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전황은 다시 변했다. 이몰르의 참전으로 인해 한스는 완전히 발이 묶였다.
아니, 한스만이 아니었다.
“선배 조심해요!”
쿠!
스녹이 돌덩이들을 쏘아보낸다. 사람의 상반신을 손쉽게 터뜨릴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는 돌덩이들이다.
하지만 이몰르의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예기가 몇 번 지나가자 돌덩이들은 조각조각 난 채 힘을 잃고 지면으로 떨어졌다.
“저건 대체 뭐야!”
쿠우우….
상대가 커다란 움직임을 보이기는커녕 팔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공격이 모조리 조각나버리니 스녹은 당황했다.
스윽.
이몰르가 스녹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녹이 깜짝 놀라 흙벽을 세웠다.
콰드득!
무언가가 흙벽을 파고들어 온다. 안에 여러 암석들도 섞어 강도를 올린 녀석이었지만 벽을 파고들어오는 무언가에겐 속수무책이었다.
“칫!”
결국 스녹은 자리를 피했다.
퍼엉!
흙벽이 산산조각나 파괴된다. 그러나 스녹은 무언가가 자신을 쫓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리 쪽에서 살짝만 닿아도 뼈까지 썰릴 것 같은 예기가 느껴졌다.
“젠장!”
급히 대지를 일으켜 발을 감쌌다. 급한 대로 만든 갑옷이라 강도는 그다지 기대할 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대지의 권능을 휘감은 갑옷이다. 기본적인 방어력은 갖추고 있다.
서걱!
하지만 예기는 너무도 쉽게 대지의 갑옷을 파고들었다.
조금만 있으면 발이 통째로 날아갈 상황에 스녹이 위기감을 느낄 때였다.
콰앙!
옆에서 빛이 날아왔다. 예기가 주춤거리자 스녹은 갑옷을 벗어버리고는 급히 몸을 뺐다.
콰직!
남아 있던 갑옷이 박살났다.
“괜찮아?”
“네. 어떻게든 발은 붙어 있네요.”
쿠우.
아슬아슬하게 여전히 매끈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는 발을 스녹은 안도감에 어루만졌다.
하지만 이몰르는 스녹이 계속 안도감에 차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스윽!
다시 한번 예기가 짓쳐들었다. 스녹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한스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콰아앙!
빛을 머금은 에스텔레이드와 예기가 맞부딪치며 커다란 충격파가 발생했다. 스녹이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선배! 괜찮아요!”
“괜찮아! 저 녀석의 무기가 뭔지 알겠어!”
환하게 빛나는 에스텔레이드의 빛에 뭔가가 비치고 있었다. 가느다란 몇 줄기의 그것이 에스텔레이드의 검신을 휘감고 하늘거렸다.
“…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무기에 스녹이 당황하여 뇌까렸다.
“평범한 실이 아니네. 사검이라고 하지. 미스릴과 오리할콘 등 여러 가지 금속의 합금을 얇게 뽑아내 만들어서 부드러운 데다 질기고 날카롭다네. 에스텔레이드를 잡아 놔도 훼손되지 않을 만큼.”
까드드드득!
에스텔레이드와 사검이 마찰하며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큭!”
엄청난 힘이었다. 한스는 잠시 버티는가 싶더니 에스텔레이드를 비틀어 뺐다.
다행히 에스텔레이드는 사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몰르의 거센 공격은 계속됐다.
한스와 스녹은 함께 싸웠다. 한 명으로서는 도저히 이몰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한스가 전위로 나섰고 스녹이 후위에 섰다. 에스텔레이드가 빛을 뿜고 대지가 몸부림친다. 그러나 사검은 그 모든 걸 막고 꿰뚫고 잘라냈다.
한스와 스녹의 참전으로 잠시 유리해졌었던 전장은 다시 몬스터 측으로 기울었다.
몬스터들이 마음대로 날뛰고 ‘로브를 입은 자’들이 기사들을 사냥한다.
이몰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스와 스녹을 몰아붙이면서도 그는 주변에 있는 기사와 병사들을 학살했다. 고작 손만 뻗었는데도 불구하고 쭉 늘어난 사검은 목표를 손쉽게 도륙했다.
콰앙!
