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지크 일행은 웨스틸버드란 이름의 도시에 도착했다. 크로뇽 왕국의 수도인 곳으로 척 보기에도 상당한 번영을 누리고 있는 도시였다.
지금껏 여러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녀 본 그들이었지만 일국의 수도에 와 보는 건 처음이다.
수도. 그 명칭만으로 도시의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늘어서 있는 건물들과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 길가에 피어 있는 풀이나 어느 집 앞마당에 심어져 있는 나무까지 모두 다른 곳에 있는 것들보다 한층 더 세련된 것 같았다.
한스와 스녹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지크는 자신의 한심한 두 종을 힐끔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반대쪽을 보았다. 라일라가 한스, 스녹과 똑같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크는 고개를 내저었다.
한 나라의 중심인 만큼 수도가 활기찬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웨스틸버드의 분위기는 그걸 감안해도 더 상기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기대감이 형태를 띠어 공기 속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것 보세요!”
스녹이 벽에 붙어 있는 벽보를 보고 말했다.
지크와 한스 그리고 요새는 종종 라일라에게도 읽고 쓰기를 배운 스녹은 이제 더듬더듬이긴 하지만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곧 있으면 이 나라 임금님의 생일이래요! 그것도 딱 50번 째 생일이요!”
“그래서 이렇게 분위기가 떠 있었구나.”
한스가 스녹의 옆에 서서 같이 벽보를 들여다봤다.
“그럼 축제를 하겠네? 얼마나 남았어?”
라일라도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50일 정도 남았네요!”
“아직 많이 남았네.”
세 쌍의 눈이 지크를 쳐다본다.
지금 이 여행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지크다. 남은 기간이 며칠 정도라면 어떻게든 지크에게 부탁을 해보겠지만 50일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좋아.”
하지만 그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지크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숙소부터 잡을까?”
* * *
숙소를 잡은 지크는 자기 방으로 라일라를 불렀다.
“뭐야?”
“우리가 동행하는 조건은 기억하지?”
“물론이지.”
라일라가 이를 한번 바득 갈고 지크를 노려봤다.
그녀의 실력 향상이라는 명분하에 지크는 그녀를 정말 사정없이 몰아쳤다.
예전에는 어느 정도 맞상대가 가능한 둘이었지만, 비올루윈에서 한번 모든 마력이 개방된 후 지크의 가용마력은 한 단계 더 올라간 상태였다.
게다가 그의 손엔 윈두르가 있었다. 에스텔레이드, 토르니움보다도 더 주인에게 강한 힘을 주는 검.
당연히 라일라는 지크에게 압도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지크는 엄격했다. 그리고 잔인했다. 한스와 스녹조차도 그렇게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몰리지 않았다.
지크의 훈련에 익숙해진 그들도 새하얀 안색으로 고개를 돌릴 정도로 그 대련은 처절했다.
“덕분에 전투에는 아주 익숙해졌어.”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정당한 거래였으니까.”
그녀가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이제 됐어. 너한테 빈정거림이 통할 리도 없고. 네 조건에 대해 말하는 거지?”
“맞아.”
지크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내 부하 중 한 명. 이블린 루즈를 만나보려고 해.”
지크의 네 부하 중 한 명,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
“흐음, 미래의 네 부하 중 한 명이라. 그런데 굳이 찾아볼 필요가 있어? 지금 너랑은 관련 없는 사람이잖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녀의 말투에는 조금 날이 서있었다.
지크가 토르니움을 드는 걸 질색했을 정도로 그가 ‘힘의 마왕 지크 모어’와 관련되는 걸 싫어하는 라일라이다.
그런 만큼 이블린과 만나는 것에 관해서도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지 못 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용건이 있는 건 이블린 쪽보다는 이블린을 타락시키려는 놈들 쪽이긴 해.”
“응?”
“녀석들에 대해서 모르는 모양이군.”
꿈으로 보지 못한 정보든, 아니면 생각나지 않은 기억이든 그녀는 마인을 만드는 자들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지크는 그에 대해 설명해줬다.
