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시간은 언제나 공평하게 흐르는 법이다. 그게 희극이든, 비극이든.
비올루윈에 해가 떴다. 태양의 밝은 빛에 밤에 있었던 참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성문이 박살나고 성벽도 일부 훼손됐다. 곳곳에 일어난 화재로 많은 건물이 불탔다.
몬스터와 인간의 시체가 서로 뒤엉켜 절망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관광도시라는 명성이 지금은 참 스산하게 들렸다.
하지만 절망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어이, 여기 좀 들어 올려봐!”
“조심해! 기둥이 불타서 까딱하다간 대번에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어제의 재앙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하나둘씩 모여 협력을 시작했다.
공포를 걷어 내고 슬픔과 분노를 곱씹으면서도 그들은 내일을 향해 하나하나 자신들이 할 일을 시작했다.
비올루윈이 재건의 기치를 세우고 폐허의 잔해를 치우고 있을 무렵, 지크는 자신의 방에서 상념에 빠져 있었다.
‘이 녀석은 뭘까?’
‘나뭇가지 같은 검’을 들고 빤히 쳐다본다.
평범한 검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에스텔레이드를 통해 지크와 라일라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그러기엔 이 녀석이 박혀 있는 곳까지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했지만- 이동시켰고 그들을 에스텔레이드가 있던 공간으로 다시 이동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일순간이긴 했지만 지크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마력을 일깨우기도 했었다.
‘거기 있던 그림자 괴물도 이 녀석과 관련이 있었고.’
라일라의 마법으로 그 공간 안에 있던 그림자들은 대다수 쓸려나갔었지만 구석이나 바위 같은 것 뒤에 위치해 있던 몇몇 놈은 살아서 어기적대고 있었다.
그러나 지크가 이 검을 뽑는 순간 그 남은 것들도 전부 사라졌다.
지크가 검날에 손을 뻗었다.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는 여러 검날 중,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동화되어 있는 검날을 손으로 쓸었다.
힘을 주진 않았다. 날이 바짝 서 있는 검은 상당히 날카로웠다. 스스로 검에 손을 베이는 취미는 없었다.
‘내가 가져야지.’
다른 건 몰라도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이 녀석의 일부가 된 만큼 지크는 이 녀석을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었다.
갖고 다니면서 천천히 이 녀석의 정체를 파악할 요량이었다.
“들어와.”
빈 공간에 지크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끼익!
문이 열리고 라일라가 들어 왔다. 그녀는 다소 놀란 눈치였다.
“노크도 안 했는데.”
“방문 밖에 마법사 기척 정도도 눈치 못 채면 검 부러뜨리고 농사나 지어야지.”
생각해보니 지크의 수준에 자신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웃겨 라일라는 납득했다.
그녀는 지크 일행과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지크가 그녀에게 자신이 머무는 숙소에 머물라고 권유했고 그녀는 권유를 받아들였다.
“앉아.”
지크가 ‘나뭇가지 같은 검’을 의자 옆에 세우고는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라일라는 거절하지 않고 그 의자에 앉았다.
“할 말이라도 있어?”
라일라는 주먹을 가슴에 대고 잠시 숨을 내쉬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고 싶어 했지?”
“그 얘긴 끝난 거 아니었어?”
“알려줄게.”
지크의 ‘친해져서 홀랑 털어먹기’ 작전이 성공한 것일까.
지크가 깍지를 껴 턱 밑에 갖다 댔다.
“저번처럼 질문의 횟수는 붙이지 않는 거냐?”
“응.”
“그렇다면 나야 좋지.”
“단, 조건이 있어.”
“조건 거는 버릇은 좋은 게 아닌데.”
지크의 말을 무시하고 라일라는 ‘나뭇가지 같은 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거, 좋은 검이야?”
“좋아. 아직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지만 내 마력을 일시적으로 전부 깨우기도 했으니, 나중에라도 다시 한번 그러지 말란 법도 없고. 에스텔레이드나 토르니움처럼 자체적으로 사용자에게 힘을 주기도 해. 셋 다 사용해 본 사람으로서 평가하자면 오히려 이 녀석이 주는 힘이 더 커.”
“그럼 토르니움을 쓸 필요는 없겠네.”
지크는 라일라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었다.
“내 조건은 하나야. 곱게 그 검 써. 토르니움에는 눈도 돌리지 말고.”