결국 진영이 무너졌다. 뻥 뚫린 진영 사이로 몬스터들이 들이친다.
이제 비올루윈 측 병력은 정면만이 아니라 측면, 후면까지 신경을 쓰면서 전투를 해야 했고 그것은 곧 전투력의 급감으로 이어졌다.
“후퇴하라!”
결국 기사 단장이 후퇴 결정을 내렸다.
전장 근처의 주민은 대부분 도망친 상황. 도시의 더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방어 진형을 짤 생각이었다.
그러나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적들은 비올루윈 측이 다시 진형을 짤 시간을 주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숫자를 이용해 밀어붙이고 요소요소 로브를 입은 자들이 방해했다.
비올루윈 측은 계속 밀렸다. 그리고 결국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선배! 뒤에…!”
“알아!”
연속되는 사검의 공격에 주변을 살필 새도 없지만 비명소리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기 충분했다.
‘결국 사람들의 대피가 완료되지 않은 곳까지!’
거기에 진형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뒤에 시민들이 도망치고 있으니 방어선을 더욱 내릴 수도 없다.
결국 기사와 병사들은 그 자리에 서서 적을 맞아야 했고 많은 이들이 각개격파를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스와 스녹에게도 그들을 도울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콰앙!
“커억!”
아무리 희귀한 금속의 합금이라고 해도 얇은 실 주제에 사검의 위력은 대단했다. 쏘아진 실을 막은 한스가 충격 때문에 뒤로 날아갔다.
콰앙!
어느 골목에 쌓여 있던 상자 더미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상자가 산산조각이 나며 한스의 등이 땅바닥에 닿았다.
“으으!”
한스는 고통에 눈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크의 엄격한 교육 덕에 그 와중에도 그는 에스텔레이드를 꽉 붙잡고 있었다.
“…응?”
옆쪽에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빨리 피해야…!”
한스가 말을 줄였다. 한스가 떨어진 상자 뒤에 숨어 있었던 듯한 사내들이 보인다.
겁먹은 듯 엉덩이를 땅바닥에 댄 채 팔만으로 어기적어기적 물러나고 있다.
낯이 익었다.
‘술집에서 시비를 건 사람들!’
한스와 스녹의 꿈을 비웃다가 지크에게 먼지가 나도록 처맞은 양아치들이었다.
시비를 걸 때의 용감함은 어디로 가고 그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지 눈만 뒤룩뒤룩 굴린 채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당연히 좋은 감정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을 버려둘 수도 없었다.
“빨리 도망쳐요! 곧 몬스터들이 올…!”
콰앙!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스는 날아오는 사검을 에스텔레이드로 쳐냈다. 사내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몰르가 골목 안으로 내려섰다. 마치 날개를 접듯 그가 휘두른 사검이 주변 건물에 균열을 내며 베어들어 왔다.
‘젠장!’
피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가 피한다면 뒤의 사람들이 갈가리 찢겨질 게 뻔할 노릇.
‘내버려둘까.’
어치파 양아치들. 게다가 자신에게 시비를 건 전적까지 있지 않은가.
“…빌어먹을!”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들어 올렸다.
검신에 빛이 모였다. 마력이 들끓으며 에스텔레이드에 힘을 보탰다.
그걸로 사방에서 날아오는 사검들을 쳐냈다.
콰아아앙!
폭음과 폭발. 거친 전투의 여파가 주변에 퍼졌다. 안 그래도 사검에 난도질당한 옆의 건물이 더욱 파괴됐다.
뚝! 뚝!
팔에서 흐르는 액체의 감촉이 기분 나쁘다. 한스는 왼 팔뚝에 거미줄처럼 나 있는 상흔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모든 공격을 막지 못해 상처를 허용했다.
그러나 양아치들은 모두 상처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도망쳐!”
한스가 크게 외쳤다. 우물쭈물하던 그들도 눈앞에 다가온 공포에 급히 몸을 일으켜 도망갔다.
“굳이 지킬 필요가 있었나? 외견을 보아하니 성실한 인간들도 아닌 것 같은데. 상처까지 입어가면서 말이야.”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피부로 새긴 사람을 본 적이 있거든.”
구체적으로 카르위먼의 성녀라든가 말이다.
