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지크가 눈을 떴다. 저녁 내내 불타며 그들을 지켜본 모닥불이 하안 연기를 뿜어내며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눈을 한 번 비비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일어났나.”
묵직한 저음이 들렸다. 커다란 덩치를 상상하게 만드는,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자상함이 묻어나는 음성.
“네.”
지크가 대답하며 저음의 주인을 바라봤다.
베어낸 커다란 통나무를 의자 대신 쓰고 있는 거한이 모닥불을 뒤적이고 있었다.
“정신 차렸으면 다른 녀석들 좀 깨워줘.”
“스스로 깨우면 되잖아요.”
거한은 몸을 움츠렸다.
“그게 좀….”
“아직도 대하기 어려운 거예요? 동료잖아요.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거한은 쓴웃음을 지을 뿐,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지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당장 뒷골목에 들어가더라도 덩치와 인상만으로 깡패들의 두목이 될 수 있는 사람인데 동료들이 어려워 쭈뼛대고 있다.
그렇다고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게 소형 몬스터든 중형 몬스터든 대형 몬스터든 초대형 몬스터든, 도끼 하나로 대가리를 시원하게 까버리는 사람이 저 거한이다.
‘뭔가 이벤트 같은 걸 준비해야 하나.’
동료들의 친분을 쌓기 위한 계획을 생각하며 지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성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아이네.”
“음….”
아이네라 불린 여성이 눈을 떴다. 모포를 걷고 일어나 크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잘 잤나요, 지크?”
“그래. 아이네도 잘 잤어?”
“네. 기운이 나요. 이것도 카르나 님의 은총이네요.”
“잘됐네. 그럼 저 녀석을 좀 깨워 주겠어? 난 다른 사람을 깨울 테니까 말이야.”
“알겠어요. 아침 기도만 올리고 바로 깨울게요.”
그녀는 모포 위에서 무릎을 꿇고 깍지를 끼고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녀를 뒤로 하고 지크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동료에게 다가갔다.
아이네는 이 개성 넘치는 파티 중에서도 조용한 편에 속해 얌전하게 일어났지만, 지금 깨우러 가는 사람은 각오가 조금 필요했다.
“아침이에요. 일어나요.”
지크가 동료를 흔들어 깨운다. 그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퀭한 눈이 그가 무척 피로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벌써 아침인가?”
“네. 보세요. 해가 떴어요.”
그는 지크가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산등성이 너머가 상당히 밝았지만 해가 떴다고 주장하기엔 그의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강렬함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직 안 뜨지 않았나. 뜨면 말하게. 그때 일어남세.”
“안 돼요! 맨날 그러셔 놓고 일어나긴커녕 계속 잠만 주무셨잖아요! 게다가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움직여야 하는 날이에요!”
그렇게 둘은 잠시 아웅다웅했다. 그러는 동안 산등성이 너머는 점점 더 밝아졌다.
“알았네, 알았어. 내 일어나지.”
결국 지크에게 진 그가 일어났다.
그는 노인이었다. 하얀 수염을 배까지 기른 그는 겉보기로는 근엄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지크와 한 다툼과 숨기지 못 한 눈가의 장난기가 노인이 겉보기와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단 걸 알리고 있었다.
“이제야 일어난 거야? 나이 먹고 칠칠치 못하기는.”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지크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뾰족한 귀가 인상적인 여인이 그녀의 모포 위에 앉아 노인을 보고 있었다. 웬만하면 인간들이 있는 곳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엘프였다.
“나이를 먹으니까 그런 게야. 젊은 놈들이랑은 회복력 자체가 다르니까. 내가 푹 쉬었어 봐라. 원래 늙은이들은 잠이 없으니 다른 놈들 다 깨기 전에 내가 먼저 깼을 게야!
“그래그래. 나보다 한참 연하인 마법사씨.”
“하여간 엘프라는 것들은…! 너도 뭐라 한 마디 해봐라!”
둘의 다툼이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모닥불을 다시 키우고 있던 거한에게 튀었다.
“네? 아니 전….”
“별말 안 해도 된다! 그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에게 늙은이를 공경하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돼!”
“그러니까 너는 나보다 연하라니까!”
“종족의 수명이 다른데 그걸 어찌 절대적으로만 생각한단 말이냐! 이건 당연히 종족 특성을 생각해 수명에 비해 자기가 얼마나 살아왔는지를 상대적으로 따져야지!”
“그건 네 생각이고!”