“…이 검을 얻은 후로 솔직히 에스텔레이드든 토르니움이든 별 상관이 없어졌긴 하지만, 너도 끈질기네.”
“어머, 그래?”
그녀가 반색했다.
“잘 생각했어. 토르니움 같은 거엔 눈도 두지 마.”
“알았다, 알었어.”
지크 입장에서는 손해 볼 일이 없었다.
“자, 그럼 무슨 질문을 해볼까.”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몸을 실으며 지크는 시선을 위로하고 질문을 고르기 시작했다.
“일단 네 정체…라는 질문은 너무 추상적인가.”
“거기부터라면 난 별로 할 말이 없어.”
지크가 인상을 썼다.
“무슨 소리야? 말이 다르….”
내려던 짜증을 삼킨다. 그리고 지금껏 라일라의 행적을 생각해봤다.
“거기부터 기억이 애매하냐?”
“…넌 정말로 ‘힘의 마왕’이 되는 사람이 맞아? 말하는 것도 그렇고 머리 굴리는 것도 그렇고 눈치도 그렇고 ‘힘의 마왕’이라는 단어와는 잘 안 맞는데.”
“힘이 생기면 그쪽으로 많이 의지하거든. 가문을 나왔을 때야 엄청나게 약해서 머리를 쥐어짜고 말발로 넘어가야 할 상황이 많았어. 당시엔 별의별 일이 다 있었으니. 그 반동 때문인지 본격적으로 힘으로 세상을 짓누르기 시작할 때는 머리는 별로 쓰지 않았지. 부하 중에 머리 쓰는 놈도 따로 있었고.”
“그게 네가 본 미래야?”
“뭐, 그렇지.”
지크는 본 게 아니라 경험한 것이지만 그걸 굳이 그녀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넌 네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거냐?”
“몰라.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이미 도망치고 있었어. 나에 대한 것도 쫓는 자에 대한 것도 쫓기는 이유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오로지 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마음과 흐릿하게 솟아오르는, 꿈에서 봤던 미래의 기억들뿐이야.”
“목적이야 아마 네가 알고 있는 미래의 기억과 관련이 있겠지.”
그녀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에 대한 것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지?”
“응. 그리고 생각나는 것들도 나와 같이 미래를 본 너에게는 그다지 필요 없겠지. 여러 미래가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은 나도 잘 생각나지 않으니까 미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면 오히려 네가 더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어. 그래도 궁금하다면 대답해줄게.”
“듣는다고 해도 나중에.”
지크는 질문을 바꿨다.
“포르티에는 왜 있었냐?”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정말로 맞는 기억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당시 내 기억 속에 있는 인물 중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자가 ‘뱀파이어’였거든.”
“이젠 뱀파이어가 아니야. 녀석은 이제 요하임 드라큘 백작이다.”
라일라가 눈을 끔벅였다.
“…뭔가 있었어?”
“녀석의 미래를 바꿨어. 그러니 이제 ‘뱀파이어’가 되지도 않겠지.”
“…어째서?”
“내 측근인 녀석이니까. 착하게 살기로 결심했는데 녀석이 나쁜 놈이 되어버리면 내가 죽여버려야 할 수도 있잖냐.”
라일라가 지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질문 하나 해도 돼?”
“네가 내 질문을 받아 주고 있는 만큼, 여기서 거절할 순 없지.”
“너는 ‘지크 모어’가 되지 않을 거지?”
“적어도 지금은 생각 없어.”
만약 그렌 제너드의 마지막 말이 아니었다고 해도, 지크는 자기가 마왕으로 살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그 생은 이미 충분히 살아봤다.
남들은 갖지 못하는 두 번째 인생, 똑같이 살면 재미없지 않은가.
“지금 내 인생 목표가 착하게 사는 거니까.”
지크가 젠체했다. 하지만 적어도 방금 한 말은 라일라의 심금을 울리기엔 실패한 모양이다.
라일라가 진짜로 개소리를 듣는다는 반응이었다.
“어제 이몰르…라고 했던가? 그 작자를 죽이면서 한 짓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데?”
한스와 스녹에게 들은 지크의 악취미를 듣고 라일라는 경악을 했다.
헛된 희망을 주고 그걸 빼앗으며 즐기다니.
“솔직히 오늘 토르니움을 갖지 말라고 담판을 지으러 온 이유도 그게 영향이 커.”
