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지크 일행이 호수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지크와 라일라는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보냈다.
깊은 숲속에서 보내는 생활은 불편이 강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라일라는 스스로에게 열받게도 요근래에 숲속에서 지내는 일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지크가 마법 상자에 챙겨 온 물자들은 나름 숲속에서도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호수 자체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때문에 라일라는 불편한 생활에 군말 없이 따랐다.
오늘도 그녀는 호숫가에 발을 담그고 물장구를 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호수 주변을 돌면서 혹시나 계획에 필요해질까 싶어 지형 파악을 하고 있던 지크가 그녀를 바라봤다.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 삼아 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로 그림이었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감정보다는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아무래도 과거의 기억이 없는 영향이 클 것이다.
‘생각해보면 묘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만을 가지고 살아간다. 미래의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반대로 미래의 기억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건 대체 무슨 기분일까.
“지크!”
라일라가 호수에 들어간 채 지크에게 크게 손을 흔들었다.
“너도 들어와!”
“나는 주변을 더 체크해야 해!”
솔직히 대략적인 체크는 끝났다. 하지만 지크는 라일라와 놀 생각이 없었다.
‘노는 것도 애 같았지.’
처음 하루 이틀은 지크도 라일라와 놀아줬지만 그 끝없는 흥미와 호기심에 지크도 두 손을 들었다.
라일라로서는 무엇이든 지식을 경험으로 전환하는 훌륭하고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크는 웬만한 건 이미 회귀 전에 경험해 본 것들.
마치 아이와 놀아주다 지쳐 떨어진 아빠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체력은 지크가 라일라보다 월등한데 이상하게 지크가 먼저 진이 빠졌다.
‘정신적인 문제겠지.’
라일라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짜증을 잊은 듯 다시 물놀이에 집중했다.
지크는 다시 호숫가를 거닐며 겸사겸사 오늘 먹을 사냥감도 찾기 시작했다.
지크의 고개가 움직였다. 널리 퍼뜨린 기감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왔군.’
지크의 눈이 번뜩였다.
* * *
한 무리의 사람들이 호숫가에 도착했다. 총 열두 명. 남성이 아홉, 여성이 셋이다.
남성 아홉은 전부 날카로운 검을 차고 있었다. 무거운 기세로 주변을 살펴보는 게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인다.
숲속을 걷느라 모두 가벼운 경장 차림이었지만 기사가 분명했다. 다른 남성 셋은 차림새가 단출한 것이 하인으로 보였다.
여성 중 둘은 하녀였다. 그녀들은 다른 한 여성의 곁에서 그녀가 거친 숲길에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부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부축을 받는 여성.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적갈색의 머리가 숲속 향을 머금은 공기에 살랑거렸다. 갈색 눈동자는 푸른 수해를 담았다.
간편한 옷차림을 했지만 옷의 질 자체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그녀가 바로 이블린 루즈. 지크와 라일라가 기다린, 현 루즈 후작가의 영애이자 후에 지크의 측근이 되는 자였다.
무리는 도착하자마자 야영 준비를 했다. 하인들과 하녀들이 지크가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마법 상자에서 짐들을 꺼내 야영지를 만든다.
기사들은 주변 나무들을 베어냈다. 천막을 세우고 주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 사이 이블린은 호숫가에 들어갔다. 신발을 벗어 호수에 발을 담그고 웃는다. 주변의 하녀들이 그녀와 장난치며 웃었다.
그 모습을, 호숫가 건너 풀숲에 숨어 수상하게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지크와 라일라였다.
“좋아, 이블린이 맞아.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야.”
지크는 흡족해했다.
“이제 이블린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해주기만 하면 돼.”
“…저 녀석이 위험에 빠진다면 누가 봐도 우리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자신의 처지가 어처구니없는지 라일라가 한탄했다.
놀러 나온 귀족가의 자제를 습격하기 위해 숨어있는 도적이라고 여겨져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에게만 당당하면 되는 거야.”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악당의 자기합리화로밖에 안 들려.”
“그런 의도로 말한 거야. 설령 나쁜 짓을 하더라도 자기에게 떳떳하게 해야지.”
“…….”
라일라는 지크의 말을 무시했다.
여기서 더 대화를 했다가는 그녀의 머리에 두통이 생기는 결과로 끝날 게 뻔했다.
“이제 기다리면 돼.”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는 거지?”
“한 반나절 정도는 기다릴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불필요할 거야. 녀석도 호수에 도착한 날에 바로 그 사건을 겪었다고 했으니까.”
둘은 수풀 속에 앉아 기다렸다. 두 집단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멀어 이블린 일행은 지크와 라일라를 알아채지 못했다.
한참을 물장구를 치던 이블린은 잠시 뭍으로 나와 하인과 하녀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었다.
그때 기사들이 무언가를 호숫가로 끌어냈다.
‘곧이다!’
지크가 눈을 빛냈다. 옆에 있던 라일라를 툭툭 쳤다. 그녀는 기다림이 지루했는지 지크의 어깨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으, 응?”
일어난 그녀가 상황파악을 못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눈이 몽롱했다.
“일어나. 곧 움직여야 할 거야.”
“아, 그래?”
라일라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다시 눈에 시각 강화 마법을 걸고 호수 건너편을 응시했다.
