 돌아다닐 때 그저 모닥불 하나를 펴 놓고 주변에 모포만 깐 채 잠을 잤다.

하지만 직접 이렇게 천막을 펴고 침상에서 잠을 자니 확실히 편했다.

그러나 지크는 이 편한 천막생활을 여행에서 쓸 생각이 없었다.

‘한스나 스녹이나 너무 편하게 두면 해이해지기 마련이니까.’

두 사람이 들었다면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울부짖을 소리였지만 이미 지크의 안에서는 자기결론이 나온 상태였다.

그들의, 조금은 편안해진 여행 생활은 적어도 당분간은 오지 않을 전망이었다.

“들어와.”

지크가 천막 밖을 향해 말했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은 듯 바깥에 있던 라일라가 태연하게 지크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근처에 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 지크가 누워 있는 침상 곁에 앉았다.

“앞으론 어쩔 거야?”

“정보를 모아야지.”

지크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어떻게?”

“네가 노력해야 해. 그 때문에 널 데려온 거니까.”

자신들의 말을 엿듣는 기척은 없다. 그러나 혹시 몰라 지크는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마력으로 막을 펼쳤다.

“정말 여러 재주가 다 있네.”

“전직 마왕이니까.”

지크는 몸을 돌려 다리를 침대의 밖으로 빼 늘어뜨렸다. 라일라와 마주 봤다.

“아마 이블린은 너한테 관심을 나타낼 거야. 아마 귀갓길에 너와 나, 적어도 너는 부르지 않을까 싶어. 내가 너와의 사이에 뭔가 있다는 뉘앙스를 뿌려 놨으니, 척 봐도 사랑 이야기에 환장한 그 녀석이 관심을 안 낼 리가 없지.”

“아, 그래서….”

지크가 하는 일이니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그게 후속 접촉을 위한 일이었을 줄은 몰랐다.

“그런 일이라면 오히려 너를 부르는 게 더 효과….”

라일라는 말을 멈췄다. 남자를 어려워하는 이블린의 성격이 생각난 것이다.

“지금 네가 생각한 대로 녀석의 성격을 감안하면 네가 있는데 굳이 날 부르진 않겠지. 설령 나를 부르더라도 깊이 있는 이야기는 무리일 테고. 이야, 널 데려와서 정말 다행이야.”

지크가 너스레를 떨었다.

“녀석의 대화에 적당히 어울려줘. 그리고 요새 뭔가 이상한 일이 있는지 슬쩍 떠보고.”

“…사랑 얘기는 별로 자신 없는데.”

“굳이 뭘 할 필요는 없어. 이미 저 녀석은 내가 널 좋아하는데 너는 무덤덤한, 그런 상황을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녀석이 뭐라고 하든 너는 어색하게 대답하면 돼. 그건 쉽잖아. 어차피 이블린이 그런 질문을 하면 넌 실제로 어색할 테니까. 굳이 연기를 할 필요도 없어.”

“…좋아. 한번 해볼게.”

그렇게 그들의 음모는 무르익어 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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