누가 봐도 악당이나 할 짓거리였으니까.
하지만 라일라의 비난에도 지크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결국 그 덕분에 내가 네 정보를 듣게 됐다는 거잖아. 문제될 게 없군.”
“…네 사고방식은 못 따라가겠어.”
결국 그녀도 한스와 스녹의 뒤를 이었다. 지크를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의자에 늘어진 그녀에게 지크가 질문을 계속했다.
“유적에는 왜 있었냐?”
“거기가 내 거처였어. 지식이 있다고 해도 돈도 없고 경험도 없어. 게다가 쫓기는 몸이지. 그래서 그나마 기억이 있는 그곳으로 숨어들었어. 숨긴 좋은 곳이잖아.”
책만 잔뜩 읽은 아이가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고 라일라는 회상했다.
“…그런데 설마 그들이 거기까지 찾아올 줄이야.”
라일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의자의 팔걸이를 힘주어 잡았다. 고개를 숙였다.
맑은 눈에서 당장 눈물이 떨어질 것 같다.
그녀 탓은 아니다. 지크는 분명 그렇게 말했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래도 보통 사람이라면 죄책감을 느끼겠지.’
사건과 라일라의 증언, 그리고 이몰르라는 놈이 라일라를 우선적으로 잡으려고 한 걸 보면 놈들이 라일라를 추격해온 건 확실하다.
‘처음에는 추격대를 편성해 그녀를 잡으려 했고, 그게 실패하자 도시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서라도 그녀를 찾으려 했어.’
정말로 징글징글한 녀석들이다. 세력도 있고 힘도 있고 무엇보다 끈질기다.
‘그만큼 라일라가 중요하단 거겠지.’
지크가 손을 뻗어 라일라의 손등에 얹었다.
그녀가 고개를 든다. 눈물 섞인 눈동자가 한껏 치떠져 있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네 탓이 아니다.”
낮은 목소리로 위로한다.
라일라의 눈동자가 슬쩍 흐려지더니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고개를 떨구고 잠시 흐느꼈다. 지크는 계속 그녀의 손을 잡아줬다.
그녀가 흐느낀 시간은 짧았다. 고개를 들고 부끄럽게 지크가 덮고 있던 손을 빼 눈물을 닦았다.
“설마 네가 위로해줄 줄은 몰랐어.”
“착하게 살기로 한 나쁜 놈이니까.”
“그게 뭐야.”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목이 잠겨 있었지만 기분은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지크도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러면 조금 더 마음을 열겠지.’
철저하게 계산된 위로.
그녀와 친분을 쌓아 그녀의 정보를 뽑아먹겠다는 계획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기억이 흐릿해서 대부분의 정보를 잊어먹은 것 같으니, 나중을 대비해야지.’
눈앞의 이득만 보고 빨리 정보를 뱉으라며 그녀를 압박하는 것은 하수들이 하는 짓이었다.
그렇게 음험한 생각을 하면서도 지크는 입가에 선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후, 진정됐어. 고마워.”
그녀가 눈물을 모두 훔치고 얼굴을 몇 번 만져 표정을 고친다. 그리고 멀쩡한 것처럼 지크를 쳐다봤다.
“다른 질문은?”
목소리도 평상시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크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게 부끄러웠는지 뺨에 홍조가 어려 있었다.
당연히 지크는 모른 척했다.
‘흠, 더 물을 게 있나?’
그녀의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걸 안 지금 물어볼 만한 건 거의 없었다.
솔직히 그녀가 본 미래라는 것에 대해선 별로 흥미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만으로도 착한 일을 하기엔 충분하다.
가장 궁금했던 그녀의 정체와 그녀를 쫓는 무리의 정보도 모르는 상황.
‘개털이네, 이 녀석.’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뭐, 됐어. 나중에 기억이 돌아왔을 때 뽑아먹으면 되니까.’
미래를 기대하기로 하고 지크는 몇 가지 질문을 끝으로 슬슬 질문을 끝내기로 했다.
“브레이브는 뭐야?”
라일라가 자신의 성으로 추천했던 단어다.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고 던진 질문이다. 그저 알고 있는 건 다 대답해주겠다니까 문득 떠오른 걸 질문으로 한 것뿐이다.
그녀가 변덕으로 지어준 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지크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지크 브레이브. 아마도 네가 용사로서 활동한 미래의 이름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