괴팍한 마법사 노인과 까칠한 엘프 소녀의 말다툼이 오늘도 아침을 울린다. 이미 둘 다 거한은 뇌리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도와드릴게요.”
“아, 고마워.”
싸움에 휘말려들었다가 이제는 무시당한 채 멍 때리고 있던 거한에게, 엘프를 깨운 아이네가 다가왔다.
지크는 계속해서 투닥거리는 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박수를 쳐 주의를 끌었다.
“자, 둘 다 잠은 전부 깬 것 같으니 아침 먹고 떠날 채비하세요.”
아직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리는 둘이었지만 순순히 지크의 말을 따라 각자의 역할을 하러 흩어졌다.
“매일 고생이네요. 오늘 아침도 수고했어요.”
아침식사로 쓸 재료를 들고 아이네가 지크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젠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아. 이런 건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네가 소리죽여 웃었다.
“그래도 힘내요. 당신은 분명 이 개성 강한 파티를 잘 이끌고 있으니까요. 그건 제가 보장할 게요.”
“천하의 카르위먼 성녀, 아이네 프리멜 루벨라의 보장이라니. 이거 없던 자신감도 생길 것 같은데.”
“제 보장으로 자신감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해드리죠, 용사님.”
아이네가 웃으며 말했다.
* * *
벌떡!
지크는 잠에서 깼다. 잠이 덜 깬 듯 잠시 멍하니 전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휙휙 돌려가며 주변을 살폈다.
“일어나셨습니까.”
마지막 불침번인 한스가 지크가 깬 것을 발견하고 인사를 해온다.
지크는 한스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자기가 지크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 있을까 한스가 지크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지크는 지금 한스의 기분을 생각해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들은 어떤 산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모닥불의 기세가 많이 수그러들어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것과 저 멀리 산등성이 너머로 태양빛이 스멀스멀 새어나오고 있는 건 방금 꾼 꿈과 같았다.
그러나 지크의 눈치를 보고 있는 한스와 노웸을 꼭 안고 자고 있는 스녹, 모포를 머리끝까지 올리고 자고 있는 라일라는 달랐다.
거친 외모와 그에 대비되는 섬세한 내면의 거한도 까탈스러운 엘프 소녀도 괴팍한 노인도 성녀도 없는, 어제까지의 일행들.
‘용사님.’
루벨라가 자신을 보며 말한 그 호칭이 생각나 지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침부터 뭔 개꿈을….’
이게 다 라일라가 브레이브 어쩌고 했기 때문에 꾼 꿈이다. 지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젠장, 등허리가 다 젖었잖아.’
어찌나 끔찍한 꿈이었는지 옷이 식은땀에 절어있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지크는 투덜거리며 일어섰다.
그런 지크의 등을, 그의 옆에서 조용히 누워 있던 ‘나뭇가지 같은 검’이 바라보고 있었다.
* * *
콰아앙!
화끈한 폭발음이 숲을 뒤흔든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편히 쉬고 있던 날짐승들이 일제히 날아올랐고 오랜 세월을 버텨 온 커다란 나무 몇 그루가 화염에 휩싸여 대지로 가라앉았다.
“숲에서 화염 마법을 사용하면 어떡하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크가 타박했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한 라일라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주문을 외웠다.
콰지지지직!
불길에 휩싸였던 숲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라일라가 어떠냐는 표정으로 뒤돌아본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콰앙!
또 한 번의 마법 작렬. 이번에도 숲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공터가 더 넓어졌다. 그제야 라일라는 손을 내렸다.
“이 정도면 됐지?”
“아직.”
지크가 라일라의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나뭇가지 같은 검’을 들고 허공을 크게 베었다.
서걱!
라일라의 두 번째 공격의 영향으로 불에 타고 있던 나무들이 일제히 베였다.
참격의 여파로 나무는 물론 주변에 붙어 있던 잔불도 같이 일소되었다.
안 그래도 넓던 공터가 더 넓어졌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공터의 크기에 지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검,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래.”
“‘윈두르’라고 이름 붙였다 했지?”
언제나 ‘나뭇가지 같은 검’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 지크는 검에 적당한 이름 하나를 붙였다.
윈두르. 구전으로 전해지는, 신화 속 고대 제국을 지탱했다는 나무의 이름이다.
“음, 잘 어울려.”
“그럼! 누가 지은 명칭인데.”
“하여간 그놈의 자의식 과잉은.”
라일라가 코웃음 쳤다.
그녀가 공터로 나아간다. 일부는 불에 그슬리고 일부는 얼어붙었으며 굵은 나무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공터.
