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용사?”
“그래, 용사.”
지크는 손으로 귀를 몇 번 쳤다. 손가락을 귓구멍에 넣어 후벼보기도 하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어보기도 했다.
“용사?”
“그래, 용사. 용사 맞아. 그렌 제너드가 했던 그 용사. 돌려 말하는 것도 아니고 숨은 뜻이 아닌, 단어 그대로의 용사.”
“…내가?”
손가락을 자신을 가리키는 지크의 모습은, 그답지 않게 멍청해 보였다. 하지만 라일라는 비웃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도 믿기 힘들었다.
“나도 잘 믿기진 않아. 기억이 불분명해서 대체 네가 어떻게 용사가 됐고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네가 용사가 된 미래가 있었어. 그리고 그때 네가 사용한 이름이 지크 브레이브야.”
“그렇군.”
지크는 손바닥을 짝 쳤다. 그리고 힘 있게,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브레이브라는 성은 절대로 쓰지 않겠어.”
“네 마음대로 해.”
이제와 지크의 이런 반응은 놀랍지도 않았다.
지크는 의자 등받이에 푹 몸을 실었다.
조금 전까지완 다르게 그의 모습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혹시 그때 내가 쓴 게 에스텔레이드냐?”
“아마 그랬던 걸로 기억해.”
지크는 ‘나뭇가지 같은 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원래도 마음에 든 검이었지만 지금은 이 녀석에게 사랑스러움까지 느꼈다.
지크는 한숨을 한번 쉬고 입을 열었다.
“이게 마지막 질문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마치 연인간의 애틋한 분위기 속에 과거를 추억하는 듯한 말. 그러나 그들의 첫 만남은 풋풋한 연인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분명 대판 싸웠었지?”
“네가 무척 수상했으니까.”
“미래에 마왕이 될 놈과 갑자기 만나게 된 내 입장도 생각을 해줬으면 해.”
“그때는 마왕이 아니었다만.”
“누가 봐도 지크 스틸월이 아니었어. 그렇다고 지크 브레이브는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면 남은 거라곤 모어밖에 더 있어?”
“뭐, 거기서는 서로간의 입장 차이에서 나온 오해라고 결론을 내자고.”
지크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고작 과거에 한 번 싸웠던 일 가지고 감정 세울 생각도 없었고.
“그때 네가 날 보던 눈 기억하냐?”
“미래의 마왕을 보던 눈?”
“네가 도망가기 전에 날 보던 눈 말이다.”
그제야 라일라도 생각이 난 건지 입을 막고 탄성을 냈다.
“그러고 보니 그땐 좀 다른 시선으로 봤었지.”
“적의와 아련함이 섞인 눈은 그때 처음 봤다. 적의는 이해하겠다만, 아련함은 뭐냐?”
꽤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한 상황이었기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모르겠어. 그때 갑자기 그런 기분이 들었어. 하지만 자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아.”
“또 네 흐릿한 기억과 관련이 있는 거냐?”
“아마도. 하지만 뭔가 달랐던 기분이야. 당시 일어났던 적의도 모어를 향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해. 아련함은 아예 짐작조차 가지 않고.”
“결국 이것도 미궁이군.”
지크는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자세를 삐딱하게 잡아 천장을 한번 올려다봤다.
“좋아, 묻고 싶은 건 대충 다 물었다. 대답 고마워.”
“천만에.”
그리고 지크와 라일라는 잠시 잡담을 나눴다. 근래 상당히 친해진 두 사람이라 잡담 정도는 어색하지 않게 나눌 수 있었다.
도중에 갑자기 지크가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와.”
지크가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어디서 본 상황 같다. 라일라도 방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실례합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한스가 들어 왔다. 그 뒤로 스녹이 노웸을 안고 들어 왔다.
라일라 때처럼 지크가 기척을 읽고 바로 사람들을 들인 것이다.
“무슨 일이냐?”
“저희도 도시 재건에 손을 거들어주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지크 님에게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도시를 구한 그들은 도시 자체에서 깍듯한 대접을 받는 중이었다. 그들이 묵고 있는 숙소도 도시에서 마련해 준 거였고.
하지만 한스와 스녹은 그런 대접에 감사하며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도시 재건을 돕고 싶었다.
“그건 저도 갈게요.”
라일라가 한스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지크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나도 이 도시를 떠나기 전에 착한 일을 좀 더 해볼까.”
“…네가 착한 일, 착한 일 하는 건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네.”
“남이사.”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러고 보니 라일라 님.”
한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거,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돌려 드리질 못했습니다.”
한스가 내민 건 고대 유적을 빠져나가라고 그녀가 던져줬던 반지였다.
“고마워요.”
그녀가 반지를 받았다.
“그것도 기억을 차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거냐?”
“응.”
지크와 라일라 사이에 영문 모를 이야기가 오갔지만, 한스와 스녹은 그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들이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방을 나가려던 지크의 눈에 한스가 찬 에스텔레이드가 들어왔다.
알맞은 검집을 구하지 못하여 지금은 두꺼운 천으로 칭칭 감아놓은 상태였다.
‘혹시….’
지크는 문득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박혀있던 손가락.
“한스.”
“네.”
“에스텔레이드 좀 줘봐라.”
“네?”
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일라가 놀라 말했다.
“무슨 일이야? 네가 에스텔레이드를 먼저 쥐겠다고 하고.”
“내가 저걸 든 이유가 ‘운명을 비트는 열쇠’ 때문일 수도 있어. 그걸 확인하려고.”
“운명을 비트는 열쇠라면….”