“과연. 그들도 외모와는 다른 인간일지 모른다는 건가.”
“아니, 똑같은 놈들이야.”
“…방금 전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겪어봤거든. 마음에 안 드는 놈들에게 시비를 거는 양아치가 맞더라고.”
이몰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도 구했나? 상처까지 입으면서?”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 그리고 난 머리가 나빠서 죽일 놈과 살릴 놈 구분하는 건 잘 못 해.”
“…과연 에스텔레이드가 선택할 만한 인간이군.”
이몰르가 감탄했다.
“하지만 역시 그걸 네가 들게 만들 순 없다. 주인이 따로 있거든.”
“그러니까 이런 건 주은 놈이 임자라니까.”
“동의하네. 그리고 죽은 자의 물건도 주운 놈이 임자인 법이지.”
콰아앙!
다시 이몰르의 공격이 시작됐다.
한스는 당장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은 건물의 벽을 걷어차며 위로 솟아올랐다.
“선배!”
이몰르의 공격을 받고 잠시 떨어져 있던 스녹이 합류했다.
그가 한스의 상처를 봤다.
“선배, 상처가!”
“가벼운 상처야. 검을 움직이는 데는 문제없어.”
한스는 다시 에스텔레이드를 겨눴다.
콰르르르르!
결국 건물은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주택의 목조 파편이 마구 휘날리는 사이로 사검이 다시 뱀처럼 공격해 왔다.
한스와 스녹은 서로 연합해서 계속 이몰르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그들의 열세는 뚜렷했다.
사방에서 비올루윈 측 병력들이 죽어나가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무력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은 이몰르를 상대하는 것만도 벅찼다.
콰앙!
다시 한번 스녹이 세운 벽이 터져 나갔다.
사검이 쏘아진다. 한스가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렀다. 그러나 사검은 이번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촤아앗!
독사가 입을 벌리듯 곧게 뻗던 사검이 양 옆으로 휘었다.
에스텔레이드를 회오리처럼 타고 올라가 한스의 팔을 잡았다.
찌이익!
“아악!”
옷이 찢어지고 피부가 벌어지며 피가 흥건하게 스며 나온다. 스녹이 한스를 구하려 했지만 다른 사검이 방해했다.
“이름을 밝히는데 팔은 필요 없겠지.”
느긋한 목소리가 잔혹한 미래를 예견했다.
이몰르는 손가락에 힘을 줬다. 사검이 당겨졌다. 곧 꽉 움츠러든 사검에 의해 한스의 팔이 완전히 뜯겨 나갈 것 같았다. 고통에 한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사각!
작은 절삭음. 마치 세계에서 알아주는 명검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베는 것 같은 소리다.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웠다.
한스의 팔을 당장이라도 날려버릴 것 같던 사검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사검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린 한스의 피가 사검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또렷하게 보여줬다.
에스텔레이드의 빛이 이몰르의 손에 연결되어 있는 사검을 비췄다. 얇게 빛나는 그것은 분명 짧아져 있었다.
잘렸다.
한스, 스녹은 물론이고 이몰르도 경악했다.
하지만 그건 전초에 불과했다.
후웅!
바람이 불었다. 앞머리를 살짝 흔들리게 하는 미풍.
당장이라도 피크닉을 가고 싶게 만드는 그런 바람. 그러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끔찍했다.
콰지지지직!
몬스터들과 로브를 입은 자들을 필사적으로 막던 비올루윈 측 병력은 무기를 휘두르는 것도 잊은 채, 자신들의 눈앞에서 갑자기 피투성이로 변해 쓰러지는 적들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전투가 멈췄다. 비올루윈 측도 그렇고 살아남은 몬스터, 로브를 입은 자들도 그렇고 뭔가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탁!
그때 누군가 전장에 내려섰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한스와 스녹의 눈에 반가움이 어렸다. 그는 지금 누구보다 만나고 싶어 한 자였다.
“지크 님!”
한스가 크게 소리쳤다. 지크는 ‘나뭇가지 같은 검’을 어깨에 탁 걸쳤다.
그의 눈이 한스가 들고 있는 에스텔레이드를 쳐다봤다.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고, 이 급박한 상황에서 지크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그걸 네가 왜 들고 있냐?”
(다음 편에서 계속)