“…그런 놈들이 있었다고?”
“그리고 아마도 그놈들은 너를 쫓는 놈들과 같은 놈들일 가능성이 높아.”
라일라의 안색이 굳었다. 그들에게 절대 잡히지 말아야 한다고, 사라진 기억 속에서도 강박적으로 박혀 있는 기억이 그녀를 억눌렀다.
“내가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내 부하 녀석들이 마인화해서 착하게 사는 나랑 충돌할 가능성을 만들고 싶지도 않고. 그 로브 쓴 놈들에게는 이래저래 빚이 있으니까.”
“…네 부하들이 언제 타락할지 전부 알고 있는 거야?”
“몰라. 요하임 녀석도 내가 운 좋게 시기를 맞춘 것에 불과하고. 그때는 로브 쓴 놈들이 뒤에 있는지도 몰랐지. 하지만 이블린은 달라. 녀석이 마인의 첫 발자국을 내딛은 시기는 기억하고 있어.”
“언젠데?”
“크로뇽 왕의 50번째 생일.”
“…딱 지금 시기네.”
“그래. 시기를 정말 잘 맞췄어.”
라일라는 왜 지크가 이 도시에 머물자는 의견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도 이 도시에 머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사천왕님은 지금 어디 계신데?”
“바로 만나러 갈 순 없어. 그 녀석도 상당히 지체 높은 가문의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요하임 드라큘도 귀족 집안 도련님이었잖아? 이젠 백작님이라고 했지. 마왕의 측근쯤 되면 고귀한 신분이 필요한 거야?”
“우연이야. 실제로 나머지 두 놈은 그렇게 좋은 집안의 놈들이 아니니까.”
“뭐, 됐어. 그럼 어떻게 할 거야? 귀한 집안 사람이면 만나기도 힘들 텐데.”
“거기서 네 협력이 필요하단 거야. 우연을 가장해서 접촉할 건데, 아무래도 여자인 너도 있는 편이 경계를 덜 받을 테니까.”
“…뭔가 범죄의 냄새가 나는데?”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잖아. 어떻게 보면 그 녀석을 지키는 일이 될 테고.”
“좋아. 알았어. 거래를 했으니 나도 깔끔하게 지키겠어.”
“바로 그거야.”
지크는 바로 자신의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음모 같지 않은 음모가 차츰차츰 무르익었다.
* * *
웨스틸버드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지크는 다른 도시에서 머물 때와는 다르게 한스와 스녹을 놀리지 않았다.
휴가라고 주기엔 50일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게다가 50일이 지나자마자 이 도시를 떠날 거라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다.
둘은 지크의 고된 훈련을 받았다. 평소보다도 더 힘들었다.
평소엔 그래도 이동할 체력 정도는 남겨둬야 하지만 여기선 정말로 힘 한 점 남지 않을 때까지 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몇 번이나 이 도시에 머무르자고 말한 자신들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저 국왕의 50번 째 탄생제만을 마지막 희망 삼아 구르고 또 구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지크가 매일 굴리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지크가 항상 그들에게 붙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잠시 나갔다 온다.”
지크가 한스와 스녹에게 말했다. 그의 옆에는 라일라가 같이 서있었다.
“아마 며칠 걸릴 거다. 그 때까지는 자유시간이니까 알아서 놀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정말로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해방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둘은 소리쳤다.
쿠우우우!
뒤로 울리는 노웸의 외침이 정점이었다.
지크는 조금 기분이 나빴다. 자기가 없는 동안에도 이 녀석들을 굴려볼까 고민에 빠졌다.
이미 지크의 더러운 성격을 겪어본 둘이다. 지크의 눈초리가 이상해지자 그들은 바로 정색하고 몸을 바로 했다.
노웸마저 스녹의 어깨 위에서 두 다리로 똑바로 일어서 앞다리를 몸에 바짝 붙였다. 두더지의 진지한 얼굴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빨리 움직여. 괜히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라일라가 지크를 뒤로 끌었다.