지크의 손바닥에 박혀있던, 이제는 ‘나뭇가지 같은 검’의 일부분이 된 그것이었다. 그리고 ‘나뭇가지 같은 검’은 에스텔레이드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확실히 그것 때문이라면 이해가 가.’
라일라는 아직도 지크가 에스텔레이드를 들었던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한스가 천을 벗겨 에스텔레이드의 손잡이를 지크 쪽으로 향하게 했다.
“…후우!”
무슨 중요한 의식이라도 되는 양 지크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렇게 싫나.’
라일라도 한스도 스녹도 그런 지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심정 따위 지크가 알 바 아니었다.
지크는 에스텔레이드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힘을 줬다.
“…들리네.”
“…들리네요.”
“…들려요.”
쿠우.
지크는 자신의 손에 들린 에스텔레이드를 보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한번 한숨을 쉬고 에스텔레이드를 축 늘어뜨렸다.
“…역시 이 녀석은 고장 난 게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나한테 들릴 리가 없잖아. 분명 누구든 들 수 있을 거야.”
“한심한 말 그만해.”
라일라가 말했다.
“그래도 성검인데 그럴 리 없잖아. 이거 봐, 적어도 나는 들 수 없….”
“…….”
“…….”
“…….”
라일라의 손에 멀쩡히 들린 에스텔레이드를 보고 사람들은 침묵했다.
“…괜찮아. 난 노웸이 있으니까.”
쿠우.
스녹의 아릿한 말만이 침묵 속에서 처량하게 울렸다.
* * *
도시의 재건을 위해 잠시 도시에 머무르며 사람들을 도왔던 지크 일행이지만 그렇다고 계속 그럴 순 없었다.
잔해가 모두 치워지고 슬슬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갈 정도가 되자 지크 일행은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벌써 떠나신다니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떠나는 지크 일행을 마중 나온 건 자그마치 이 도시의 시장이었다.
멋진 콧수염을 기른 그는 신분 따위는 전부 집어치운 채 철저하게 저자세로 그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도시의 파멸을 막아준 영웅들이다. 게다가 지크가 휘두른 그 파괴적이기까지 한 힘. 신분 여하를 떠나 그가 절절매기에 충분했다.
“충분한 대접은 받았습니다. 오히려 도시 재건을 더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하군요.”
“아닙니다! 도시를 구원해주시고 지금껏 재건까지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로서는 넘치도록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서로간의 겸양을 떨어댄다. 등 뒤로 날아오는 라일라의 시선은 상큼하게 무시하며 지크는 웃는 낯을 지우지 않았다.
지크 일행은 그렇게 도시를 떠났다.
하지만 떠난 지크 일행과는 다르게 비올루윈의 남은 사람들은 계속 이 도시에서 자신들의 생을 살아가야 했다.
도시가 멸망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주 수입원이 관광산업인 만큼 미래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폐허가 된 곳에 대체 누가 관광을 하러 올 것인가. 게다가 관광 명소로 각광받던 장소도 훼손된 곳이 많아 과연 원상복구가 될지도 의문이었다.
새로운 관광 자원이 필요했다.
그때, 누군가 시장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굳이 물질적인 것을 팔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야기를 팔도록 하죠.”
“이야기?”
“네. 우리 도시에 덮친 악몽은 끔찍했지만 그 악몽을 벗어나게 해준 영웅들이 있지 않습니까.”
시장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몬스터와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포위된 도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사람들의 운명. 그때 나타난 네 명의 영웅. 말 그대로 소설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말해 보게.”
“네 분의 이야기를 일단 잘 정리하도록 하는 겁니다. 허풍도 과장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니까요. 이럴 때 과장이나 허풍을 섞어버리면 오히려 진실조차 거짓이라고 매도 받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 이야기를 정리해 주변에 뿌리는 겁니다.”
“음. 그리고?”
“그분들이 활약한 지점을 표시하고 비석을 세워 그분들의 활약상을 적어 놓는 겁니다. 동상을 세워두는 것도 괜찮겠군요.”
“또 다른 건?”
“훼손된 명소 몇 개는 남겨두죠. 전투의 처참함을 알리고 그들의 업적을 더욱 높이 세우기 위해서요.”
“음.”
시장이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제법 괜찮은 방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괜찮지 않을까요?”
“도시의 아픔을 관광산업으로 사용한다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만, 괜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뭐라도 해볼 때가 아니겠습니까. 시도는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다른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시장의 마음도 이 일을 진행하는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결국 시장이 결정을 내렸다.
“우리를 도와주신 분들의 명성을 세계에 떨칠 수도 있을 테니, 은혜를 갚을 수도 있겠군. 지금 생각나는 또 다른 아이디어가 있나?”
“영웅분들의 특색으로 별명을 만드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머릿속에 깊이 각인이 될 테니까요.”
“어떤 식으로?”
“일단 전부 용사님이라 칭하고, 그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걸로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건 간단해야 더 기억되기 쉬우니까요. 예를 들어….”
그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다시 말했다.
“스녹이란 분은 땅의 힘을 사용하셨으니 ‘대지의 용사’란 칭호를, 라일라란 분은 여러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셨으니 ‘마도의 용사’란 칭호를, 그리고 다른 두 분은….”
그가 탁상에 손가락을 까닥였다.
“한스란 분은 빛이 서린 검을 휘두르셨으니 ‘태양의 용사’란 칭호를, 지크란 분은 그 압도적인 힘에 경의를 담아 ‘힘의 용사’란 칭호를 드리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나쁘지 않군.”
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회의를 끌 것 없을 것 같네. 그분들을 영웅으로 만들어 그 이야기를 우리의 관광 상품으로 만드는 계획, 당장 실행하도록.”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