여기를 치워야 한다. 초인적인 힘을 가진 그들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지금껏 계속 하자 라일라는 슬슬 짜증이 났다.
“그냥 평범한 길로 갈 순 없는 거야?”
“하나 말해 주지, 라일라.”
지크는 가슴을 쭉 내밀고 말했다.
“난 한스랑 같이 집안을 나온 후에 단 한 번도 평범한 가도를 이용한 적이 없어.”
“자랑이다!”
그녀가 불덩이를 던졌다. 하지만 위력 낮은 무영창의 마법이 지크에게 통할 리가. 대충 휘두른 주먹에 불덩이가 터져 나갔다.
“잊었나본데, 지크. 나는 네가 동행해 달래서 같이 동행해 주고 있는 거야. 알고 있어?”
“네 입장에서도 손해 볼 일은 아니었잖아. 서로간의 조건이 맞아서 동행하고 있는 걸, 마치 네가 일방적으로 선행을 하고 있다는 듯이 말을 하면 안 되지.”
“이런 산길로만 통행한단 말은 못 들었단 말이야!”
“원래 계약 때 자기가 불리해 질 일은 말하지 않는 법이지.”
또 다시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불과 바람의 이중 마법.
이중영창을 무영창으로 해버리는 그 살벌한 재능에 천하의 지크조차 속으로 혀를 내둘렀지만 그래도 지크의 방어를 깨뜨리진 못했다.
“칫, 나오기나 해!”
그녀가 공터의 중앙으로 나아가 주문을 영창한다.
그녀가 마법진이 선명하게 떠오른 두 손을 양옆으로 폈다.
퍼엉!
엄청난 위력의 바람이 불었다. 공터에 있던 쓰러진 나무들이 전부 주변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공터는 나무 밑동만 남고 휑해졌다.
지크와 라일라는 공터에 마주보고 섰다.
라일라가 손을 내밀고 지크가 검을 겨눴다.
“슬슬 마법이 몸에 익어가지?”
“대충은.”
지크와 라일라가 나눈 거래. 그중 지크가 라일라에게 제안한 조건은 그녀의 실력 향상이었다.
마법도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그녀는 그 경험과 지식, 육체의 괴리가 심했다.
물론 그 상태로도 굉장한 전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능력은 엄청났지만.
때문에 지크는 그녀의 경험과 지식을 육체와 융합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쫓기는 몸인 그녀이기에 일신의 무력이 올라갈 수 있는 그 제안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크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와 하루에 한 번 대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솔직히 너는 굉장히 빠르게 강해지고 있어. 지금은 네 판단과 육체의 딜레이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네가 칭찬을 다 하다니. 무슨 꿍꿍이야.”
“나는 상대방이 잘하는 일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타입이야.”
그건 맞는 소리였다. 한스, 스녹을 함부로 다루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지크는 그들의 실력이 올라갈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라일라로서는 상당히 의외인 일이었다.
“그래. 그랬지. 오해해서 미안해. 그리고 칭찬 고마워.”
“물론 꿍꿍이는 있었지만.”
“…이 자식이.”
정말로 성격 나쁜 놈이었다.
“장난이야. 꿍꿍이라고 할 것도 없어. 네 실력이 늘었으니, 앞으로는 수준을 올리겠다는 거야.”
“…수준을 올려?”
대체 뭘까? 갑자기 몸에 드는 이 오한은.
“내가 한스, 스녹을 훈련시키는 방법은 알고 있지?”
안다. 왜 모를까. 그 학대 수준의 훈련을. 정말로 용케 둘이 지크에게서 도망가지 않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은 이 근방에서 잘 것이니 주변의 몬스터를 싹 청소하고 오라는 지크의 명령에, 둘이 날아갈 듯 움직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 동안은 지크의 훈련이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네 육체와 경험, 지식의 괴리를 해소하는 데 집중했지만, 그건 슬슬 본 궤도에 오른 것 같으니 훈련 방식도 바꿔야지. 너는 전투 능력을 끌어 올리고 싶은 거지 마법 능력을 올리고 싶은 게 아니잖아? 마법 능력은 충분히 올리기도 했고.”
“…설마.”
그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너는 고통이나 부상 같은 걸 너무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어. 이제부터 그걸 완화해 줄게. 걱정 마. 이것도 어디까지나 너와 나의 거래에 포함되는 거니까. 나도 이걸 핑계로 더 큰 요구를 하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거절할 필요 없어.”
라일라는 지크의 웃음이 마치 악마같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