기사들이 호숫가로 끌고 온 건 양옆에 노가 달린 작은 보트였다. 식사를 마친 이블린이 보트에 타는 게 보였다.
하녀 둘과 기사 둘이 같이 탔다. 노는 기사가 잡았다.
보트는 천천히 출항했다. 하녀 한 명이 양산을 펴 햇볕을 막았다.
“부럽다.”
“너도 나중에 해.”
둘이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와중 보트는 호수의 중앙까지 도착했다. 거기서 보트는 천천히 중앙을 돌았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지크는 보트 아래 수면을 응시했다. 파랗기만 하던 수면 아래 뭔가 거뭇한 것이 보인다.
기다리던 것이다. 지크가 라일라에게 신호를 보내고 자세를 낮췄다.
그 순간, 호수가 거칠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너울은 보트 근처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 *
국왕의 50번째 생일을 맞아 수도로 올라온 이블린은 수도에 오면 언제나 그러듯 오늘도 수도 근처에 있는 호수로 여행을 떠났다.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호수는 여전히 파란 하늘을 반사하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을 활짝 여는 것 같은 해방감. 호숫물에 발을 담가 물놀이를 하고, 호숫가에서 간단한 식사를 즐긴 후 보트를 타고 호수 중앙에서 주변 경치를 감상한다.
그녀가 이곳에 오면 언제나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여느 때와 달랐다.
“공녀님! 꽉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안 됩니다!”
호수의 물이 미친 듯이 출렁이고 기사들은 배 위에서 검을 든 채로 수면을 노려본다.
하녀들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한 손으로는 뱃전을 단단히 붙들고 다른 손으로는 이블린을 꼭 잡았다.
얼핏 본 출렁이는 호수 안으로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호수 아래에 뭔가 있었다.
퍼엉!
기사 한 명이 호수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소름끼치는 괴성이 울린다. 보트가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콰앙!
보트가 두 동강 났다. 흩어지는 보트의 잔해 사이로 커다란 지느러미가 호수 속으로 숨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보트의 작은 파편들과 함께 이블린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기사와 하녀들 모두 호수에 빠져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단단한 지면이 아니었기에 기사들도 날아가는 이블린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호수의 괴물이 그들을 아직도 노리고 있었다.
첨벙!
이블린이 다시 호수에 빠졌다. 얼마나 날아왔는지는 모른다.
물이라고 해도 상당히 높은 곳에서 떨어졌기에 온몸이 아팠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수영을 하지 못했다.
막무가내로 몸부림을 쳤다. 팔과 다리를 아무렇게나 움직여 허우적댔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물은 더욱 그녀를 끌어당겼다.
언제나 그녀에게 상쾌함과 해방감을 주던 호수가 이제는 무거운 족쇄가 되어 있었다.
점점 숨이 막혀 이대로 죽는 건가 생각할 때였다.
“푸핫!”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뭔가가 그녀를 받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도 안 하고 무조건 그녀는 그것을 타 넘으려 했다.
그걸 타 넘지 않으면 익사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점점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녀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블린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 부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낯선 남자가 자신을 보고 물었다.
* * *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습격. 하지만 기적적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다.
몬스터는 기사들이 처치했고 하녀들은 이블린과 달리 멀리 날아가지 않아 보트의 파편을 잡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멀리 튕겨 나간 이블린도 구해졌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않은 채 이 무리의 리더인 기사 브피오 리키는 지크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블린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있었다. 하녀들이 수건을 들고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닦아내며 부산을 떨어댔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같은 행동을 할 겁니다. 그리고 상황을 보면 기사님들도 저분을 충분히 구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지크가 겸양을 떨었다.
실제로 뭍의 기사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이블린이 떨어진 곳으로 쏜살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블린을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지크가 알기로도 그렇게 구해졌다.
“어떤 상황이든 간에 은인께서 공녀님을 도와주셨다는 건 변치 않습니다.”
“그건 맞아요.”
리키의 뒤에 어느새 이블린이 다가와 있었다.
“공녀님! 지금은 쉬셔야 합니다!”
“괜찮아요. 조금 놀란 것뿐이잖아요. 몸에 상처도 없고요. 지금은 은인께 감사를 드리는 게 먼저예요.”
그리고 그녀는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몸 이곳저곳이 젖고 옷차림은 엉망이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무척 고귀해 보였다.
“루즈 후작가의 이블린 루즈가 은인 분께 인사드립니다.”
그녀는 다시 허리를 폈다. 그리고 조금 눈치를 보다 어색하게 말했다.
“저, 그리고, 제가 남성분과 말을 많이 나눠보지 못해서요. 그, 제가 조금 어색해한다 해도 이해해주세요.”
‘그래, 어쩌면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전례가 있어서 처음만큼 경악하진 않았다.
지크는 웃는 낯으로 이블린을 바라봤다. 하지만 마음속 상황은 웃음과 거리가 멀었다.
아마 옆에서 지크와 같이 거짓 미소를 짓고 있을 라일라도 마찬가지 마음일 것이다.
그녀도 기억 속으로 이블린의 미래 모습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지크를 보고 부끄러운 듯 눈을 이리저리 피하는 이블린 루즈.
회귀 전 지크의 부하일 적에 그녀의 능력은 환각과 매혹.
이명은 서큐버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