한스와 스녹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지크의 입에서 무슨 명령이 튀어나온다면 그들은 즉각 그 명령을 실행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지크의 입에서 명령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라일라에 끌려 밖으로 나갔다.
‘천사다!’
‘천사야!’
‘쿠우~!’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곱다.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라일라에게 셋은 진심으로 감사의 시선을 보냈다.
* * *
지크와 라일라는 웨스틸버드를 나왔다.
한가롭게 길을 걸으며 담소를 나누는 그 모습은 피크닉을 가는 어느 한가로운 연인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연인간의 달콤한 속삭임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블린 루즈. 루즈 후작가의 영애라….”
라일라가 그들이 찾아가는 자의 이름을 되뇌었다.
“요하임 드라큘보다 한 단계 더 윗줄이네.”
“요하임 녀석은 이제 백작이니 그저 후작가의 자식인 이블린보다는 훨씬 더 신분이 높지.”
“둘 다 충분히 높아.”
라일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같은 뜨내기들이 함부로 접근할 만한 신분이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설명한 대로 계획적 접근을 해야지. 다행히 이 시기의 녀석의 행적은 어느 정도 아니까.”
“미래의 너랑 측근들은 상당히 사이가 좋았나 보네? 그런 걸 이야기하는 미래를 볼 정도라면 말이야.”
“전혀 아니야.”
지크는 단언했다.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과거를 전부 털어놓은 녀석은 없었어. 요하임 때는 정말 멀찌감치서 얼굴만 보러 간 거야. 어떻게 사나 보면 좋고, 아니면 주변 소문만 들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려든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고. 그저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을 뿐, 녀석은 그다지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어.”
“그럼 이블린 루즈는?”
“녀석은 우리 중에서도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어서 말이야. 술자리에서 종종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지. 그렇다고 해도 녀석도 전부 말한 것도 아니야. 고작해야 몇 가지를 말하고 또 말한 정도지.”
“그중 하나가 이번 계획의 토대가 됐단 거지?”
“그렇지.”
둘은 도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마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걸 방지하기 위해 가도 바깥으로 나와 숲속을 주파했다.
“이젠 제법 숲속에서도 속도가 나는데?”
“입 다물어. 말 걸지 마.”
지크의 산속 주파 버릇으로 인해 터득한 기술이 라일라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크는 아랑곳 않고 낄낄 웃어댔다.
그렇게 둘은 반나절 정도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머!”
목적지를 보는 순간 라일라는 크게 눈을 떴다.
그들이 도착한 목적지는 커다란 호수였다. 옅게 일어난 물안개 저 너머로 반대편 기슭이 흐릿하게 보인다.
맑은 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볕에 물들어 파랗게 빛났고 점점이 뛰노는 물고기들이 운치를 더해줬다.
울창한 숲 안에서 갑자기 나타난 호수의 모습은 마치 요정들의 숨겨진 쉼터 같았다.
“의외로 쉽게 찾았네. 며칠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여기가 거기 맞아?”
라일라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온다. 호수의 모습에 완전히 반해버린 모습이었다.
“맞아. 이 근처에서 이만한 호수는 없으니까. 여기가 바로 이블린 루즈가 어린 시절부터 놀았다던, 어떻게 보면 아이의 비밀 장소 같은 곳이지.”
“그렇구나.”
그녀가 넋을 놓고 호수를 바라봤다.
지크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지크도 눈앞의 너른 호수를 보면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물론 개미 눈곱만큼이었지만.
“이블린 루즈는 언제쯤 올까?”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지만 며칠 더 있어야 올걸. 그 녀석 말로는 국왕 생일이 한 30일쯤 남았을 때 출발했다고 했으니까.”
“그럼 며칠 동안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렇지.”
라일라가 호수를 한 번 보고 지크를 한 번 본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 저기서 놀아도….”
“좋을 대로 해.”
“우와!”
그녀가 어린아이같이 환호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